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빈 손’ 한경직 목사의 삶과 신앙을 만나다
“유산은 없다! 믿음을 지키라! 나라를 사랑하라!”

교회가 돈 문제에 휘말리는 사건들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 교회를 짓겠다며 성도들에게 담보대출을 받게 하고 그 빚을 갚지 않고, 3억 원이 넘는 교회 돈을 사적으로 사용하고, 헌금명목으로 48억 원을 세탁한 사례 등 교회에서 돈과 관련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돈을 우상으로 숭배하지 않고,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아름다운 빈손’ 한경직 목사의 청빈한 삶이 그리워진다. 본지에서는 올 여름 우리가 꼭 만나야 할 신앙의 선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들의 아름다운 삶과 신앙을 보고, 만지고, 배우고, 느끼면서 예수 닮은 신앙인으로 성장하기를 소망해서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한경직 목사다. 한 목사는 선명회(현 월드비전) 초대 이사장, 숭실대학 재건,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총재,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명예회장, 템플턴상 수상, 대한민국 건국공로장 수상 등 귀감이 되는 수많은 일들을 했다. 한국 기독교의 거목, ‘동양의 성자’라고 불린다. 그의 청빈한 삶을 만나기 위해 남한산성 한경직 목사 우거처,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기념관을 다녀왔다.
/ 김영선 기자 k4458@onnuri.org
지팡이, 털모자가 전부였다. 평생을 자신보다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을 돌보고 섬겼다. 그는 1973년 70세에 영락교회 담임목사직을 은퇴하고 남한산성 자락에서 여생을 보냈다. 남한산성 한경직 목사 우거처에 가면 그의 청빈한 삶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남한산성 우거처(寓居處)

남한산성을 10여 분 정도 오르면 초록색 담장과 함께 ‘ 한경직 목사 우거처’ 안내판이 보인다. 그 초록색 담장 안에 있는 한경직 목사 우거처는 작고 아담한 단층 건물이다.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머물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만큼 작고 초라하다. 우거처(寓居處)는 말 그대로 ‘ 남의 집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산다’ 는 뜻이다.
한경직 목사 우거처는 원래 영락여자신학대학 기숙사였다. 은퇴한 한 목사는 “은퇴목사가 교회 근처에 머무는 것은 좋지 않다”면서 사택을 떠나고 싶어 했다. 그러자 교회 리더십들이 서울 근교에 아파트를 마련해 주려고 했다. 그 제안을 받은 한 목사는 “성도들의 소중한 헌금을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없다. 나는 영락여자신학대학 기숙사면 된다”고 일축하고 1974년 가로등도 없던 남한산성 자락에서 살기 시작했다. 단순히 공기 좋고, 산이 좋아 남한산성 자락에서 생활한 것이 아니다. 성도들의 헌금을 자신의 여생보다 귀중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한 목사가 우거처에 남긴 것이라고는 휠체어와 지팡이, 서적 몇 권, 옷 몇 벌이 전부다.
우거처의 달력은 그가 소천한 2000년 4월19일에 멈춰있었다. 우거처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실 겸 주방이 보인다. 주방 왼편에는 응접실이 있다. 한 목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그 작은 응접실에서 맞이했다. 그 응접실에는 한 목사가 소장했던 성경책 한 권이 펼쳐져 있다. 하용조 목사도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 들러 한경직 목사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응접실 안쪽에는 작은 침실이 있다. 침실 안쪽에 낡은 장롱이 있는데 장롱 문짝에 빛 바랜 누런 종이가 붙어있다. 태극기가 그려져 있고, 애국가 1절부터 4절까지 가사가 쓰여 있다. 한 목사는 침대에 눕거나 일어날 때마다, 옷장을 열고 닫을 때마다 수시로 태극기를 보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나라사랑도 으뜸이었다. 낡고 빛 바랜 가구들이 어떤 이들의 눈에는 낡고 쓸모 없는 가재도구일지 모르지만 그 어떤 보석보다 빛나는 믿음의 유산이다.
옷장과 옷에 얽힌 이야기

