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일사각오 주기철 목사의 신앙을 만나다

올 여름 꼭 만나야 할 신앙의 선배들

1. 아름다운 빈손 한경직 목사
2. 일사각오(一死覺悟) 주기철 목사
3. 작은예수 손양원 목사

 

경남 창원 주기철 목사 기념관, 문창교회, 마산 십자가 바위

 

동성애, 진화론, 교회의 타락, 교회에 대한 편견 등 영적공격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영적 공격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어디서든 직면하게 된다. 그만큼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녹록치 않을 때가 있다. 신앙이 흔들리거나 크리스천으로서 사명이 무엇인지 몰라 혼란스러울 때 떠올리면 좋은 신앙의 선배가 있다. 바로 ‘일사각오 주기철 목사’다. 그는 일제의 온갖 탄압과 핍박 속에서도 올곧게 신앙을 지켰다. 자기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크리스천으로서의 정체성을 바로 보여 줬다. 그 사람 주기철 목사를 만나러 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는 ‘주기철 목사 기념관’과 ‘마산 십자가 바위’에 다녀왔다.

/ 김영선 기자 k4458@onnuri.org

 

초량교회 목회 당시를 복원했다.

▲ 주기철 목사의 초량교회 목회 당시 모습 복원

 

“너는 고난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마귀가 너의 가운데 몇몇을 가옥에 집어넣을 텐데 너희가 10일 동안 핍박 받을 것이다. 너는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줄 것이라”(계 2:10).

오정모 사모가 남편 주기철 목사의 장례식에서 전한 말씀이다. 주기철 목사가 한평생 살아낸 말씀이다. 주기철 목사는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면에서 나고 자랐다. 창원에 가면 주기철 목사가 다니던 웅천교회와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있다. 주기철 목사의 두 번째 목회지 문창교회와 매일같이 올라 기도한 무학산 십자가 바위도 가볼 수 있다.

 

주기철 목사가 목회자로 거듭나기까지

 

1910년 성탄절, 소년 주기철이 웅천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 하나님을 만났다. 주기철 목사가 기독교에 입문한 동시에 일제와의 영적 싸움이 시작됐다. 지금도 웅천교회가 있지만 몇 차례 이전을 했기 때문에 실제로 주기철 목사가 예배를 드리던 예배당은 볼 수 없다. 대신 집사로 교회를 섬기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는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지만 고질적인 안과질환으로 고향으로 다시 내려오게 됐다. 고향으로 내려 온 그는 총각 집사로 웅천교회를 섬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목회에 대한 소명을 느끼지 못했다. 한 번은 술에 취한 상태로 강대상에 올라 설교를 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찾지 못해 영적으로 방황하던 시기였다. 1920년 주기철 목사가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사건이 발생한다. 3.1운동 참여자로 1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나온 주기철 목사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기도하던 시기 당대 이름난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목회자의 소명을 갖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사모

 

주기철 목사 기념관은 웅천교회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주기철 목사의 신앙을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기자가 찾아간 날도 주기철 목사의 신앙을 본받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100여 명의 크리스천들이 기념관에 방문했다. 주기철 목사의 설교, 일생, 신앙, 시대적 배경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주기철 목사가 옥고를 당할 때 입었던 죄수복도 복원되어 있다. 그 죄수복에는 눈물 나는 사연이 있다.

옥고를 치르던 주기철 목사는 오정모 사모가 면회를 올 때마다 “제발 옷에 솜을 넣지 말아 달라”고 처절하게 부탁했다. 겨울이면 피와 고름이 스며든 솜이 얼어붙어 살을 저몄기 때문이다. 고문을 받을 때 솜이 없으면 피와 물이 금세 말라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정모 사모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평양의 겨울은 영하 25도를 육박할 정도로 춥다. 솜이 없으면 살이 얼어서 순식간에 썩는다. 그래서 오정모 사모는 주기철 목사의 처절한 부탁에도 매번 솜을 가득 넣은 옷을 가져다 줬다. 눈물을 쏟아가며 솜을 넣은 죄수복을 바느질할 때마다 주기철 목사를 지켜달라고 피를 토하며 기도했을 것이다. 오정모 사모도 남편 못지 않게 고난을 당했다. 열 차례나 감금되어 갖은 수모를 당했다. 그 와중에도 목자를 잃은 산정현교회 성도들 집을 홀로 심방했다. 오정모 사모의 삶의 목적은 주기철 목사의 승리였다고 한다. 주기철 목사의 승리는 순교를 의미했다.

