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순 목사의 Wise Mothering (1주~4주)
김정순 목사의 Wise Mothering
1주 : 생명의 어미, 하와 / 2주 : 대상 항상성이 말하는 안정감
3주 : 베스트보다 유니크 / 4주 : 사라와 한나가 주는 메시지
생명의 어미, 하와
유대인에게 어머니를 뜻하는 히브리어 ‘엠’은 대단히 중요한 세 가지 단어의 어원이다. 첫째 믿음을 뜻하는 ‘에무’, 둘째 진리를 뜻하는 ‘에메트’, 셋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아멘’이 바로 그것이다. 히브리어 ‘엠’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기초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는 아멘을 뜻한다. 이 중요한 세 단어가 모두 어머니라는 단어를 기초로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류의 첫 번째 어머니인 ‘하와’는 ‘생명을 주는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여자에게 중요한 것들을 맡기셨다. 아이를 잉태 할 수 있도록 자궁을 주셨고, 아이에게 수유할 수 있도록 유방을 주셨다. 가족을 위해 식사를 제공하도록 식탁권도 주셨다. 이것은 모두 생명과 연결된 것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내고, 유지시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명이다. 이것은 남자들과 구별된 큰 축복이다. 이렇게 중요한 엄마의 마음이 불안하거나, 아프거나, 기복이 심하면 그 집안에 불이 꺼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와는 아담에 의해 이름이 지어졌는데,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볼 것은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얻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소망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 ‘모든 살아 있는 자의 어미’라는 소명을 여인들에게 주셨다. 하와는 죄와 생명을 동시에 전수한 어미다. 그래서 엄마들은 ‘good enough mother’가 될 수도 있고, 자녀의 목을 죄는 ‘murder’가 될 수도 있다. 자녀에게 죄성인 본성을 그대로 전수하느냐, 아니면 주님이 원하시는 성품을 전수하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엄마에게 달려 있다. 엄마들은 자녀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기에 더 더욱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죄성에 대해 더 민감하게 느끼고 자녀들을 대해야 한다. 생명의 어미, 하와는 첫째, 돕는 배필로(창 2: 18), 남자를 위해 (고전 11:8~9) 창조되었다. 둘째, 존재의 신비로 더 연약한 그릇으로 창조되었다. “남편들이여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인줄 알고 그녀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또한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할 사람으로 알아 귀하게 여기십시오. 이는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벧전 3: 7). 셋째, 정결한 여자임을 말한다. “이 비밀이 큽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갖자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사랑하듯 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십시오”(엡 5: 31~32).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약혼시켰습니다. 그러나 뱀이 그이 간교한 꾀로 하와를 속인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이 그리스도께 대한 순전함과 정결함을 버리고 부패하게 될까 두렵습니다”(고후 11:2~3). 이것은 도덕적으로는 순결의 보존과 유지로, 신분적으로는 사랑과 순종 안에서 온전한 연합을 말한다. 넷째, 하와는 출산과 자녀 양육을 담당한다. 성경은 자녀를 많이 낳아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자연을 다스리라고 한다(창1:28). 또한 “임신의 수고로움을 크게 하고, 괴로움 속에서 자녀를 낳고, 남편을 지배하려고 하나,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한다(창3: 16). 다섯째, 영적인 특성으로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 되었고(창 1:27), 능력과 존귀함이 그녀의 옷이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잠 31:25),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움도 잠깐이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다(잠31: 30). 결론적으로 생명의 어미, 하와는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라(딤전 2: 15)”고 한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 이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일지라도 말이 아닌 아내의 행실로 인해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두려움으로 행하는 여러분의 깨끗한 행실을 보고 그렇게 된 것입니다”(벧전 3:1~6). 생명의 어미 하와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것이다. 본성을 거스르는 것은 내 생명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죽지 않고서는 절대로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를 구한 것처럼, 생명의 어미, 하와는 가족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육적 생명(자신의 탐욕)을 죽이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가족을 살려야 한다.
대상 항상성이 말하는 안정감
대상항상성은 대상관계이론에서 나온 말이다. 심리학의 대부 프로이드(1856-1939)는 욕동심리학에서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말했다. ‘이드’라는 ‘본능’과 ‘에고’라는 ‘자아’, ‘초자아’라는 ‘수퍼 에고’의 개념도 발표했다. 그는 인간은 리비도라는 욕동으로 살아가는 유기체라고 했다.
