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에서 만나는 조선의 선교역사 - 군산항
항구에서 만나는 조선의 선교역사
1. 군산항
항구는 복음의 통로였다!
선교역사와 근현대사가 살아 숨 쉬는 군산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다. 그 지리적 특성이 복음이 전파되는 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의 이름난 항구에는 저마다 선교 역사가 서려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항구를 다녀보는 것만으로도 또 하나의 근사한 선교여행이 가능하다. 본지에서는 깊어가는 가을 꼭 한 번 해보면 좋을 여행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름하야 ‘항구에서 만나는 조선의 선교역사’이다. 푸른 눈의 선교사들이 바다 건너 조선에 오기까지 험난한 여정과 그 속에 숨어 있는 눈물겨운 사연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몸소 보여준 민족사랑, 나라사랑도 만나볼 수 있다. 그 첫 번째 여행지는 전라북도 군산항이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항구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옛 항구는 신문물이 전해지는 통로이기도 했고, 약탈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서해의 대표적인 항구 군산항 역시 바람 잘 날 없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군산항은 조선의 3대 시장으로 꼽힐 정도로 물자수송이나 상인들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곳이다. 지금은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여전히 서해물류의 일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그 중요한 역할만큼이나 군산항에 서린 역사가 참 아프기도 하고, 뜻 깊기도 하다.
군사항의 역사는 이렇다. 군산항을 찾은 두 부류의 이방인이 있었다. 하나는 빼앗고 지배하려는 일본인들이었다. 군산항은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지금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군산 근대화거리에 가면 근대 역사박물관을 비롯해서 근대 미술관, 근대 건축관, 진포해양테마공원 등을 둘러 볼 수 있다. 골목골목을 걸어 다니면서 일제강점기를 보냈던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일본식 가옥 히로쓰, 경제수탈을 목적으로 일제가 세운 은행들의 모습으로 세워진 근대 미술관과 건축관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선교 역사뿐만 아니라 근현대사를 이해하기에 좋은 여행지는 역시 군산이 으뜸이다.
군산항을 찾은 또 한 부류의 이방인은 빼앗고 지배하기 위해 온 일본인들과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복음 전하고,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누기 위해 들어온 이방인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선교사라 부른다. 군산항으로 입항한 선교사들은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을 들고 왔다. 그 선교사들의 흔적을 군산 근대화거리에 가면 아주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군산 근대화거리 골목골목을 누비다보면 작은 언덕이 나온다. 수덕산공원이다. 그윽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이 작은 공원에 가면 전킨(W.M.Junkin, 한국명 전위렴)선교사와 드루(W.M.Junkin, 한국명 유대모) 선교사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는 기념비를 보고 있으면 이 낯선 땅에서 오로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외로이 고군분투했을 두 선교사들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차오른다.
드루와 전킨 선교사가
써내려 간 군산의 선교역사
수덕산공원에 세워진 전킨과 드루 선교사 선교활동 기념비
군산항을 가장 먼저 찾은 하나님의 사람은 의료선교사 드루였다. 1894년 3월 30일 드루 선교사가 군산항으로 들어왔고, 그 이듬해인 1895년 3월 전킨 선교사가 왔다. 전킨 선교사가 군산에 오면서부터 본격적인 군산선교 역사가 시작됐다. 두 선교사는 수덕산에 두 개의 가옥을 마련했다. 한 곳에는 예배처소, 또 다른 한 곳에는 진료소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이어나갔다. 찾아오는 환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면서 밤낮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활발해질 무렵 군산항을 비롯한 군산 장미동 일대를 일본인들이 장악했다. 군산항을 이용해서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군산항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의 90%가 일본과의 거래였다고 하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때의 참상을 떠올려 볼 수 있다. 1910년 당시 군산 주민의 절반 정도인 약 8천여 명의 일본인들이 군산에 들어왔다. 총과 칼을 든 일본인 앞에 군산 주민들은 대부분의 농토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전킨과 드루 선교사도 일본의 만행을 피해가지 못했다. 선교활동 지역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전킨과 드루 선교사는 궁멀(지금의 구암동)로 선교활동 지역을 옮기고 ‘군산선교스테이션’을 구축했다. 그리고 선교의 지경을 더욱 넓혀 나갔다. 가장 먼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부터 세웠다. 남학생들을 위한 영명학교(현재 군산제일중‧고등학교)와 여학생들을 위한 멜볼딘 여학교(현재 군산영광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뿐만 아니라 의료선교를 확장해서 더 많은 병원을 세웠다. 그 덕분에 훨씬 많은 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다. 전킨과 드루 선교사가 세운 군산선교스테이션은 훗날 한강이남 독립운동의 근원지가 되기도 한다.