“당신도 순교의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 기념관에 걸린 거울 아래에 쓰여 있는 글귀다. 그 거울 앞에 선 사람들은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한다.

 

“절대 신앙에 타협은 없다”

 

주기철 목사는 1925년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는데 그가 신학교를 졸업한 1925년 10월 서울 남산에 신사참배의 총 본산인 ‘ 조선신궁’이 세워졌다. 주기철 목사는 첫 번째 목회지인 초량교회를 거쳐 1931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섬겼는데 이 기간은 순교를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주기철 목사는 문창교회에서 부인 안갑수를 먼저 주님의 품으로 떠나보내고, 두 번째 아내 오정모 사모를 만났다. 1933년 안갑수 사모를 떠나보낸 주기철 목사는 2년 동안 혼자 5남1녀를 돌보고, 목회를 이어갔다. 1935년 오정모 사모와 재혼했다. 당시 정서상 목회자가 성도와 재혼하면 그 목회자는 교회를 떠나야 했다. 1936년 7월 주기철 목사는 문창교회를 떠났다. 주기철 목사가 문창교회에서 오정모 사모를 만나고, 문창교회를 떠난 것은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던 것 같다. 주기철 목사는 문창교회를 떠나 순교한 평양으로 갔기 때문이다.

주기철 목사의 흔적을 만나보는 마지막 장소는 무학산 십자가 바위다. 주기철 목사는 매주 설교준비를 마치면 셋째 영해와 함께 무학산 십자가 바위에 올라 기도했다. 주기철 목사의 일생을 다룬 영화 ‘ 일사각오’ 에도 주기철 목사가 십자가 바위에 올라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지역 성도들은 십자가 바위까지 가는 길을 ‘ 기도의 길’ 이라고 부른다.

학봉 인근에서 어렵지 않게 십자가 바위를 찾을 수 있다. 십자가 바위에 올라서면 마치 깎아지는 절벽 위에 있는 것 같다. “신앙에 절대 타협은 없다”는 주기철 목사와 닮았다.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이 수욕을 내가 피하여 이다음 주님이 ‘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내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내가 준 그 고난의 잔을 어찌하고 왔느냐?’ 고 물으시면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져야 할 이 십자가, 주님이 주신 이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주님이 이다음에 ‘ 너는 내가 준 십자가는 어찌하고 왔느냐’ 고 물으신다면 내가 어떻게 주님의 얼굴을 뵐 수 있겠습니까?

오직 나에게는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입니다.”

주기철 목사가 마지막으로 체포될 당시 그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찾아온 산정현교회 성도들에게 남긴 마지막 설교다. 주기철 목사는 오직 복음만이 진리라는 것을 삶으로 살아내고 순교했다. 비로소 영적싸움에서 승리했다.

 

 

찾아가는 길

 

주기철 목사 기념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장한다. 주일은 휴관. 사전에 연락하면 해설과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웅천교회는 주기철 목사 기념관에서 차로 5분 거리다.

  • 웅천교회(창원시 진해구 창원시 웅천동로 49) 055-546-5891
  • 주기철 목사 기념관(창원시 진해구 웅천동로 174) 055-545-0330

 

무학산 십자가 바위는 무학산 학봉 인근에 있다. 십자가 바위를 보는 코스는 한 시간 남짓 소요된다. ‘서원곡입구’에 주차하고, 올라온 길로 500m 가량 다시 내려가면 ‘최지원길 입구’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등산하면 된다. 곳곳에 이정표가 있어 쉽게 학봉까지 갈 수 있다. 학봉을 넘어가면 긴 나무다리를 지나게 된다. 그 나무다리를 지나 3분 남짓 직진하면 양 갈래 길이 나오는데 좌측으로 가면 바위산이 나온다. 그곳에 십자가 바위가 있다. 가장 바깥쪽 바위다. 흰색 페인트로 십자가 바위라고 표시되어 있다.

  • 문창교회(창원시 마산합포구 노산동7길 21) 055-245-4801
  • 무학산 서원곡유원지 입구(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교방동) 055-225-3691

 

 

작성자  이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