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차세대

김정순 목사의 “Good Enough Parents” (1~4주)

 

김정순 목사의 “Good Enough Parents”

1주: 사랑과 자존감     2주: 아이의 자율성과 창의성

3주: 자녀의 강점 관찰 4주: 소유가 아닌 존재 인식

 

 

사랑과 자존감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좋았더라,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엄마아빠가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를 대면할 때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림이 연상된다. 모든 부모는 처음 자녀를 만날 때 가장 사랑스러운 눈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는 마음으로, 가장 큰 선물을 받았을 때의 기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으로 만난다.  볼비의 애착이론에서 애착형성 단계를 보면, 무분별한 반응( 0~3개월), 낯익은 사람에게 초점 맞추기(3~6개월), 능동적 접근 추구(6개월-3세경), 동반자적 행동(3세~아동기 말)으로 발전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0~1세에 받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아이는 무조적인 사랑을 느낄 때 자신이 정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인식하게 된다. 때문에 엄마와 아이의 사랑의 언어, 눈 마주침, 모든 것을 기쁘게 수용하고자 하는 태도, 따뜻한 스킨십으로 나누는 상호작용은 충분히 좋은 엄마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아이들이 받아야만 하는 가장 최소한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불안정감을 만든다. 삭막하고 잔인할 수밖에 없다. 현대인들은 곳곳에서 사랑을 구걸하고 있다. 사랑이 부족해서,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나를 사랑해 달라고” 소리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가정, 학교, 심지어는 교회까지도. 오히려 서로의 마음을 찌른다. 가장 순수하고 순전해야 할 아이들이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고 있다. 자살과 타살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고 있다. 부모인 우리는 이 모든 현상을 ‘공교육 탓’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남의 탓일까? 공교육 탓일까? 사회 탓일까? 물론 전혀 상관없는 것은 아니다. 북유럽에서는 사회의 기반이 ‘협동’이다.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문제가 덜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경쟁’이 사회의 기반이 되었다.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부모들은 무엇이 달라도 달라야한다.  모든 설교는 주님의 사랑으로 통일된다. 주님이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 주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신다는 말씀, 주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신다는 말씀을 매 주일 듣는다. 필자는 ‘하나님의 말씀엔 능력이 없다’고 역설적으로 말해 본다. 신앙의 경륜이 높아져도 절대 변하지 않는 완고한 우리들의 모습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여전히 좋은 밭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여전히 종교생활을 할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부모로서 자녀들 마음에 얼마나 바르게 심겨져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2010년 5월, 한국 방정환 재단과 연세대학교 사회발전 연구소가 <한국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 국제 비교>를 발표했다. 초등 4학년부터 고3까지를 대상으로 한 연구결과 우리 아이들이 느끼는 ‘주관적 행복’지수는 OECD 26개 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한국 아이들의 행복지수는 65.1 점에 그쳤다. 주관적인 행복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항목 중 만족도와 건강, 외로움에서 현저하게 점수가 떨어졌다. 이 조사에서 깜짝 놀랄 것은 학년이 올라 갈수록 행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충분히 좋은 부모’는 왜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수용, 공감을 할까? 그것들이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이기 때문이다. 자존감은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감정’이다. 자존감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가치에 관심을 갖는다. 자기 존중, 자기 존경, 자기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에 남들과 비교해서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갖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아는 정서가 바로 자존감이다. 자녀들의 마음에 부모가 주는 충분한 사랑이 있어야한다. 그것이 힘이 된다. 그 힘이 자존감을 형성한다. 그렇게 형성된 자존감이 우리 아이들을 건강하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만든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어야만 한다.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그 사랑을 보여 주셨다. 스마일링, 허깅, 공감하는 언어로 자녀들에게 마음껏 사랑을 표현하자.