1930년대부터 대상관계이론가들은 리비도에 의해 인간이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양육해 주는 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자기(self)’를 만든다고 했다.
유아는 양육자 중 특히 어머니의 거울반응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감지한다. 건강하고 긍정적인 어머니와의 좋은 관계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하려고 한다.
유아는 좋은 어머니의 정서적 이미지(표상)을 통해 ‘좋은 나 (good me)’를 경험한다. 반대로 나쁜 어머니의 정서적 이미지를 통해 ‘나쁜 나 (bad me)’를 경험한다. 유아에게 안전하고 사랑스러운 양육환경을 준 대상은 좋은 표상이 되고, 고통스럽고 학대하는 양육환경을 준 대상은 나쁜 표상으로 기억된다. 좋거나 나쁜 표상 모두 아이에게 내면화되면서 자기 표상을 건강하게 만들 수도 있고 병들게 만들 수도 있다.
자기표상은 자기개념이 토대가 되어 긍정적 자기개념이나 부정적 자기개념을 만든다. 이렇게 형성된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가치와 능력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평가하는 개념이 된다.
도날드 위니캇(소아과 의사, 정신분석가,1896~1971)은 부모라는 안정된 환경을 강조하였다. 그는 환경이 충분히 좋을 때에 유아의 성숙 과정이 촉진된다고 보았다. 0~1세 때 엄마의 안정된 환경(촉진하는 환경, 안아주는 환경)은 유아 스스로 전능감을 갖도록 돕는다. 유아의 자기애적 전능감을 키워준다. 신체적 경험뿐만 아니라 감정적 일치 경험 및 현실세계가 믿을 만하다는 신뢰를 만든다.
위니컷은 환경을 아기에게 맞춰주는 것의 중요성을 논하면서 참자기와 거짓자기의 개념을 소개했다. 이 개념은 안정된 환경에서 상호작용하면서 발달하는 측면을 가리킨다. 엄마는 아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들로부터 아기를 보호해야 한다. 환경이 안정되지 못하면 아기는 마지못해 응낙하는 반응을 보일수도 있다. 이 반응은 아기의 자발성과 핵심적 생명력을 잃게 만들고, 고립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이때 거짓 자기가 생긴다. 충분히 좋은 양육환경이 존재하지 않아 발생하는 것이다.
참자기는 아기의 충동이 엄마에 의해 부응되고 확증 되면서 나를 확립하게 만든다. 참자기는 나의 세계, 나 아닌 세계가 분명하게 확립될 때 이루어진다. 아기가 유아 전능감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시작된다.
마가렛 말러(내과 의사, 정신분석가, 1897~1985)는 0~2개월은 자폐기라 했다. 이때 충분한 안정감이 없으면 자폐증이 생기고, 2~18개월은 공생기라 해서 이때 충분한 안정감이 없으면 정신분열이 생긴다고 했다. 18~36개월은 분리개별화기라 해서 이때 대상과의 정서적 안정감이 없으면 경계성 인격장애, 자기애성 인격장애자가 된다고 했다. 36개월~ 만6세는 외디푸스 콤플렉스기라 해서 이때 대상과 정서적 안점감이 없으면 노이로제에 걸린다는 했다. 만 6세까지를 대상관계이론가들은 인생을 결정적 시기라 보았다. 이 시기에 불안정한 정서적 환경이 심은 씨앗은 대개 학령기에 마주하는 외부적 환경에 의해 움터서 정신적 문제를 드러내게 된다.
대상항상성은 대상, 특히 어머니가 곁에 있거나 부재하든지 간에,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좌절시키건 간에 어머니에 대한 일관된 상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직장 때문에 아이의 양육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데 그 대상이 계속 바뀌면 아이는 정서적으로 불안해서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지 못한다. 아이를 양육하는 대상이 일정할 때 대상항상성을 갖는다.
아이를 양육하는 대상이 여럿이고 안정되지 않을 경우, 아이는 파편화된 자기를 만들어 자신의 이중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이럴 때 거짓자기가 더 발달된다. 어른이 되어도 성인아이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교회에서도 트러블 메이커로서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장본인이 될 수 있다. 대상항상성과 아기였을 때 안정감이 성인의 삶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다.
