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인물

[당신이 온누리입니다]발달장애인 이상일 형제의 삶 그리고 도전

당신이 온누리입니다
 
“저에게 온누리교회는 천국입니다!”
발달장애인 이상일 형제의 삶 그리고 도전

board image<이상일 형제가 북서울장애인보호작업시설에서 봉제작업을 하고 있다.>

board image<북서울장애인보호작업시설 직원들과 함께(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정말 귀한 만남이 있다. 그 만남 뒤에는 늘 하나님의 은혜와 아름다운 람들이 있다. 발달장애인 이상일 형제(50세, 누리사랑부, S브릿지공동체)와의 만남이 그랬다.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감동이 샘솟고,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이상일 형제의 삶은 온누리교회를 만나기 전과 후로 극명하게 갈린다. 비참하고 서럽고 괴롭던 삶이 온누리교회를 만나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온누리교회 덕분에 안정적인 일터와 편안한 보금자리가 생겼고, 좋은 사람들과 새로운 꿈과 비전도 생겼다. 
“저에게 온누리교회는 천국”이라고 고백하는 이상일 형제를 북서울장애인보호작업시설에서 만났다. 원활한 인터뷰를 위해 북서울장애인보호작업시설 직원의 도움을 받았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이상일 형제는 북서울장애인보호작업시설(온누리복지재단이 서울시로부터 수탁하여 운영하는 장애인직업재활시설)에서 봉제 기능사로 24년째 근무하고 있다. 그곳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이상일 형제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는 사랑을 참 많이 받고 있었다. 
“북서울장애인보호작업시설에 이상일 형제가 없으면 안 될 정도로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입니다. 손재주가 정말 좋아서 어렵고 중요한 봉제 작업을 도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또 얼마나 성실한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지각 한 번 한 적이 없습니다. 책임감이 넘쳐서 작업 분량이 남으면 늦게까지라도 맡은 일을 꼭 마무리합니다.” 
 
온누리교회는 
보호자, 안식처, 멘토
 
이상일 형제가 온누리교회를 만난 것은 1999년이다.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이상일 형제의 삶은 가난과 무지, 복지 사각지대라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그만큼 크고 높은 고난이 이어졌다. 이상일 형제는 부모의 이혼으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아버지 혼자 장애인 아들도 건사하고, 생계도 책임져야 했다. 가난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이상일 형제는 아버지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어서 어린 나이에도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발달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한정적이었다.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새벽에 신문 배달도 했다. 그래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리지 않고 다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었다.   
“봉제공장, 새벽 신문 배달 등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친구 꾐에 빠져 가출도 했습니다. 친구가 좋은 곳에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지방의 중국집이었습니다.”  
이상일 형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친구가 좋은 곳에 가자고 해서 집을 나왔다. 친구를 따라간 곳은 충남 온양에 있는 한 중국집이었다. 그곳에서 3~4년 동안 무일푼 노동을 착취당했다. 절대 경험하지 말아야 할 일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돌아왔는데 삶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다시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또래 친구들은 학교를 다녔지만, 이상일 형제는 그럴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부담을 덜어줘야 했기 때문이다. 
1999년, 이상일 형제의 인생이 180도 바뀐 계기가 있었다. 바로 온누리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이다.  
“그때 다니던 교회 권사님이 온누리교회에 장애인 부서가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분 덕분에 제가 온누리교회에 오게 됐습니다.”
당시 이상일 형제가 살던 동네에서 잠깐 다녔던 교회 권사님이 온누리교회를 알려주면서 그곳에서 신앙생활 할 것을 권유했다. 이상일 형제를 걱정한 그 권사가 그에게 꼭 필요한 교회를 주선해 준 것이다. 이상일 형제에게 온누리교회와의 만남은 천재일우(千載一遇,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그 자체였다. 
온누리교회를 다니면서 북서울장애인보호작업시설이라는 든든하고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당시 누리사랑부에서 만난 박우형 장로님(구족화가)이 북서울장애인보호작업시설을 소개해주셨습니다. 사실 다른 공장에서는 일을 빨리빨리 하라고 혼을 많이 내는데, 여기서는 장애인들이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사회복지사님들도 정말 좋고,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도 좋은 분들입니다.”
믿음의 조력자들도 많이 만났다. 이상일 형제의 아버지가 갑자기 소천했을 때 그 진가를 발휘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당황했습니다. 교회와 회사에 아버지의 부고를 말씀드렸더니 장례 절차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외로웠는데 그 외로움을 교회에서 종일 지내면서 달랬습니다. 교회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그 힘든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온누리복지재단의 도움으로 안전하고 포근한 보금자리도 얻었다. 영세한 빌라에서 영구임대아파트로 이사했다.  
“전에는 옥탑방에서 살았는데 온누리복지재단의 도움으로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안전하고 포근한 보금자리가 생겨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온누리교회와 온누리복지재단이 따뜻하게 채워줬다. 온누리교회가 이상일 형제의 보호자, 안식처, 멘토가 되어서 보살폈다.  
“온누리교회에서 정말 좋은 시설과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저의 부모님처럼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줬습니다. 따뜻한 사람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온누리교회에 와서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습니다.”
 
50세 늦깎이 대학생의 꿈
 
온누리교회와 온누리복지재단의 따뜻한 보살핌 덕분에 이상일 형제의 생활이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열매도 있었다. 이상일 형제가 지난 2005년 장애인기능대회에서 금상(홈패션 부문)을 수상했다. 또 남을 돕는 일에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상일 형제는 벌써 10년 가까이  월급 일부를 모아 어르신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 
또 그동안 잊고 있었고, 엄두도 내지 못하던 학업에 대한 도전을 시작했다. 
“시설의 도움으로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봤고, 야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대학교진학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북서울장애인보호작업시설 원장님이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날 이후 제 머릿속에는 대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사회복지사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저도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상일 형제가 올해 장애인특별전형으로 대학교에 합격했다. 요즘 이상일 형제에게는 곧 대학생이 된다는 기쁨이 가득하다. 온누리복지재단에서는 50세 늦깎이 대학생이 된 이상일 형제에게 온소미 장학금(온누리복지재단 장학사업)을 수여했다.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저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사회복지사가 되어서 장애인들을 도우며 살고 싶습니다. 저에게 온누리교회는 천국입니다.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일터를 주시고,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저를 온누리교회로 인도해준 하나님께 늘 감사합니다.”
 

 

작성자  정현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