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으로 열매 맺는 '온누리 선교 영성'
떠남으로 열매 맺는 ‘온누리 선교 영성’
스리랑카로 떠난 이숙인 권사, 성주로 떠난 토야 자매
“가서, 제자 삼아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 “7년 된 성도는 떠나라”
고 하용조 목사는 마태복음 28장 19~20절 말씀을 바탕으로 선교 비전을 제시하면서 늘 ‘떠날 것’을 강조했다. 그 말씀을 따라 온누리교회 성도들은 국내외 아웃리치부터 선교사가 되기까지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도 그 발걸음을 떼고 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하늘의 열매가 맺어지고 있다.
스리랑카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주고, 그들을 예배자로 세운 이숙인 권사(중종로공동체)와 평택M센터를 떠나 경북 성주에서 몽골인 친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 토야 자매(몽골)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 권찬송, 홍하영 기자
고 하용조 목사는 마태복음 28장 19~20절 말씀을 바탕으로 선교 비전을 제시하면서 늘 ‘떠날 것’을 강조했다. 그 말씀을 따라 온누리교회 성도들은 국내외 아웃리치부터 선교사가 되기까지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도 그 발걸음을 떼고 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하늘의 열매가 맺어지고 있다.
스리랑카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주고, 그들을 예배자로 세운 이숙인 권사(중종로공동체)와 평택M센터를 떠나 경북 성주에서 몽골인 친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 토야 자매(몽골)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 권찬송, 홍하영 기자
“하나님 이제 저를 마음껏 써주세요”
이숙인 권사가 38년 교직생활을 마무리하며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다. 하나님은 그 기도대로 이 권사의 삶을 마음껏 사용하셨다. 생각지도 못했던 선교의 사명을 주시고는 스리랑카로 보내셨다. 이 권사에게 주셨던 가르침의 은사로 ‘스리랑카 온누리 국제학교(이하 국제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하셨다. 이 권사가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염려했더니 통역자까지 붙여주셨다. 이 권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숙인 권사가 38년 교직생활을 마무리하며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다. 하나님은 그 기도대로 이 권사의 삶을 마음껏 사용하셨다. 생각지도 못했던 선교의 사명을 주시고는 스리랑카로 보내셨다. 이 권사에게 주셨던 가르침의 은사로 ‘스리랑카 온누리 국제학교(이하 국제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하셨다. 이 권사가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염려했더니 통역자까지 붙여주셨다. 이 권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말썽꾸러기들을 예배자로…
이 권사는 스리랑카에서 트리홈(스리랑카 목회자 자녀들이 생활하는 국제학교 기숙사) 관리자 및 한국어 교사로 사역하게 됐다. 트리홈에서 기숙사를 관리하며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트리홈에서 생활하는 7명의 아이들은 6~7살 무렵 부모 곁을 떠나 국제학교에 입학한 스리랑카 목회자들의 자녀들이었다. 이 권사는 어릴 적부터 부모와 떨어져 국제학교에서 지내는 아이들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부모와 멀리 떨어진 아이들을 보고 사람들은 ‘부모 없는 고아들’이라고 손가락질 했다. 그 시선이 무척이나 따가웠던 아이들은 마음의 벽을 쌓기 시작했다. 선생님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선생님들이 자는 방에 몰래 들어가 벌레를 풀어 놓는 등 짓궂은 장난을 치면서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아이들을 “나쁜 짓만 골라하는 놈들”이라며 혀를 찼다. 아이들은 마음의 문을 더 굳게 닫아 버렸다.
트리홈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이 권사에게도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았다. 이 권사와 처음 만난 날에도 힐끗 쳐다보고는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인사도 제대로 나눌 수 없었다. 그 아이들에게 이 권사는 부모와 같은 사랑을 주고 싶었다. 매일 “너희는 착하고 귀한 아이들”이라며 격려했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위해 기도해주고 안아줬다. 처음에는 어색해하고 기겁하던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다. 수업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한 줄로 서서 이 권사의 포옹을 기다리기까지 했다. 아이들이 잘못을 했을 때는 혼을 냈다. 학교에서 친구와 싸우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사랑의 매도 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풀 죽어 있는 아이들을 안아주고 함께 울면서 기도했다.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뉘우칠 수 있도록 도왔다.
부모와 같은 사랑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성적도 책임졌다. 트리홈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 중에는 중학교 교육과정인데도 덧셈과 뺄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이 권사는 매일 쪽지시험을 보면서 아이들의 공부를 도왔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며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온 마음을 쏟았다. 그렇게 뿌린 이 권사의 사랑과 헌신이 열매 맺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그 아이들이 예배자가 된 것이다. 눈만 뜨면 축구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뛰쳐나가던 아이들이 아침마다 기도를 했다. 자기 전에는 꼭 함께 모여 예배로 하루를 마무리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교사들과 아이들이 놀랄 정도로 성적이 눈에 띄게 향상됐다. 아이들에게 꿈과 비전도 생겼다. 목회자, 파일럿, 컴퓨터프로그래머, 헤어디자이너 등 각자의 달란트와 관심사에 맞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 권사는 트리홈에서 생활하던 아이들이 국제학교를 졸업하면서 선교사역을 종료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저를 마음껏 사용해달라"는 기도를 이루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역을 마무리했다. 이 권사는 한국으로 돌아 온 지금도 매일 그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다. 그 아이들이 참된 예배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스리랑카의 리더로 세워지기를, 낮은 자들을 섬기는 자 되기를 매일 기도하고 있다.
