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주기철 목사를 그리며

주기철 목사 생애 재조명 한 영화 ‘일사각오’

 

“일사각오 길만 있을 뿐입니다”

 

최종

▲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 영화.

 

 

“아녀자에게는 정절의 의(義), 신하에게는 충절의 의(義), 믿는 자에게는 신념의 의(義)가 있다.”
1919년, 일제는 돈도, 지식도, 배경도 없던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당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다 차디찬 형무소에서 죽어 나갔다.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지로가 “기독교는 조선 통치상의 암적인 존재”라고 했을 정도로 당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심했다. 주기철 목사도 그 피해자다. 주 목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4월 21일 밤 9시 옥중에서 순교했다. 핍박이 얼마나 심했던지 당시 많은 교인들이 신앙과 민족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 주 목사는 끝까지 신앙과 민족을 지켰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슴을 치고,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영화 ‘일사각오’는 주기철 목사의 생애를 재조명했다. 다큐와 드라마 형식이 교차해가면서  일제의 만행에 맞서 신앙과 민족을 지켜낸 주기철 목사의 생애를 그려냈다. 가슴을 치고,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는 영화다. 신앙을 돌아보고, 회개하게 해주는 그런 영화다.
영화 ‘일사각오’는 일제 강점기 시절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반대한 주기철 목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당시 주기철 목사의 설교를 듣던 청년과 그의 아들, 故주광조 장로, 당시 여대생이었던 홍은혜 권사(100세), 산정현교회 시절 17살 청년이었던 오재길 장로(96세) 등을 인터뷰했다. 주연배우 이지형 집사는 온누리교회 뮤지컬찬양팀 출신이다. 지난해 KBS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일사각오’에 배우 이지형 집사가 드라마를 추가로 촬영해 재구성한 영화다.
지난해 12월 25일 공영방송 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일사각오’는 기독교인들은 물론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일본인들의 잔혹함과 주기철 목사의 점철된 신앙이 있는 그대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일사각오’는 종교인물을 다룬 프로그램인데도 이례적으로 시청율이 높았다. 수도권 8.6%, 서울 9.7%였다.

 

한 인간으로서의 주기철

 

영화 일사각오는 주기철 목사의 막내아들 주광조의 눈으로 본 ‘인간 주기철’을 그린 영화다. 아버지 주기철은 13살에 나라를 잃고, 하나님을 만났다. 그의 아들 주광조는 13살에 아버지를 잃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역사에서는 주기철 목사를 독립운동가이자 순교자로 기록하고 있지만, 아들 주광조는 아버지 주기철을 ‘그저 마음이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주기철 목사는 경상남도 진해 웅천마을에서 태어났다. 1910년 한일 강제합병으로 나라를 잃자 그해 12월 23일 처음으로 웅천교회를 찾아갔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 젖은 주기철은  교회에서 소망을 발견했다.
그는 진해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는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오산학교는 민족 지도자 남강 이승훈 선생과 조만식 선생이 세운 학교다. 그곳에서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애국심, 신앙심, 민족정신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당시 고당 조만식 선생은 “일본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있다. 정신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기철 목사는 고향으로 돌아가 애국 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에 참가하면서 민족이 놓여 있는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풍전등화 같은 현실에 갈등하던 그는 1922년 평양신학교를 입학하고, 1925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주기철 목사의 첫 부임지는 부산 초량교회였다. 1926년 1월, 초량교회 3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그는 자신의 봉급을 70원에서 60원으로 깎고, 아내 안갑수 사모가 결혼할 때 가져온 땅 6천 여 평을 조금씩 팔아 구제하는데 썼다. 안갑수 사모는 얼마 뒤 종기 수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아들 4형제는 오정모 사모가 길렀다.

 

“목사님이 순교하셔야 한국교회가 삽니다”

 

주기철 목사는 초량교회에 이어 마산 문창교회로 사역지를 옮겼다. 평양 산정현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당시 그는 엘리트 목회자였다. 그런 그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기 위해 평양 산정현교회로 사역지를 옮겼다. 산정현교회에는 민족주의자 조민식, 김동원, 유계준, 오윤선 장로가 재직하고 있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는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국가 의식이라고 했다. 이에 반항하던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는 치안유지법에도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신사참배 거부는 단순한 통치를 넘어 독립운동으로 간주됐다. 탄압을 못 이겨 많은 종교인들이 하나둘씩 신사참배를 수용했다. 남은 것은 평양 산정현교회 뿐이었다. 주기철 목사가 수감될 때마다 그의 아내 오정모 사모는 금식기도를 하며 일제 탄압과 조선의 독립, 그리고 남편을 위해 기도했다.
광복을 1년 앞둔 어느 날. 일본 경찰이 아내와 가족들이 평양경찰서 지하실에 갇힌 그를 만나게 해줬다. 주기철 목사는 지하실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처럼 매달려 그네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오정모 사모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와 아이들은 내가 책임질 테니 목사님은 순교하시오. 목사님이 승리하셔야, 순교하셔야 한국교회가 삽니다”

 

참된 신앙과 아름다운 민족애

 

주기철 목사가 처참한 고문 현장에서 “나에게는 일사각오의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하며 의식을 잃었다. 1944년 4월 21일 48세 나이로 순교했다. 그의 신앙과 신념을 잘 보여주는 글귀가 있다. 1939년 주기철 목사는 ‘겸손하기 위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신이시여 당신은 사람들이 다 외면하는 걸인과 나환자의 벗이 되셨나이다. 존귀하신 당신이 그토록 낮아지셨으니 비천한 저는 어디까지 낮아져야 하겠습니까. 당신이 제자의 발을 씻기셨으니, 나는 나환자의 발을 핥게 하여주옵소서. 모든 사람의 발 앞에서 짓밟히는 먼지와 티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기철 목사가 떠난 지 올해로 70년이 됐다. 경상남도 창원 진해구 남문동 841번지에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주기철 목사가 몸담았던 교회, 유족들이 보관했던 유품 1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그곳을 찾아가보자. 그의 참된 신앙과 아름다운 민족애를 다시 한번 만나보자.
/ 김미림 기자 mirim@onnuri.org

작성자  이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