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6월은 호국보훈의 달, 순교하는 교회, 애국하는 교회
6월은 호국보훈의 달
순교하는 교회, 애국하는 교회
야월교회, 염산교회,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야월교회, 염산교회,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6월, 호국보훈의 달이다. 본지에서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나라를 깊이 사랑했던 선조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들의 넋을 기리는 아주 특별한 여행 코스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장소는 전라남도다. 전라남도에는 순교유적지가 참 많다. 대표적인 곳이 영광군 야월교회와 염산교회, 신안군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이다. 우리나라에서 여기만큼 애국하는 교회, 순교하는 교회를 잘 보여주는 곳이 드물다. 그곳에 가면 순국선열들이 피로 보여준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다.
/ 권찬송 기자 kcs123@onnuri.org
/ 권찬송 기자 kcs123@onnuri.org
전라남도 영광에 있는 야월교회에는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순교했던 선조들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야월교회는 전교인 65명이 죽음으로 믿음을 지킨 교회다. 전 세계 순교역사에서 전교인이 순교자가 된 사례된 전무하다.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들이 주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인민군 점령지역에는 간첩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는데 그들이 주도적으로 기독교인과 그 가족들을 핍박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잔인하게 처형하거나 고문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전라남도가 그 피해를 가장 크게 입었다. 야월교회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 의해 피살된 사람이 무려 5만9천964명이나 된다. 그중에서 전남지역에서 피살된 사람이 4만3천511명으로 피해자의 72.6%를 차지했다. 전라남도 중에서는 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심각했다. 전남 지역 희생자 절반에 가까운 2만1천225명이 피해를 입었다. 야월교회는 성도를 한꺼번에 모두 잃었다.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들이 주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인민군 점령지역에는 간첩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는데 그들이 주도적으로 기독교인과 그 가족들을 핍박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잔인하게 처형하거나 고문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전라남도가 그 피해를 가장 크게 입었다. 야월교회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 의해 피살된 사람이 무려 5만9천964명이나 된다. 그중에서 전남지역에서 피살된 사람이 4만3천511명으로 피해자의 72.6%를 차지했다. 전라남도 중에서는 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심각했다. 전남 지역 희생자 절반에 가까운 2만1천225명이 피해를 입었다. 야월교회는 성도를 한꺼번에 모두 잃었다.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 말자!
1950년 6월 22일 공산군 1개 부대가 전남 영광군 야월리에 침투했다. 전라남도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이 영광으로 내려와 공산군을 소탕했는데 살아남은 잔당들이 영광군 옥실리와 야월리 뒷산으로 숨어들었다. 야월교회 성도 정문성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부상당한 공산군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부상당한 그 공산군을 붙잡아 총살했는데 영광군에 남아있던 공산군들이 동료가 총살됐다는 사실을 알고 분개했다. 그때부터 공산군들이 야월교회 성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다 사살했다. 살아남은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을 부인하라고 강요도 했다. 하지만 야월교회 성도들은 끝까지 목숨 걸고 믿음을 지켰다. 결국 전교인 65명이 순교하고 말았다. 야월교회 성도들의 그 숭고한 정신을 ‘야월교회 기독교인 순교기념관’에 가면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 야월교회 기독교인 순교기념관은 전시실과 추모관으로 구분되어 있다. 전시실에는 구한말 사용했던 성경, 찬송가, 기독교 고서 등 한국 교회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야월교회 성도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던 인민군들의 옷과 무기도 진열되어 있다. 그곳에 전시된 영상자료와 전시물들을 보면 당시 야월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학살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추모관에는 사랑과 평화 그리고 화합을 상징하는 2층 높이의 조형물이 있다. 이 조형물의 이름은 ‘맞잡은 손’이다.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 말자!’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지금 야월교회에는 희생자 가족들과 가해자의 후손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손양원 목사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아들로 삼았듯이 야월교회 성도들도 원수를 내 몸처럼 사랑하고 있다.
추모관에는 사랑과 평화 그리고 화합을 상징하는 2층 높이의 조형물이 있다. 이 조형물의 이름은 ‘맞잡은 손’이다.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 말자!’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지금 야월교회에는 희생자 가족들과 가해자의 후손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손양원 목사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아들로 삼았듯이 야월교회 성도들도 원수를 내 몸처럼 사랑하고 있다.
김방호 목사와 염산교회
전남지역 기독교 순교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교회가 또 있다. 바로 전남 영광군 염산교회다. 염산교회는 한국 기독교 순교사적지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만큼 기독교의 순교 정신과 역사를 잘 보여주는 교회이다.
염산교회도 순교의 피가 흐르는 교회다. 한국전쟁 당시 염산교회 성도 77명이 공산군에 의해 무참하게 사살됐다. 한국전쟁 당시 염산교회에는 독립군 출신 김방호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영광군 일대가 공산군의 손에 넘어가고, 교회마저 공산군의 사무실로 이용된 뒤에도 김 방호 목사는 영광군에 남아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면서 믿음을 지켰다. 성도들의 피난 권유도 마다하고 교회와 성도를 끝까지 지키고 섬겼다.