베스트보다 유니크
유대인을 지칭하는 ‘히브리인’은 ‘강 건너온 사람’ 이라는 뜻이다. ‘혼자서 다른 편에 서다’라는 의미도 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남보다 뛰어나라’는 요구를 하지 않는 대신 ‘남과 다른 사람이 되라’고 주문한다. 그들은 자녀들을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고, 더 많이 배우고, 더 성공시키기 위해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선민답게 살라고 가르친다. 획일적인 방식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대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라고 가르친다. 유대인 자녀들은 경쟁을 통해 다른 사람을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준 재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산다. 유대인 부모들은 학교공부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교육의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형제자매끼리도 비교하지 않는다. 유대인 격언에 “형제의 머리를 비교하면 양쪽 다 죽이지만, 개성을 비교하면 양쪽을 다 살릴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개성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의 교육관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또 유대인 부모들은 “싫으면 하지 말고, 하려면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홍익희는 “유대인의 창의성의 비밀”에서 옛날 우리 초등학교 성적표에 있었던 평가기준인 ‘수,우,미,양,가’를 이렇게 표현했다. 수는 ‘우수하다’, 우는 ‘넉넉하다’, 미는 ‘좋다’, 양은 괜찮다, 가는 ‘가능하다’고 해석했다. 모든 아이들은 충분한 재능과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정규 학교에서 퇴학당한 에디슨과 아인슈타인도 유대인들의 교육 풍토에서 세계적인 과학자로 클 수 있었다. 이것이 유대인 교육의 요체이다. 자녀의 재능을 찾아 키워주는 것이 진정한 영재교육이다. 유대인은 자녀를 부모가 바라는 형태로 이끌지 않는다. 아이의 재능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한다. 어려서부터 아이의 지적 호기심을 부단히 자극시켜 스스로 재능을 찾게끔 돕는다. ‘베스트(Best)’는 단 한 명뿐이지만 ‘유니크(Unique)’는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다. 유대인 부모들은 하나님의 주신 달란트를 발견하기 위해 질문과 토론으로 교육한다. 식사시간에도 육의 양식뿐만 아니라 영의 양식인 말씀과 혼의 양식은 지식을 이야기한다. 끊임없이 아이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지 관찰한다. 학교에서도 등수를 매기는 성적표가 존재하지 않는다. 학습 진도표가 있을 뿐이다. 남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달라야 한다는 요구가 창의성 발휘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가정과 사회, 학교는 가치관이 같다. 정말 부럽다. 한국을 보자. 그리스도인 부모들조차 유니크보다 베스트를 요구한다. 그들은 사회가 그렇게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경쟁’이라는 구도아래 옆집 아이보다 잘해야 한다는 비교의식과 교만이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단어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대치동에 가서 돼지 엄마(최고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고급정보를 알고 있는 엄마)를 찾아라”는 말은 우리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우리는 자녀들을 한 줄로 세워 한 곳을 향해 가라고 한다. 부모뿐만 아니라 사회와 학교가 그렇게 요구하고 있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아빠가 되면 이번엔 사회가 경쟁과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자녀들과의 깊이 있게 대화하는 것, 자녀들의 달란트를 관찰하는 것,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하지 못한다. 정말 필요한 것, 정말 중요한 것, 정말 행복한 것에 대한 기준과 방법이 무너진 것이다. 모두 베스트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사회의 불행을 보고 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존 듀이의 실용주의의 열매들이다. 주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의 자녀들을 위해 울라 (눅 23: 28)” 라고 하셨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가정의 달 5월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자문해야 한다. 자녀들을 ‘세상의 베스트’로 만들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유니크’를 관찰하고 격려하면서 자녀가 행복을 추구하도록 도울지 생각해야한다.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깊이 자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엄청난 자기성찰’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얄팍한 그리스도인이었는지를 바라봐야 한다. 부모인 나부터 온전한 돌이켜야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히브리인(강을 건너 온 사람)처럼 구별되게 살아야한다. 주님이 주신 자녀들을 믿고 그들의 ‘유니크’를 존중하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자.