 

아이의 자율성과 창의성

 

부모들은 자녀가 자율적이고,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라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자녀를 통제하는 존재인 것 같다. 지녀와 부모가 싸우는 원인은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망과 부모의 틀 안에 있는 생각이 부딪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창의적 존재’를 원한다. 창의력 콤플렉스란 말이 있다. 창의력 콤플렉스란 어렸을 때는 창의적이었지만 어른이 되면서 창의력이 사라지거나 창의력이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복합적인 심리 상태를 말한다. 세계 모든 나라는 너나 할 것이 없이 창의력 교육에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미국은 ‘국가 혁신 2005’라는 법안을 만들어 창의력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을 마련했고, 유럽은 2009년을 ‘유럽 창의력과 혁신의 해’로 선포했다. 창의력 교육과 훈련을 통한 범국민적 창의력 증진을 결의한 것이다. ‘창조적 계급(creative class)’ 이라는 용어를 만든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플로리다 교수는 “창의적인 계층이 새로운 주류세력으로 부상하게 될 것” 이라고 예측하였다. 창의적인 계층이란 세계 어디에 있든 네트워크를 통해 창의력을 발휘하고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집단을 가리킨다. 리처드 플로리다 교수는 저서 <도시와 창조계급>에서 현재 선진국에서는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25~50%가 창조적 영역에 종사하고 있다고 했다. 미래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창조적 계급에 종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창의성은 자율성과 동전의 양면이다. 자유로운 생각을 가지지 않고서는 창의성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결정성 이론의 창시자인 로체스터 대학교의 사회심리학과 에드워드 데시교수는 “자율성에 대한 욕구는 인간이 타고난 본성이어서 자율성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마치 식욕이 충족되지 않을 때처럼 행복감이 낮아지고 다양한 부적응결과가 나타난다” 라고 말했다. 자율성은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 통제하는 힘이다. 그래서 자율적인 사람은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일에 열성을 바친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 판단에 따라 행동하고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스스로 통제한다.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의 심리 사회발달을 8단계로 설명했는데,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의지를 표현하는 ‘자율성과 주도성’의 발달이 이루어지는 단계가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다고 보았다. 1-3세를 자율성으로, 3-6세를 주도성으로 설명하였다. 문제는 한국의 엄마들이 1~3세와 3~6세 아이들이 자율적이고 주도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도록 둘 수 있는가?이다. 부모들은 이 시기에 있는 아이들은 말 그대로 ‘아기’이기 때문에 부모가 무엇이든지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시기 아이들은 ‘내가’라는 단어를 쓴다. 밥을 흘리면서도 ‘내가’ 한다고 한다.  모든 것에 호기심이 있어 장난감도 모조리 꺼내놓고, 두드리고, 입에 넣는다. 무서움도 없다. 아무데나 가고, 부모는 하찮게 생각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진다. 부모들은 절대 아이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도록 두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통제한다. 자율성은 주위 사람 특히 엄마의 적절한 격려와 분별력 있는 지지를 받을 때 발달하고, 주도성은 주변세계를 탐색할 수 있는 기회와 자유, 창의적인 계획과 실천들을 통해 성장한다.  이것들이 가로 막히면 자율성과 주도성 대신 자기의심과 수치심, 죄책감을 형성한다. 핀란드 엄마들은 2세 아이들이 추운 겨울 밖에서도 실컷 놀 수 있도록 기다려준다. 아이들은 실컷 노는 경험을 한다. 유아의 자율적이고 창의적 놀이는 마음과 몸이 튼튼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위험한 것들을 미리 치우고 아이들의 마음과 생각을 충분히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열어줘야한다. 아이들의 마음을 읽으면서 충분히 좋은 대화를 나누는 습관이 들면 자녀는 부모가 원하는 자율적이고 창의적 인간이 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창의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억압하거나 통제하면 초등 3-4학년부터 수동적인 인간이 되어 창조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유대인 부모들은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무언가를 결정하도록 자기주도 학습과 창의성을 중시한다. 유대인 부모들의 하루 일과 중 빼 놓지 않는 게 잠자리에 든 자녀에게 토라와 탈무드를 읽어 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상상력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아이의 두뇌는 24개월까지 60%가 발달하고,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90%가 발달한다고 한다. 자율적으로 키우는 것은 자녀의 두뇌 발달에도 영향을 끼친다. 자녀가 1~3세, 3~6세라도 부모가 가능한 돕지 말고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려줘라. 한걸음 물러서 아이가 마음껏 놀 수 있도록 하라.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면 아이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은 당연히 자라게 되어 있다.

