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주일강단-7가지 치명적인 죄(1) -교만

7가지 치명적인 죄(1) -교만
누가복음 18장 9~14절
이재훈 목사
 
 
7가지 치명적인 죄를 영어로 ‘The seven deadly sins’라고 하는데 주후 4세기부터 교회 역사에서 죄의 실상을 성도들에게 깨닫게 하기 위하여 분류되어온 죄론입니다. ‘7대 죄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앞으로 7주 동안 7가지 치명적인 죄에 대해서 하나씩 살펴보면서 내 안에 있는 죄의 실상을 파헤치고, 참된 회개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교만은 첫 번째 죄요, 악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교만을 깨달아야만 남은 죄들의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교만은 죄 가운데 가장 뿌리 깊은 죄이기에 가장 끈질깁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우리 안에 들어와 늙어 죽을 때까지 깊이 뿌리내려 있는 죄입니다. 어떤 죄는 어린아이 때는 잘 짓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권력의 죄입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다른 사람을 움직여서 자신의 이익을 행사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어린 아이일 때는 누군가를 속이는 죄를 범하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교만은 아주 어릴 때에도 있고, 나이 많을 때에도 존재합니다. 사회적 위치가 높아도 있고, 사회적 위치가 낮아도 있습니다. 영적인 성숙이 있어도 교만이 있고,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했다고 하는 영적 지도자들의 교만으로 인해서 교회가 분열되고 깨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만은 우리가 어느 단계, 어떤 수준, 어떤 연령에 이르렀던지 영적 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원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VS 자기 자신 안에 
 
 
C.S.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교만에 대해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악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부까지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덜 나쁜 다른 악들은 사탄이 우리의 동물적 본성을 이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동물적 본성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옥에서 곧장 나옵니다. 교만은 순전히 영적인 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악들에 비해 훨씬 더 교묘하고 치명적입니다.” 
다른 모든 악들은 우리의 동물적 본성을 이용하는데 교만은 그것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순전히 영적인 악이기 때문에 육신의 모든 소유욕에 대한 금욕이 이뤄져도 교만은 존재합니다. 참으로 어렵고, 위험하고, 치명적인 죄입니다. 교만이 가져오는 치명적인 문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올바르게 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웹스터 사전에서는 교만을 ‘과도한 자존심(an inordinate self-esteem)’이라고 정의했고, 옥스포드 사전에서는 비합리적인 우월성의 자만, 자신의 인품을 자만하는 생각(an unreasonable conceit of superioty-an overweening opinion of one's own qualities)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그리스 신전 문 위에 ‘너 자신을 알라’라고 크게 써 놓았지만 인간은 결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강요>를 쓴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제1권 1장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를 아는 지식이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라는 교훈으로 시작합니다. 그중 일부분을 보겠습니다.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묵상하고 그 묵상 후에 낮아져서 자신을 면밀하게 살필 때까지는 진실한 자신에 대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대면해야만 자신에 대한 진실한 지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짐승의 특징은 자신이 짐승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 이하의 수준이 될수록 자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짐승에 가까울수록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가 되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악마처럼 변해가고 있어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뿌리가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한 이후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그것은 공간적, 물리적 위치를 물어보신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실존의 위치를 물어보신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 안에 있지 않고 자신 안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하나님 안에 있느냐? 아니면 자신 안에 있느냐?”를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범죄 한 이후 인간은 오직 자신 안에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자신 안에서 갈 곳을 찾고, 자신 안에서 만족을 찾고,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지 않으면 자신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안에 있지 않으면 참된 자기만족이 없으며, 하나님 안에 있지 않으면 자기에 대한 온전한 인식에 이르지 못합니다. 
기도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는지, 자기 자신 안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혼의 창입니다. 기도할 줄 모른다는 것은 자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만 여전히 자신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두 사람의 기도를 비유를 들어 말씀하심으로 우리 영혼의
 
 
상태를 진단해 주십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차이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몇몇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9절).
성전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두 사람은 큰 차이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당시 대표적인 엘리트였고, 세리는 당시 사회의 대표적인 죄인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 성전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뚜렷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의 기도를 통하여 두 사람의 자기 인식을 평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이 저 바리새파 사람보다 오히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14절).
예수님의 판단은 바리새인의 기도는 받지 않으시고, 세리의 기도는 받으시며, 의롭다 인정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은 자신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교만했다는 것입니다. 세리는 자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졌고, 겸손했다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높인 바리새인의 교만을 보십시오.  
 
