2026년 10월 24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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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선교사들의 고백

2020 선교헌금 작정을 앞두고
은퇴선교사들의 고백

 

“내가 끝까지 선교할 수 있었던 원동력”
성도들의 선교헌금, 중보기도, 재능기부

 

은퇴선교사들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냥 하는 말도 아니고, 체면치레 하려는 말이 아니다. 진짜 선교가 그렇다. 선교사 혼자서는 어려움을 만나면 넘어질 수밖에 없고, 벽에 가로막히면 그 벽을 넘어서는 게 쉽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선교사들이 힘들 때마다 돕는 손길을 보내주셨다. 성도들이다. 은퇴선교사들은 “성도들의 선교헌금과 중보기도, 재능기부가 온누리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970명이 선교지를 끝까지 지키고, 한 평생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고백했다.
/ 김영선 기자 k4458@onnuri.org

 

은퇴선교사 두 명을 만났다. 그들은 “선교사로 살아가는 게 너무 행복했고 즐거웠다”고 고백했다. 김광선 선교사는 동아시아 A국에서 82세에 은퇴했고, 한익권 선교사는 동아시아 B국에서 73세에 은퇴했다. 그들이 끝까지 선교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온누리교회 성도들의 선교헌금, 중보기도, 재능기부였다. 

 

“60대에는 인생의 100%를 하나님께”

 

김광선 선교사는 대학생 시절 섬기던 중등야학교 학생들에게 “60세부터는 내 인생 100%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선언했다.
“참된 크리스천은 수익뿐만 아니라 인생까지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40대에는 인생의 40%를, 60대에는 인생의 100%를 십일조로 드리자고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걸 까맣게 잊고 살다가 60세에 기억해냈어요. 바로 사회생활을 정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은 동아시아 A국에 선교베이스가 막 세워지던 때였다. “동아시아 A국 선교베이스를 담당하던 선교사가 안식년을 가지 못하고 있으니 1년만 고생해 달라”는 하용조 목사의 권면으로 김광선 선교사가 동아시아 A국 선교베이스로 파송 받은 게 1998년이었다. 김광선 선교사는 동아시아 A국 선교베이스를 섬기면서 현지인들을 양육하고, 현지 교회에 양육, 전도, 봉사 등을 활성화 시켰다. 그중에서 성도들의 도움을 많이 받은 사역이 구제다.
“처음에는 뭐 아무것도 없으니 구제사역을 많이 했어요. 동아시아 A국 문화로는 이유나 대가없는 섬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우리는 크리스천이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여러분들을 섬긴다고 했더니 효과가 있더라고요. 기독교와 하나님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점차 사역대상이 늘어나면서 20개촌(1개촌 주민 200명)을 섬겼어요. 해외비전교회 성도님들이 구제사역에 많이 동참해주셨어요.”
김광선 선교사는 2008년 후임자에게 동아시아 A국 선교베이스를 넘기고 국내로 들어와 신학을 공부했다. 또 다른 선교를 위해서였다.
“초창기에는 신학을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어요. 그런데 선교사역이 점차 성장하면서 현지 교회에 나눠줘야 할 것들이 많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안식년에 국내로 들어와서 신학을 공부했어요. 그랬더니 동아시아 A국 선교베이스에서 훈련받은 현지인이 남쪽에 내려가서 함께 사역하자고 제안하더라고요. 그곳에서 2011년부터 올해 5월까지 사역하고 은퇴했습니다.”
김광선 선교사에게는 동아시아 A국에서 보낸 20여 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그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성도들의 선교헌금, 중보기도, 재능기부였다.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처럼 선교에 전적으로 참여해주시는 분들이 드물어요. 선교지에 있으면 그 헌신에 감탄이 나올 정도에요. 안식년이나 갑작스런 질병으로 본국에 오는 선교사님들도 성도님들이 부족함 없이 섬겨주셔서 행복할 수밖에요. 바로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로 그 교회‘의 모습 아닐까요?”


 

 


 

초토화된 전장에서 승리의 깃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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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익권 선교사도 50세 무렵 사회생활을 정리하고 그동안 지키지 못했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주의 일을 해야 겠다”고 마음만 먹고 있었는데 자녀의 소개로 인터콥에서 시니어선교 훈련을 받았다. 이 훈련을 계기로 인터콥에서 시니어동원사역을 하게 됐는데 주로 동아시아 B국으로 선교사들을 동원했다.
“인터콥 간사로 5년 동안 섬기면서 입만 열면 ‘동아시아 B국으로 가라’고 했는데 저는 정작 동아시아 B국에 가기 싫었어요. 가보지도 않았고, 이 나이에 혼자 가서 뭐하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확실하게 정리를 하려고 팔봉산 기도원에 올라갔어요.”
팔봉산 기도원에서 한익권 선교사는 혹한의 날씨를 좁디좁은 방에서 모포를 뒤집어쓰고 견디면서 주님의 뜻을 물었다. 갑자기 눈앞에 빨갛고 커다란 십자가가 보이더니 “동아시아 B국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어 달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게 2001년 동아시아 B국으로 향했다. 첫 해는 정말 힘들었다.
“가로등도 없고, 횡단보도도 없는 무법지대에 춥기는 또 얼마나 추운지 몰라요. 밤중에 회의가 끝나면 숙소까지 가는 길이 너무 힘들었어요. 술에 취한 부랑자들이 길가 여기저기에 있었거든요. ‘가로등 좀 세워주세요’라고 기도했더니 거짓말처럼 제가 살던 지역부터 가로등이 생겼어요. 정말 놀랐어요. 현지 선교사들이 동아시아 B국 가로등은 한익권 선교사가 세웠다고 할 정도에요. 그때부터 두려움과 어려움이 싹 사라졌어요.”
한익권 선교사는 B학교에서 거리의 아이들을 돌보는 것으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남자아이는 운전수, 여자아이는 미용사라고 답할 만큼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게 일대일 장학사역을 시작했어요. 강서, 김포공동체에서 그 아이들을 오랜 기간 돌봐주셨어요. 아웃리치 와서 그 아이들과 교제하고, 대학등록금까지 내주셨어요. 그 덕분에 그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한익권 선교사는 현지인 7명과 중보기도모임을 초석으로 현지인들이 중심이 된 ‘영원한무지개교회’를 개척했다. 지금은 4개의 지교회를 둘 정도로 성장했고, 현지에서 선한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동아시아 B국은 국가에서 불교와 토속신앙을 장려할 정도로 복음을 전하기 힘든 지역인 것을 고려하면 대단한 열매다. 한익권 선교사와 현지인 성도들이 지역마다 지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온누리교회 성도들의 아웃리치였다.
“인천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이 많이 방문해 주셨어요. 몸 뉘일 곳도 변변치 않은데 아웃리치를 오셔서 고생을 정말 많이 하셨어요. 그래도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이 오셔서 한바탕 전도하고, 집회하고 나면 그 영향력이 대단했어요.”
한익권 선교사는 올해 73세 나이로 은퇴했다. 한 선교사는 온누리교회 성도들에게 꼭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이 해주시는 중보기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요. 동아시아 B국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은 매 순간간이 영적전쟁이이에요. 성도님들의 중보기도는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에요. 성도님들의 중보기도로 초토화된 전장에서 승리의 깃발을 꽂는 게 선교사의 역할입니다. 2020년에도 선교와 선교사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해주십시오.”

작성자  김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