 

자녀의 강점 관찰

 

에릭 에릭슨은 그의 글 ‘인간의 강점과 세대의 주기’에서 생애 주기이론의 도덕적 차원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그는 생애주기 8단계에 상응하는 덕목의 스케줄을 제안했다. 그것은 소망 (기본적 신뢰 대 기본적인 불신). 의지 (자율성 대 수치감 및 의심), 목적 (주도성 대 죄책감), 실력(근면성 대 열등감), 신실 (정체성 대 정체성 혼란), 사랑(친밀감 대 소외감), 돌봄( 생산성 대 침체성), 지혜(자아 통합 대 절망감 및 혐오감)이다. 이 모든 것들은 기독교적 덕목들과 유사하다. 에릭슨은 이러한 덕목들을 정적인 특성들(static traits)로 보지 않고 만남 속에서 개발되는 본래적인 강점으로 보았다. 그것들은 사람들이나 사회기관들, 특히 각 발달 단계에서 가장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살아나고 생명력을 발휘하게 된다. 어머니는 소망을, 부모는 의지를, 가족은 목표를, 학교는 실력을, 또래집단은 신실을, 배우자와 친구들은 사랑을, 어린이와 청소년과 초기 성인은 돌봄을, 삶의 전통들은 지혜를 불러일으키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프린스턴 신학교 목회신학교수 도널드 캡스는 에릭슨의 8단계에 덕목에 대응하는 악덕을 단계적으로 탐식, 분노, 탐욕, 시기, 교만, 정욕, 무관심, 우울증으로 구분하였다. 부모는 덕목과 악덕 사이에서 혼돈과 갈등과 자신의 틀로 자녀들과 매일매일 씨름하면서 다투면서 살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내 자녀에게 주신 달란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내 자녀가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묻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부모는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신 보화를 찾기 위해 철저한 관찰자여야 한다.  하버드 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 박사는 다중지능이론에 근거하여 “교육이란 누구나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재능을 잘 발현시킬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1983년 ‘정신구조: 다중지능이론’에서 인간은 한 가지 지능만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지능을 타고 난다고 보았다. 그것을 언어지능, 논리수학지능, 공간지능, 신체운동지능, 음악지능, 대인관계지능, 자기이해지능, 자연친화지능 등 8개 유형으로 분류했다. 따라서 IQ 검사만으로는 인간의 모든 영역을 판단하거나 재단할 수 없다. 다양한 재능은 각각의 지능이 조합되면서 발현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은 언어지능과 논리수학지능을 중시한다. 학업과 관련이 깊은 이 지능들이 낮다는 이유로 낙담하게 되면 다른 뛰어난 지능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이 시대는 IQ지수보다 어떤 재능을 강점으로 가지고 태어났는지가 중요한 시대다. 내 자녀가 타고난 강점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어 그것을 돕는 것이 부모의 중요한 역할이 되었다. 천재의 개념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잘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우리 아이들을 모두 천재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모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녀의 강점을 발견하여 격려하고, 응원하고, 인정해 주면, 그 부분에서 일인자가 된다. 모든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니까 아이들이나 부모 모두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각각의 재능과 개성에 따라 아이들의 자율적인 생각을 먼저 인정해 준다면 부모와 자녀사이는 천국이 된다. 기업에서도 이젠 스펙이 아니라 스토리로 접근하고 인성을 인정해서 직원들과 소통과 화합을 우선하는 문화로 바뀌어 가고 있다.  아이들의 강점을 관찰하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이다. 관찰자인 부모에게 특히 요구되는 것이 객관성이다. 부모의 역할은 하나님이 심겨 놓은 보화(재능)들을 늦지 않게 발견하고 잘 계발하도록 도와주는 것뿐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만12세까지 정서적으로는 ‘사랑과 신뢰”를, 영적으로는 ’믿음‘을 심어 놓아야 한다. 유대인은 만 12세가 지나면 성인식을 해서 아이들에게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인식시킨다. 부모가 자녀들을 인격체로 인정하고 수평적인 관계에서 방향성을 상담해주는 코치나 지지자가 될 때 자녀들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한다. 꿈을 향해 자라게 되어 있다.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너무 어리게 본다. 다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녀의 강점을 무시하고, 부모의 생각을 심어 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꿈인 강점을 심어 놓으셨다. 부모는 환경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자녀의 마음을 읽어주면서 하나님의 기업인 자녀를 관찰하고, 미래를 축복하고, 기다려주는 존재이다.

