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주일강단- 7가지 치명적인 죄(2) 시기 

7가지 치명적인 죄(2) 시기 
고전 3:1~8
이재훈 목사 
 
 
누군가를 시기하는 영혼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마데우스’입니다. 이 영화는 모차르트를 다루지만 실제 주인공은 모차르트를 시기하는 궁정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라는 사람입니다. 살리에리는 훌륭한 음악가요, 왕에게 인정받는 궁정악장이지만, 자신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모차르트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시기심에 사로잡힙니다. 결국 하나님을 부인하고, 삶이 무너지게 됩니다. 자살까지 시도합니다. 그를 도와주려는 신부와 대화하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시기가 한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리는 파괴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도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의 비극은 가인이 아벨을 시기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를 받았을 때 생긴 시기가 분노를 만들었고, 그 분노가 살인을 이루었습니다. 사울왕의 몰락도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은 이 노랫소리를 듣고 몹시 불쾌해 화가 치밀었습니다. 속으로 ‘다윗에게는 수만 명이라더니 내게는 고작 수천 명뿐이라는구나. 그가 더 가질 것이 이제 이 나라밖에 더 있겠는가?’하며 그때부터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기 시작했습니다”(삼상 18:8~9)
솔로몬에게 두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자신의 아이라며 한 아기를 데려온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 아이를 둘로 나눠 가지라고 했습니다. 한 여인은 “그러자”고 했고, 다른 여인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고 했던 여인이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다른 여인을 시기해서 남의 아기를 자신의 아기라고 거짓말 한 여인은 그 아기가 죽더라도 괜찮다고 한 것입니다. 아기를 죽이는 것으로 자신의 시기심을 만족시키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빌라도를 압박하고 거짓으로 선동했던 유대 지도자들의 동기도 시기였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이 예수를 시기해 자기에게 넘겨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마 27:18).  
시기는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 안에도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교회의 분열, 다툼, 문제 속에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대표적인 문제가 분열이었는데, 분열의 이면에 시기심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슬퍼하는 ‘시기’
“여러분은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시기와 다툼이 있으니 여러분이 육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며 사람의 악한 본성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파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아볼로파다’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까?(3~4절).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파를 형성했던 이유는 시기심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의 이기심, 욕망, 교만 등이 시기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모습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겉으로는 대의명분이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한 지도자의 시기심으로 혼란스럽게 되고, 분열하게 되고, 다툼이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시기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 안에서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시기심을 잘 숨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노하고, 다툼과 분열이 일어나고, 마음에 있지 말아야 할 미움이 일어난다면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의 시기심도 무섭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의 시기심은 너무 교묘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 시기심이 파고 들어오면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하지만 시기심으로 인해 교회가 무너지게 됩니다.  
토머스 아퀴나스라는 신학자는 시기를 “시기란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슬퍼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이것을 정반대로 정의해도 맞는 말입니다. “시기란 다른 사람의 슬픔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누군가 기뻐할 일이 생겼을 때 내가 동일하게 기뻐할 수 없다면 그만큼 마음속에 시기심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내가 슬퍼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시기심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시기심이 끔찍한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전에 자기 자신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죄들은 순간적, 일시적이나마 즐거움이 있습니다. 교만도 즐겁습니다. 자기도취도 즐겁습니다. 쾌락, 탐욕도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기는 전혀 즐거움이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파괴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시기는 노래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죄의 이면에는 시기심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젊은 신부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평등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신부는 일반적인 말을 했지만 살리에리는 그 말에 도전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평등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재능과 능력을 발전시켜왔는데, 제멋대로 사는 모차르트가 천부적인 재능으로 자신보다 인정을 받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시기심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시기심의 연료가 무엇입니까? 평등에 대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 영화의 아주 중요한 부분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평등한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등을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모든 것은 나도 동일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정의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데 이것을 평등이라고 생각하면 시기심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평등에 대한 왜곡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을 나도 누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평등에 대한 심각한 왜곡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누리는 좋은 것은 나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이 겪는 고난과 좋지 않은 것은 누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등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모든 좋은 것은 나도 동일하게 누려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시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살리에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평등에 대한 왜곡된 생각 때문에 시기심이 불일 듯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수준의 성취나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리에리에게 “너는 왜 모차르트 같은 사람이 되지 못했느냐?”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사회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차이, 도저히 동등할 수 없는 영역에서까지 평등해야 한다고 믿게 하는 것이 사회주의입니다. 사회주의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시기심에 깊이 호소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잠재력과 가능성을 발전하도록 동기부여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가는 이, 나와 다른 이, 어쩌면 더 잘하는 이를 끌어 내리는 것이 평등이라고 오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는 것을 시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고, 모욕처럼 느껴지고, 다른 사람의 성공이 나의 불행처럼 여겨지고, 점점 우울해 질 때 시기에 빠지는 것입니다. 
시기는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요, 모독이요, 불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다르게 창조하셨고, 다른 계획을 갖고 계시고, 각자의 분량대로, 달란트대로, 다른 능력으로 우리를 통해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시기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 반항, 분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울의 문제였고, 살리에리의 문제였습니다. 시기심에 사로잡히면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현실을 왜곡하게 됩니다. 때로는 인격적인 장애까지 생깁니다.  
 
 
시기에 빠지지 않는 방법
회개, 창조의식, 축복  
 
 
어떻게 해야 무서운 시기심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첫째, 철저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작은 시기심 하나부터 죄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작은 시기심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좋은 일이 생긴 분이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십시오. 축하할 수 없다면 그만큼 내 안에 시기심이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한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지 않고 함께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시기심을 회개한 마음입니다. 
둘째, 비교의식을 버리고 창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창조의식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우리의 거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만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대하십니다. 우리를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갖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것을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으시고, 나라면 할 수 있었던 것, 주어진 능력으로 할 수 있었던 그 무엇으로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이 다른 이를 축복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바울파는 아볼로파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아볼로파는 게바파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가장 교만한 파는 그리스도파일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직통 계시를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목회자가 필요 없고, 일대일 양육자, 순장도 필요 없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가장 성경적인 것 같지만 가장 무서운 분파입니다. 
사울이 만일 다윗을 축복했다면, 다윗을 격려하고, 다윗의 승리를 함께 기뻐했다면, 그는 추악한 모습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지도자가 된 것은 사울과 정반대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백성들을 이끌고 있을 때 엘닷과 메닷이라는 사람이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모세만이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었고, 모세에게만 신적인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것을 시기해서 모세에게 금지하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여호수아를 야단칩니다. 
“그러자 모세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해 시기하는 것이냐? 나는 여호와의 모든 백성들이 예언자가 되고 여호와께서 그 영을 그들에게 부어 주시기를 바란다’”(민 11:29).
모세의 멋진 믿음입니다. 시기심은 사탄의 마음으로부터 우리에게 전염된 것입니다. 우리가 시기심에 문을 열 때  마음에 사탄의 쓰레기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시기는 분노를 만들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만들고, 우리를 망가뜨립니다. 즐거움이 하나도 없는 죄 시기가 우리를 완전히 파괴시킵니다. 
우리가 시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승리할 수 있다면 자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조금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우리 삶이 더 만족스럽게 될 것입니다. 더 많이 가지지 않아도, 더 많은 것을 성취하지 않아도, 시기만 우리 마음속에서 제거된다면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시기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살아계신 하나님, 
시기를 숨기고 살았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그 어떤 시기라 할지라도 단호히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 안에서 물리치는 저희들 되게 축복해 주옵소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권찬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