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온누리 순교열전

 

2000년 새해 첫날, 온누리교회는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1993년 학원 선교와 제과제빵 사업을 통해 복음을 전하려고 중국으로 파송된 박승철 선교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박모세 선교사는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해 온누리교회 첫 순교자가 되었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에 가족은 물론 온누리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순교의 아픔을 온 몸으로 느꼈다.2004년 2월 21일, 온누리교회는 또 다른 순교자로 인해 슬픔에 젖었다. 김사무엘 선교사때문이었다. 김사무엘 선교사는 2003년 9월 18일 전쟁의 상처로 아파하던 이라크 땅에 들어가 그 해 10월 10일에 ‘이라크 한인 연합교회’를 세웠다. 김사무엘 선교사는 이 교회에 머물며 한인들과 현지인들을 돌보던 중 허리에 통증을 느껴 12월 한국에 돌아와 검사를 받던 중 혈액암 진단을 받고 곧바로 미국 죠지타운병원에 입원해 투병했다. 수술 후에도 김사무엘 선교사는 바그다드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환상으로 보고 늘 바그다드를 염려했지만 생전 소망대로 빌립보서 1장 20~21절 말씀으로 천국환송예배를 드려야했다. 김사무엘 선교사의 뜨거운 선교에 대한 열정은 온누리교회와 일본, 이라크, 중국 등 전 세계 선교사들에게 큰 도전과 감동을 주었다.

 

1993년부터 1995년 6월까지 중국선교사로 언어 훈련과 교회 지도자 훈련을 해온 김사무엘 목사는 1995년 7월에 온누리교회 선교 목사로 부임해 온누리교회의 사역을 총괄했다. 1983년 C&MA교단으로부터 일본선교사로 파송을 받았고, 그후 東京에서 시브야敎會를 개척했고, 이후로도 吉川(Yoshikawa)복음교회(1986년), 市川(Ichikawa)복음교회(1988년), 센겐다이교회(1989년), 成田(Narita)복음교회(1990년), 八千代(Yachiyo)복음교회(1990년) 岐阜(Gifu)얼라이언스교회(1991년) 등을 개척했다. 온누리교회에 와서도 교회 개척은 계속되어 온누리교회가 일본에 교회를 세우는데 큰 힘이 되었다.
국내 선교지에서도 첫 순교자가 생겼다. 2004년 8월, 고 이태화 형제가 경남 하동 화개제일교회에서 아웃리치 팀과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교통사고로 온누리 선교열전을 이어갔다. 고 이태화 형제는 선교사로 파송된 적은 없지만 순교자 반열에 올랐다. 2005년 6월에는 중국에서 사역하던 권소망 선교사가 교통사고로 소천했다. 권 선교사가 치료 받던 군인병원 복도에서는 하루 세 번 예배가 이어졌고, 그 찬양 소리를 듣고 찾아온 중국 현지인들이 복음을 듣고 영접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같은 달, 창조과학회 1호 선교사이자 온누리교회에서 파송된 전광호 선교사의 소천 소식도 전해졌다. 인도네시아 국립대학에서 학원 선교를 하다 지병 치료차 들어왔는데 생을 마감한 것이다.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중 인도네시아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창조과학회 요청을 듣고 육신의 안녕을 과감히 뒤로 했던 그였다.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열매를 거둘 수 없다는 진리처럼 그들의 죽음은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이 되고 있다.

28_1 박모세선교사천국환송013 김사무엘 선교사

1993년 4월 파송받아 2000년 1월 57세의 나이로 그가 품었던 중국에서 눈을 감은 박승철(박모세) 선교사

마지막 순간까지 바그다드를 떠올리며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던 김사무엘 선교사.

 

심재학 형제

2004년 6월 8일 몽골 도르노트 도립병원 2층에는 고 심재학 형제를 기념하는 도서관이 마련됐다.

 

당신의 뒤 따르겠습니다

김사무엘 선교사님,
그분은 예수님처럼 아름답고 감동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능력도 뛰어나고 성격도 강직하셨습니다. 늦은 나이에 예수님을 만나 성령 세례를 받자 바로 주변을 정리한 후 41세 때 신학교에 입학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학교 졸업 후 목회를 시작하지만 그 분은 졸업하던 날, 하나님께서 주신 ‘7개 일본교회 개척’이란 비전에 순종하여 곧바로 선교지로 뛰어드셨습니다.

신학교 만학도, 선교의 젊은 열정 품고

이제 와서 깨달은 것이지만, ‘ACTS 29’는 그분이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일본으로 달려간 그분은 시부야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7개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제가 시부야교회에 초청을 받아 갔을 때, 일본 현지인 300여 명이 모여 경배와 찬양을 했습니다. 한국인을 포함하면 모두 5백명 정도 모였습니다. 이 정도면 일본에서는 굉장히 큰 목회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김 선교사님은 저에게 하나님께서 일본 사역을 접고 북한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럼, 우리 교회로 오십시오. 선교사님께서 저희를 대신해 북한, 중국으로 가십시오.”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본을 떠나 온누리교회 선교팀을 이끌고 북한으로, 중국으로 다니며 선교 지경을 넓혀 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명 좇아 이라크로

이라크 전쟁이 끝난 직후, 선교사님께서 저를 찾아오셨을 때를 기억합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라크로 갈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보내 주십시오.”
그분은 청년들과 팀이 되어 이라크로 떠나셨고 곧 NGO를 구성해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이라크는 빈발하는 테러로 한국대사관에서 교민들에게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고 지시를 내린 상태였습니다.
이라크로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허리에 통증을 느끼고 귀국하셨습니다. 정밀 검사 결과 혈액암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워싱턴 소재 조지타운대학병원 2차 정밀 검사에서도 결과가 같아 곧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그분은 골수 이식 수술을 받은 후 두 달 만에 하나님의 나라로 가신 것입니다.

ACTS 29 비전 꽃피운 밑거름

저는 고인을 추억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9년 동안 김사무엘 선교사님은 안식년에도 아랑곳 않고 생명을 걸고 계속 일하셨습니다. 그분은 복음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순전하셨습니다. 주님의 일이라면 무조건 뛰어드신 그분은 하나님의 사람, 순종하는 사람이셨습니다.
그분께서 소천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곁을 떠나셔서 저와 교회는 큰 슬픔을 느낍니다. 선교 사역도 많은 차질을 빚게 돼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영광중에 받으신 줄 믿습니다.
그분의 순교는 ACTS 29 비전을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온누리 3만 성도는 그분을 소중히 가슴에 품고 2천/1만 비전을 꽃피우기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 그분을 쫓아 금면류관을 바라며 죽기까지 충성할 것입니다.
하용조 목사
온누리신문 477호(2004.2.29.)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