사라와 한나가 주는 메시지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함께 있다. 그래서 가정의 달로 지켜지고 있다. 들뜨고, 신나고, 선물이 오고가는 감동적인 달이다. 모두가 기다리는 달이다. 반대로 5월은 잔인한 달이기도 하다. 자녀가 없다든지, 부모님이 안 계신다든지, 생각나는 스승과 제자가 없는 경우 5월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달이다. 성경에 불임의 고통으로 몸부림쳤던 여인들이 나온다. 그 대표적인 여인이 사라와 한나다. 사라와 한나의 공통점은 불임과 첩, 남편이 제사장이었다는 것이다. 사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남편 아브라함과 같이 우르를 떠나, 자녀 없이 65세에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어찌 보면 소망 없는 우울한 생활이다. 그뿐인가? 사래는 큰맘 먹고 애굽 출신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대를 잇게 했는데, 그 여종 하갈이 사래를 업신여기기까지 했다(창 16; 4). 사라의 남편,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 하나님이 “수많은 나라들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언약을 주셨다. 그리고 아브람(존귀한 아버지)에서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으로, 그의 아내 사래(나의 왕비)는 사라(열국의 어미)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 모든 이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세움을 받은 것이다(창17: 5,15).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바꾸시고 아브라함 나이 99세, 사라의 나이 89세에 아이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손주가 있어야 할 나이에 아이를 주신다는 것은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현실이었다. 이것을 아브라함과 사라는 똑같이 웃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 년 후에 아브라함 100세에, 사라 90세에 이삭을 주셨다. 바울은 이 사건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고 도리어 믿음이 굳건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습니다” (롬 4: 20~22) 라고 기록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믿음으로 기다렸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1절에 사라가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이삭이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추상적인 믿음을 현실적인 사건으로 입증한 여인이 되었다. 삼상 1~2장에 한나가 애절하게 자녀를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얼마나 애절하게 부르짖었으면 엘리의 귀에 술 취한 것처럼 들렸겠는가? 불임에 대한 고통 속에서 브닌나의 멸시는 한 여인이 감당하기에는 상상을 초월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한나는 성전에서 “저의 비참함을 굽어보시고 저를 기억하시고 주의 종을 잊지 않고 제게 아들을 주신다면 제가 그 평생을 여호와께 바치고 결코 그 머리에 칼을 대지 않겠습니다”(삼상 1: 11)라고 기도했다. 실성한 듯 부르짖었다. 한나는 기도의 응답으로 받은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다.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라는 의미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뗄 때까지 집에서 아이를 기르고, 그녀가 서원한대로 사무엘을 데리고 엘리 제사장에게 가서 “이제 제가 여호와께 이 아이를 드립니다. 이 아이의 평생을 여호와께 바칩니다” (삼상 1: 28)라고 말하고 사무엘을 주님께 드렸다. 한나가 사무엘을 주님께 온전히 드린 이 행위는 ‘자녀는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이라는 확실한 결단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신앙고백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고 견고했다. “여호와께서 성도들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고 사악한 사람들을 어둠 속에서 잠잠케 하실 것입니다. 힘으로 당해 낼 사람이 없으니 여호와께 대항하는 사람들은 흩어질 것입니다. 하늘의 천둥과 번개로 그들을 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끝까지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세우신 왕에게는 힘을 주시고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의 이름을 높이실 것입니다”(삼상 2: 9~-10). 필자는 사라와 한나의 메시지를 통해 ‘믿음’과 ‘드림’이라는 주제를 생각해 보았다. 엄마들은 자녀를 현미경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근시안적 시각으로 아이의 행위에 대해 감정을 표출한다. 그러나 자녀는 주님이 주신 축복이다. 현미경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망원경으로 봐야한다. 원시안적으로 자녀의 미래를 보자. 문제는 엄마들의 ‘믿음’정도다. 또한 한나처럼 온전한 ‘드림’으로 하나님께 자녀를 맡기자. 주님은 역사의 주관자 되시며, 더 크고, 넓고, 깊으신 분이라 자녀의 미래를 엄마보다 더 확실하게 아시고, 책임져 주시기 때문이다. 사라와 한나는 성경의 역사에서 경계선을 긋는 상황 속에 있었던 인물이다. 사라의 ‘믿음’과 한나의 ‘드림’을 통해, 이삭과 사무엘은 어두운 시대를 밝힌 선지자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wise mothering’은 엄마들이 주님 안에서 견고한 “믿음”과 “드림”을 갖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다.
작성자 조은실 기자 ces@onnuri.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