군산선교스테이션과 군산3.5만세운동

옛 영명학교의 모습을 복원해 만든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군산선교스테이션의 흔적이 지금도 구암동에 남아있다. 구암교회와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구암교회로 올라가는 언덕에 ‘군산3.1운동역사공원’이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다. 바로 이곳이 군산에서 벌어진 3.1운동의 근원지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언덕을 조금 오르다보면 벽면에 군산의 선교역사와 독립운동의 역사가 새겨져있다. 그 역사들을 천천히 읽으면서 걷다보면 언덕 꼭대기에서 태극기 모양의 바람개비들이 휘날리고 있는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푸른 잔디밭에 심겨진 수십 개의 바람개비들을 따라 걸으면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앞에 도착한다. 옛날 군산선교스테이션 자리에 세워진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은 영명학교의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바로 그곳에서 군산 선교역사의 흐름과 군산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역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3.1운동을 며칠 앞둔 1919년 2월 28일 영명학교 졸업생 김병수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 200장을 들고 영명학교를 찾아왔다. 독립선언서를 받아 든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 박연세, 송현호, 김수영이 독립선언서 3,500장을 인쇄하면서 군산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장날이었던 3월 6일 ‘설애장터’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했는데 거사 일을 이틀 앞두고 일제에 발각되고 만다. 영명학교 교사들이 검거되면서 독립운동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뻔했지만 영명학교 학생들과 주민들이 만세운동 계획을 하루 앞당겨 3월 5일에 실시했다. 바로 이 만세운동이 호남최초의 만세시위로 기록된 ‘군산3.5만세운동’이다. 이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1층에는 군산 선교 역사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당시 선교사들이 타고 다니던 자전거, 군산선교스테이션의 지형도, 선교사 가족들의 사진, 영명학교와 멜볼딘 여학교의 옛 모습 등 다양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김병수로부터 시작됐던 군산 독립운동의 역사도 실감나게 살펴볼 수 있다. 김병수의 독백이 흘러나오는 공간을 시작으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체험도 할 수 있다. 체험관에 비치된 자전거를 타고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영명학교 학생들이 되어서 그날의 벅찬 감동을 느껴볼 수 있다.
‘1902. 06. 11 잊지 않겠습니다’
군산 선교여행에서 빼놓지 않고 들려야 할 곳이 한 군데 더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아펜젤러순교기념교회’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군산 앞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서 목포로 배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군산 앞바다 인근에서 그가 타고 있던 배와 일본선박이 충돌했다. 당시 조난당한 배에 타고 있던 미국 광산업자의 증언에 따르면 아펜젤러 선교사는 탈출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등 선실로 내려갔다고 한다. 선실에 있던 한국인 조수와 이화학당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한국인을 사랑했던 아펜젤러 선교사의 흔적을 아펜젤러순교기념교회에서 느껴볼 수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생애와 선교 활동, 그의 가족들의 모습까지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기념관 옆에 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아펜젤러 선교사가 타고 가던 배의 모습을 본 따 만든 모형이 있다. 그 배의 앞머리에 ‘1902. 06. 11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 문구를 읽으면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들어왔던 수많은 선교사들의 이름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이름들까지도 다시 되뇌며 감사함을 잊지 않으려고 한 분 한 분 마음에 새겨 넣었다.
작성자 홍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