그해 9월, 서울을 수복한 국군과 UN군이 영광군으로 들어오자 주민들이 큰 환영회를 준비했다. 염산교회 청년부가 그 일을 주도했다. 그런데 미처 후퇴하지 못했던 공산군들이 그 사실을 알고 염산교회 성도들에게 잔인하게 보복했다. 예배당을 불태웠고, 김방호 목사를 포함한 염산교회 성도 77명을 학살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몽둥이와 죽창으로 때려 죽였다. 성도들의 목에 큰 돌을 매달아 수장시키기도 했다. 염산교회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했고, 자신들을 죽이는 공산군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했다.
염산교회에는 당시 공산군들이 사용했던 죽창, 순교자들의 사진, 순교 현장을 묘사한 그림 등 약 200여 점의 자료 및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당시 끔찍했던 학살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염산교회 앞에는 순교자 77인의 합장묘와 비석이 있다. 그 비석에는 요한복음 12장 23절 말씀이 적혀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3).
염산교회도 순교의 피가 흐르는 교회다. 한국전쟁 당시 염산교회 성도 77명이 공산군에 의해 무참하게 사살됐다. 한국전쟁 당시 염산교회에는 독립군 출신 김방호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영광군 일대가 공산군의 손에 넘어가고, 교회마저 공산군의 사무실로 이용된 뒤에도 김 방호 목사는 영광군에 남아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면서 믿음을 지켰다. 성도들의 피난 권유도 마다하고 교회와 성도를 끝까지 지키고 섬겼다.
그해 9월, 서울을 수복한 국군과 UN군이 영광군으로 들어오자 주민들이 큰 환영회를 준비했다. 염산교회 청년부가 그 일을 주도했다. 그런데 미처 후퇴하지 못했던 공산군들이 그 사실을 알고 염산교회 성도들에게 잔인하게 보복했다. 예배당을 불태웠고, 김방호 목사를 포함한 염산교회 성도 77명을 학살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몽둥이와 죽창으로 때려 죽였다. 성도들의 목에 큰 돌을 매달아 수장시키기도 했다. 염산교회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했고, 자신들을 죽이는 공산군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했다.
염산교회에는 당시 공산군들이 사용했던 죽창, 순교자들의 사진, 순교 현장을 묘사한 그림 등 약 200여 점의 자료 및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당시 끔찍했던 학살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염산교회 앞에는 순교자 77인의 합장묘와 비석이 있다. 그 비석에는 요한복음 12장 23절 말씀이 적혀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3).
“주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에 있는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도 전라남도 지역에서 꼭 가봐야 할 순교유적지다. 문준경 전도사의 고귀하고 헌신적인 신앙과 삶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문준경 전도사는 1935년부터 1950년까지 신안군 일대의 도서지역을 돌아다니며 전도했다. 교회를 100여 개나 개척했다. 문준경 전도사의 사역 중심지였던 증도에도 교회를 11개나 세웠다. 지금도 증도 주민 90% 이상이 크리스천이다. 전국 복음화율 1위를 자랑하는 곳이다. 이처럼 증도가 복음 위에 견고하게 설 수 있었던 것은 문준경 전도사의 끝없는 헌신과 사랑 덕분이다.
문준경 전도사의 사역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전도하던 중에 사람들에게 머리채를 잡히기도 했고, 똥물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준경 전도사는 1년에 고무신 아홉 켤레 이상이 떨어 질만큼 열심히 걸어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던 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공산군은 문준경 전도사의 사역지까지 들이닥쳤다. 크리스천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공산군들은 문준경 전도사와 크리스천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문준경 전도사는 ‘주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북한군의 총탄에 순교했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에는 문준경 전도사의 출생부터 교육, 전도 일대기, 순교 현장 등을 보여주는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준경 전도사가 사용했던 절구, 고무신, 성경책 등 유품도 볼 수 있다. 문준경 전도사가 공산군들의 칼과 창에 찔려 순교하는 장면을 묘사한 동판도 있다.
문준경 전도사는 1935년부터 1950년까지 신안군 일대의 도서지역을 돌아다니며 전도했다. 교회를 100여 개나 개척했다. 문준경 전도사의 사역 중심지였던 증도에도 교회를 11개나 세웠다. 지금도 증도 주민 90% 이상이 크리스천이다. 전국 복음화율 1위를 자랑하는 곳이다. 이처럼 증도가 복음 위에 견고하게 설 수 있었던 것은 문준경 전도사의 끝없는 헌신과 사랑 덕분이다.
문준경 전도사의 사역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전도하던 중에 사람들에게 머리채를 잡히기도 했고, 똥물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준경 전도사는 1년에 고무신 아홉 켤레 이상이 떨어 질만큼 열심히 걸어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던 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공산군은 문준경 전도사의 사역지까지 들이닥쳤다. 크리스천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공산군들은 문준경 전도사와 크리스천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문준경 전도사는 ‘주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북한군의 총탄에 순교했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에는 문준경 전도사의 출생부터 교육, 전도 일대기, 순교 현장 등을 보여주는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준경 전도사가 사용했던 절구, 고무신, 성경책 등 유품도 볼 수 있다. 문준경 전도사가 공산군들의 칼과 창에 찔려 순교하는 장면을 묘사한 동판도 있다.
작성자 권찬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