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란노고전총서 5 아우구스티누스:전기 저서들
■ 두란노고전총서 5
아우구스티누스:전기 저서들

공성철 교수(대전신학대 역사신학)
플라톤주의에게는 선과 악의 개념에서 일원론의 개념이 너무 확실합니다. 선만이 존재하며 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시대의 것을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기독교고전총서>에서 ‘초대’는 초기 기독교 교부부터 아우구스티누스(주후 354~430년)까지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들이 모두 죽은 후 2세기를 맞이한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외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종교적 박해와 탄압이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다양한 문화권으로 여러 가지 분파들이 형성되면서 정통성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이때 ‘교부(Church Fathers)’들은 사도들이 지켜온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래서 이 시대를 교부시대라 부르기도 하며, 이들은 수많은 논쟁들로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만들었다.
<기독교고전총서>에서 ‘초대’는 소위 ‘속사도 교부들(post-apostolic fathers)’인 바나바, 로마의 클레멘스부터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까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초기 기독교의 저술을 망라했다.
먼저 이번 강의의 주제인 <아우구스티누스:전기 저서들>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들이 아닌 전기 저서들로 8개의 문서가 들어 있다. <독백>, <교사>, <자유의지론>, <참된 종교>, <믿음의 유용성>, <선의 본성>, <신앙과 신조>, 그리고 <심플리키아누스께 다양한 질문들에 관하여>이다.
-<목회와 신학 2010년 12월호 발췌>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인가
<기독교고전총서>는 1950년대에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됐습니다. 희랍어 또는 라틴어가 원전인 것이 있는데 그것을 영어로 번역한 것을 우리말로 이해하도록 했다는 것 자체가 큰 공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사와 사상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인물로, 신학 또는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의 전기 저서 <신앙과 신조>(476p)는 아직 주교가 되지도 않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신앙과 신조에 대해 해설을 해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고 쓰인 책입니다. 이 책을 보면 중세로 넘어가기 이전부터 그가 고대교회에서 인정을 받았던 인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11월 13일에 알제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세에 키케로가 쓴 <포르테신스>라는 책을 읽고 회심했고, 43세가 되던 해에는 자기의 삶을 정리한 <고백록>을 썼습니다. 그는 427년에 <재고>라는 책을 쓴 후 430년에 사망합니다. <재고>는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책은 자신이 쓴 93개의 책을 돌아보면서 쓴 책입니다.
고대교회 역사연구 특히 사상사에서 가장 큰 테마를 잡으라고 하면 플라톤과 기독교의 경계선입니다. 그때 사상계의 왕좌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까지 흡수한 플라톤이었습니다. 당연히 교회도 플라톤적인 색채를 가진 언어를 사용했었기 때문에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경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가장 큰 테마입니다. 그 연구가 확립되기 전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19세에 회심한 것이 플라톤으로냐 기독교로냐 하는 것의 대답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의 삶은 19세 이후 진리를 추구하는 삶으로 바뀌었는데 마니교로 귀의했다가 382년에 넘어간 곳이 회의주의입니다. 그의 사상은 전통적인 플라톤주의 색채가 강했다는 것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일원론
우리는 플라톤주의를 일반개론서에서 나오는 플라톤의 이원론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주의는 일원론입니다. 최고의 존재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 ‘악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아주 큰 질문이었고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원론 때문이었습니다. 플라톤주의는 ‘악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다가 529년에 끝이 납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답해주겠다고 소리친 사람들이 마니교입니다. 그들은 간단했습니다. 그들은 ‘악은 악한세력에서 오고 선은 선한세력에서 온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원론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일원론을 봐야 합니다. 최고의 존재에게 더 복된 삶으로 다가가겠다는 회심을 하고 난 이후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졌던 가장 큰 질문은 ‘악은 어디서 왔는가’ 였습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그가 왜 마니교로 갔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지론> 1-4(164p)에 보면 에보디우스라고 하는 그의 제자가 ‘우리가 악행을 하는 이유를 말해주세요’라고 묻습니다. 그는 ‘그건 내가 젊은 시절 나에게 큰 고민을 주었던 질문이지. 녹초가 되도록 만들면서 나를 이단의 품으로 몰아갔었지’라고 대답합니다. 절실한데 답이 없습니다. 답이 없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는 일원론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이해가 되어야 왜 악에 관한 질문을 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제는 ‘최고전제는 최고선이다’ 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가 아는 유명한 표현 “악은 선의 결여다”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악은 선이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나온 것은 다 최고의 존재(하나님)에서 나왔기 때문에 다 선한 것입니다. 그는 합리적 영혼의 최고 악은 가장 높고 높은 진리가 그 많은 것을 금하려는 의지라고 말했습니다.(331p) 본질적인 악은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의 책 <독백>(332p)에서 악은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섬기는 미신이 악이라고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과 악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과 악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악은 선의 결여이며 결핍이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의 언어습관이 결여와 결핍이라는 데서 무엇인가 빠진 정도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선이 존재하는 것을 다 가지고 있다면 악은 선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선의 결여’라고 했고, 고로 악은 ‘존재의 결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악은 실제로 우리에게 보입니다. 악은 본질이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을 어떻게 볼 수 있냐면서 그것에 대해 끝까지 파고든 것이 ‘신플라톤주의’입니다. 그들은 없는 존재인 악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있는 것들에게서 존재를 빌려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실제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우리를 힘들게 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 오늘의 나는 존재하고 내일의 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하지 않는 내일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쫓는다는 것입니다. 없는 것이 있는 우리를 기쁘게 또는 두렵게 하는 것을 보면 신플라톤주의가 주장하는 ‘빌려온 존재’라는 것이 이해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만큼 플라톤주의에게는 선과 악의 개념에서 일원론의 개념이 너무 확실합니다. 선만이 존재하며 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시대의 것을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악이라고 하는 것의 원인을 따지고 들어간 것이 <자유의지론>입니다. <자유의지론>에 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자 에보디우스가 계속해서 ‘그것이 자유의지라고 하면 자유의지를 그렇게 하게 한 원인은 어디 있습니까? 왜 선한 것이 더 악한 결과를 내는 저급한 것으로 움직이게 되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자유의지를 그렇게 하는 또다른 원인을 찾습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물질은 절대로 악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고통도 악이 아니라고 말합니다.(275p) 그는 ‘욕심은 호기심이며, 호기심이 악한 의지다’라고 주장합니다. 악한 의지가 모든 악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벌도 악이 아닌 다 선이라는 것입니다. 받는 자에게는 악일지 몰라도 그 고통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우리가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차원에서 그것도 악 자체가 아닌 것입니다. 그럼 대체 원인은 무엇일까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호기심을 학문의 시작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경탄과 호기심은 학문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도 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와가 보암직도 먹음직도 탐스럽기도 한 나무를 보는 장면을 생각하면서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호기심이 왜 악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 정리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이 강의는 지난달 28일(월) 서빙고 두란노홀에서 열린 두란노 기독교고전총서의 ‘5 아우구스티누스:전기 저서들’의 강의 내용 일부를 요약해 정리한 것입니다.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