단출하기 짝이 없는 옷장과 옷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한 목사가 삶으로 나눔을 실천한 이야기들이다. 외투 몇 벌 넣으면 가득 차는 옷장을 채우기가 그렇게 힘들었다고 한다. 누군가 옷장에 옷을 넣어두면 한 목사는 “난 입을 것이 많아요”라며 그 옷을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줬다. 양복이고, 외투고 할 것 없이 선물했다. 한 번은 성도가 따뜻한 겨울 외투를 선물했는데 교회 인근에서 동냥 하던 장님이 그 외투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한 목사는 진정으로 자신보다 남의 사정을 더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변변한 양복 한 벌 없는 목회자들에게 자신의 양복을 선물하고, 본인은 두루마기를 걸치고 설교를 했다고 한다.
한 목사가 템플턴상을 수상하기 위해 독일로 떠나는 날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독일로 떠나는 날 옷을 입으러 침실에 들어간 한 목사가 한참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던 것.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일행들이 기다리다 못해 침실에 가봤더니 한 목사가 와이셔츠만 입고 옷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남들에게 옷을 다 나눠줘서 정작 본인이 입을 외투가 없었던 것이다. 급하게 외투를 장만하고 나서야 공항으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템플턴상은 미국의 사업가 템플턴이 창설했다. 종교 활동의 증진·향상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상으로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린다. 매년 종교분야에서 인류를 위해 크게 이바지한 인물들에게 준다. 첫 번째 템플턴상 수상자는 ‘ 테레사 수녀’ 다. 한경직 목사는 사회복지 확충, 기독교 성장과 ‘ 사랑의 쌀나눔 운동’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그때 받은 상금 100만 달러를 모두 북한 선교를 위해 헌금했다.
우거처에는 두 개의 기도처가 있다. 우거처 왼쪽 좁은 숲길을 70m쯤 오르면 평평한 땅이 나오는데 바위 3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이곳이 ‘ 제1기도처’ 이다. 한 목사의 건강이 악화돼 매일 ‘ 제1기도처’ 까지 가는 것이 힘들어지자 우거처 오른편 조그만 동산에서 기도를 했는데 이곳이 ‘ 제2기도처’ 이다. 한 목사는 두 기도처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날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기념관’

2000년 초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진 한 목사는 영락교회 ‘ 한경직 목사 기념관’ 1층에 있는 사택 겸 게스트하우스에서 생활했다. 같은 해 4월 19일 98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품에 안긴다.
영락교회 ‘ 한경직 목사 기념관’ 에는 그가 임종하기 전 4개월 동안 생활했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침대, 옷장, 식기구, 옷가지, 임종 당시 누워있던 병상까지 볼 수 있었다. 기념관 안에도 응접실이 있는데 이 응접실 자리가 한 목사가 영락교회 담임목회를 하던 당시 머물렀던 사택 자리라고 한다. 남한산성 우거처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기념관 2층에는 한경직 목사의 집무실과 그의 일대기를 전시한 기념전시관이 있다. 한 목사의 출생부터 소천까지 일생과 삶, 그리고 신앙을 보고,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기념관 3층과 4층에는 도서관이 있는데 한경직 목사의 주옥 같은 설교와 관련 서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물려줄 물질유산은 없다. 믿음을 지키라. 나라를 사랑하라.”
이것이 한경직 목사의 유언이다. 그가 남긴 유산은 휠체어, 지팡이, 털모자, 옷가지가 전부였지만 그가 남긴 믿음, 나라와 민족사랑,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섬기는 마음은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다. ‘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고, 나는 청지기일 뿐’ 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자신보다 더 품고 사랑했다. 한경직 목사의 사회복지 정신에 따라 영락교회는 24개의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찾아가는 길
남한산성 ‘한경직 목사 우거처’는 산성역(8호선) 2번 출구로 나와 9번이나 52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남한산성에 도착한 후에 북문(전승문)방향 이정표를 따라 10~20분가량 산을 오르면 도착한다. 평소에는 방문할 수 없지만, 영락수련원에 문의하면 방문 할 수 있다.
문의: 영락수련원 031-743-6537,
우거처 관리처 031-747-0493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기념관‘은 영락교회 정문에서 바라보면 우측 두 번째 건물이다. 1, 2층은 한경직 목사 기념관, 3, 4층은 한경직 목사 도서관이다. 화요일부터 주일까지 개관한다(월 휴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토요일에는 오후12시까지 관람 가능하다. 한경직 목사 도서관은 월요일과 공휴일에 휴관한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토요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2시, 주일은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방된다.
문의: 한경직 목사 기념사업회 02-2280-0292
작성자 이소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