 
교만한 바리새인의 기도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들, 곧 남의 것을 빼앗는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간음하는 사람과 같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저는 1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냅니다’”(11~12절).
이 짧은 기도에 반복되는 단어가 ‘나’입니다. 하나님은 형식상 한번 부르고 전부 자기 자신에 관한 내용입니다. NASB번역에서는 이것을 “자기 자신을 행하여 기도했다”(Praying this to himself)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자기에 대해서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에는 창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창문이 없고, 자기 자신의 방에 갇혀 자기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교만한 영혼의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교만한 영혼은 자신 안에 갇혀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의 기도에는 감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자기만족입니다. 자기만족이 교만의 치명적인 증상입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의롭고, 좋은 평판을 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행하는 것을 자기만족의 이유로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둘째, 그의 기도에는 자기 죄에 대한 회개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기신뢰의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신뢰 또한 교만의 치명적인 증상입니다. 도덕의 한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도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의를 향해야 합니다. 도덕의 한계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나는 온전히 의롭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구제하고 돕는 의를 행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은 우리의 의는 하나님 앞에 더러운 옷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셋째, 그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지 않습니다. 자기의존입니다. 자기의존은 교만의 치명적인 증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헌신된 사람인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지를 드러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넷째, 그의 기도에는 자기가 감당해야 할 의무보다 많이 행하고 있다는 자만심과 위선이 들어있습니다. 자기자랑입니다. 자기자랑 또한 교만의 치명적인 증상입니다.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니까 통상적인 금식 규례보다 훨씬 많이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대개 땅 소산의 10분의 1을 내던 당시 사회에서 바리새인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종교적인 업적과 헌신의 대차대조표를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 7장 8절에 ‘에브라임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전병을 우리식으로 말하면 부침개입니다. 뒤집지 않았다는 것은 한쪽은 완전히 타들어 가고 있는데 한쪽은 익지 않은 것입니다. 한쪽은 설익은 모습이 바로 교만입니다. 
다섯 번째, 그의 기도에 나타난 교만의 치명적인 증상은 자기를 인식하고 발견하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를 사용한 것입니다. 비교의 기준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입니다. 늘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며 자신이 얼마나 우월한 지를 평가하는 것이 교만의 치명적인 증상입니다. 바리새인은 세리와 비교하며 기도했습니다. 자신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했습니다. 자신을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제시했습니다. 분명 바리새인은 세리보다 나은 삶을 살았습니다. 훌륭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을 평가할 때 자신보다 도덕적으로 아래에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아래에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니까 자신만큼 선한 사람이 없고, 자신만큼 의롭고 깨끗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위를 올려다봐야만 볼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엔트로포스, ‘인류’라는 단어의 기원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인간됨은 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위를 바라보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은 언제나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자신을 높입니다. 아래를 봐야 자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늘 어떤 이유든지 자신보다 낮은 사람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의사에게 가서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님, 저는 참 건강합니다. 제 심장과 폐는 매우 튼튼하고, 검사해 보면 제 몸이 얼마나 건강한지 잘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밖에 대기하고 있는 많은 환자들과 저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면 의사가 뭐라고 할까요? “저 바쁘니까 빨리 나가주세요”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인식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식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의로운 세리의 기도
 
 
이제 예수님께 의롭다고 평가를 받은 세리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는 가슴을 치며 말했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3절). 
그의 행동에서 그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멀찍이 서서’, ‘하늘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영혼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행동은 하늘을 쳐다보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당당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의 행동은 하늘을 바라봤지만 실상은 하늘이 아니라 아래를 봤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머리는 하늘을 향해 들지 못했지만 영혼은 하늘을 향해 들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사람의 행동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멀지 않게 서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모든 심령에 가까이 다가가시기 때문이다.” 
가슴을 치는 것,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것의 원문을 보면 “제가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위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평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의롭다고 하신 것은 이 사람의 행동과 삶이 아니라 세리의 자기 인식 자세를 인정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리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리처럼 살지 않으면서 세리의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리처럼 살지 않으면서 점점 바리새인처럼 자기를 인식합니다. 혹 이른 아침에 나오면서 “지금도 잠자리에 누워있는 저 사람들과 저는 같지 않습니다”라고 생각하셨다면 차라리 푹 자고 나오시는 것이 더 낫습니다. 새벽에 열심히 기도하러 나오면서 “나는 새벽에 기도하지 않는 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라는 기도가 나온다면 차라리 푹 주무시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세리와 같은 기도를 하면서 또 다른 바리새인이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회개한 세리가 이런 기도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큰 죄인인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고백하는데, 저는 저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만족에 빠져있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저 사람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지만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불의를 저지르고, 저 사람은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지만 저는 10%만 정직하게 번 돈이고, 십일조는 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잘못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까? 저는 저렇게 깨끗한 척하면서 교만한 사람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이것은 회개한 세리의 또 다른 바리새인적인 교만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마귀적인 재주가 있어서 죄의식을 가진 것을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야 할 이유로 내세운다.”        
인간의 영혼은 이렇게 복잡합니다. 회개하면서도 자신을 의롭다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교만이 얼마나 끈질기고, 무섭고, 치명적인 죄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죄의식을 갖는 것 자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저 회개할 뿐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위를 바라보며 언제나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내 안에 있는 교만을 끊임없이 십자가로 가져가 끊어내지 않으면 믿음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교만해지고, 열심히 봉사하면서 교만해지고, 도덕적으로 청결하게 살면서 교만해지고, 죄를 짓고 회개하면서도 교만해집니다. 온통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일에만 혈안이 됩니다. 그래서 교만을 악의 뿌리요, 7가지 치명적인 죄에서 첫 번째로 꼽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을 끊임없이 끊어내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우리 안에 무서운 교만이 있습니다. 
스스로 벗을 수 없는 교만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죄악조차 모르고, 
회개조차 하지 못하는 저희들을 용서하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어둠을 고백하고, 더러움을 토해내며, 
날마다 엎드려 자백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권찬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