 

소유가 아닌 존재 인식

 

부모자녀관계는 결국 “통제”냐 “소통” 이라는 방법으로 귀결된다. 부모는 자녀를 낳아, 젖을 먹이고, 배설물을 치워주면서 키운다. 자녀는 100% 부모의 손에 키워진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아무 것도 못하고 오직 부모의 손에 자라야한다는 개념이 내재된다. 이것이 자녀에 대한 소유적 관념으로 이어진다.  아이 편에서는 엄마 아빠가 안 보이면 불안해서 울음보를 터뜨릴 수밖에 없다.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안 되는 상황들이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소유적 인식이 강해지게 된다. 이런 역기능 가정은 서양 95%, 동양(특히 한국) 98%라는 통계를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통제냐 소통이냐”는 “소유적 인식이냐 존재적 인식이냐”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부모가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자녀를 키우는 방법이 결정된다. 이것을 확대하면 모든 인간 조직을 소유냐 존재냐로 이해 할 수 있다. 소유는 근본적으로 지배욕을 나타내어 결국 자신의 바벨탑을 쌓는 인간의 죄성을 말한다. 수직적으로 통제와 군림과 명령, 수동, 방어, 공격, 폭력, 정복, 독점, 약탈, 감금이 존재한다. 존재는 소통을 통해 수평적으로 인정과 능동, 포용, 교환, 나눔, 생산, 독립, 사랑, 해방, 공유, 수여, 용서의 결과를 맺는다. 에릭 프롬은 인간은 타고 나면서부터 악한 게 아니고 환경의 압력으로 가치관 타락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기심을 이타심으로 변화시켜야만 희망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소유의 나라에서 존재의 나라로 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 라는 기독교의 교리와는 안 맞지만, 프롬의 통찰력은 아주 예리하다. 많은 부모들을 상담하다 보면 결국 주도권의 싸움이다. 필자는 이것을 ‘샅바 싸움”이라고 정의하였다. 결혼 초에는 헤게모니의 싸움이고, 자녀를 낳은 이후에는 부모라는 권위를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자녀들에게 주입시키면서 더 큰 싸움으로 번진다. 자녀가 사춘기가 되면,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이 독립성에 관한 것이다. 가정이 침해 받기 싫은 자와 침해 하고 싶은 자의 싸움터가 되는 것이다. 자녀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반항이 싸움과 대립으로 연결된다. 물론 이것이 100% 이유는 안 되지만, 문제는 부모의 진정 어린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분명하다. 에릭 프롬은 ‘소유냐 삶이냐’에서, 거의 모든 부모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소유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죽이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모제는 지난 2천년 동안 서양 역사에 부모의 잔인성에 관해 수많은 기록들이 있다고 발표하면서, 잔인성은 육체적인 것에서부터 정신적인 고문, 무관심, 단순한 소유욕, 사디즘까지 걸쳐 있다고 했다. 충격적인 사실이다. 진정으로 사랑을 베푸는 경우는 예외임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필자는 이 글을 보면서 맨붕을 느꼈다. 또한 프롬은 사랑해서 결혼했든, 관습과 전통에 의해 결혼을 했든 대개 부부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며 지금까지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어느 한쪽 또는 양쪽 모두가 깨달을 때까지 사회적 편의, 관습, 상호의 경제적 이해, 자녀의 대한 공동의 관심, 상호의존, 또는 상호간의 증오나 공포 등을 사랑이라고 느끼고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랑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랑하지 않게끔 한 과오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예리한 지적이다. 물론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부는 예외다. 우리 모두는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서로를 소유하고픈 마음으로 서로에게 화가 나 있을 뿐이다. 하물며 자녀에 대한 생각은 더더욱 소유적인 것이다. 자신이 낳았다는 이유로. 정말 가족들과 소통을 원하는가? 진정한 사랑을 하기를 원하고, 받기를 원하는가? 부활절을 맞이하며, 주님의 진정한 사랑의 방법을 다시 한 번 통찰해 본다. 그분은 죽음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고, 우리를 무조적적으로 받아 들이셨다. 이것이 아가페적인 사랑인 것이다. 부모로서 우리는 자녀를 존재인식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소중한 인격체이며 독립체임을 표현해 주어야 한다. 자녀는 부모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결국 부모도, 자녀도 서로 불쌍히 여기고 용서함으로 서로를 보듬어야한다. 가정 안에 주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이 흘러 넘쳐야한다. 한 가지 특별한 비밀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도 있다.

 

 

 

 

작성자  조은실 기자 ces@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