트리홈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이 권사에게도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았다. 이 권사와 처음 만난 날에도 힐끗 쳐다보고는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인사도 제대로 나눌 수 없었다. 그 아이들에게 이 권사는 부모와 같은 사랑을 주고 싶었다. 매일 “너희는 착하고 귀한 아이들”이라며 격려했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위해 기도해주고 안아줬다. 처음에는 어색해하고 기겁하던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다. 수업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한 줄로 서서 이 권사의 포옹을 기다리기까지 했다. 아이들이 잘못을 했을 때는 혼을 냈다. 학교에서 친구와 싸우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사랑의 매도 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풀 죽어 있는 아이들을 안아주고 함께 울면서 기도했다.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뉘우칠 수 있도록 도왔다.
부모와 같은 사랑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성적도 책임졌다. 트리홈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 중에는 중학교 교육과정인데도 덧셈과 뺄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이 권사는 매일 쪽지시험을 보면서 아이들의 공부를 도왔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며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온 마음을 쏟았다. 그렇게 뿌린 이 권사의 사랑과 헌신이 열매 맺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그 아이들이 예배자가 된 것이다. 눈만 뜨면 축구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뛰쳐나가던 아이들이 아침마다 기도를 했다. 자기 전에는 꼭 함께 모여 예배로 하루를 마무리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교사들과 아이들이 놀랄 정도로 성적이 눈에 띄게 향상됐다. 아이들에게 꿈과 비전도 생겼다. 목회자, 파일럿, 컴퓨터프로그래머, 헤어디자이너 등 각자의 달란트와 관심사에 맞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 권사는 트리홈에서 생활하던 아이들이 국제학교를 졸업하면서 선교사역을 종료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저를 마음껏 사용해달라"는 기도를 이루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역을 마무리했다. 이 권사는 한국으로 돌아 온 지금도 매일 그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다. 그 아이들이 참된 예배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스리랑카의 리더로 세워지기를, 낮은 자들을 섬기는 자 되기를 매일 기도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끝까지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요”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요”
몽골인 토야 자매는 지난해 10월 평택M센터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지금 그녀는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만난 몽골인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예수를 믿은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몽골인 친구 7명을 전도할 정도로 전도의 여왕이 됐다. 토야 자매에게는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일이 가장 큰 기쁨이자 행복이다.
토야 자매는 몽골에서 결혼했다. 두 아이를 낳아 기를 때까지 예수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한국인 선교사에게 복음을 들은 친언니가 “예수 믿으라”고 권면했지만 복음이 잘 들리지 않았다. 예수를 믿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토야 자매에게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의 가장 큰 어려움은 둘째 아들의 장애였다.
“둘째 아들을 낳을 당시 아이의 머리가 잘 나오지 않아서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때 의사가 무리하게 아이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목에 장애가 생겼어요. 정확한 병명은 알지 못하지만 목이 뻣뻣하게 굳는 병이에요.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더라고요.”
결국 토야 자매는 지난해 4월 둘째 아들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한국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한국말을 할 수 없어서 직장을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러던 중에 평택M센터를 알게 됐다. 평택M센터 겨울수련회에 참석하면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날 이후 토야 자매는 수요예배, 큐티 모임 등 모든 예배에 참석했다. 성경 말씀이 꿀처럼 달았다. 한국생활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마음의 평안도 얻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했던 구직활동도 할 수 있게 됐다. 몽골어예배에 함께 참석하는 자매의 도움을 받아 화장품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토야 자매는 화장품공장에서 근로계약 기간이 만료되면서 지난 4월 경상북도 성주군에 있는 한 참외농장으로 이직했다. 더 이상 평택M센터 몽골어예배에 참석할 수 없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성주 제일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성주 제일교회에는 몽골어예배가 없다. 목사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찬양의 가사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기도하는데 제가 평택에서 6개월 동안 배웠던 말씀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씀이 전도에 관한 것이었어요.”
그때부터 참외농장에서 함께 일하는 몽골인 친구들을 하나둘씩 전도했다. 성주에 온 지 3달이 채 되지 않아 무려 7명을 성주 제일교회로 인도했다. 몽골인 자기 자매도 그중 하나였다.
“토야의 성실함과 친절함 때문에 교회에 호감을 갖게 됐어요. 토야가 들려주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요.”
서철봉 목사(성주 제일교회 담임)와 이신근 안수집사(성주 제일교회)도 토야 자매의 신실한 믿음을 칭찬했다.
“토야 자매는 기도하는 법, 예배드리는 법, 식당 안내 등 몽골인 형제자매들이 교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성심성의껏 섬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토야 자매의 열정 가득한 전도로 몽골인의 수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성주 제일교회에서는 그들을 위한 예배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토야 자매가 가슴 속에 소중하게 품고 있던 소망을 고백했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끝까지 전하고 싶어요. 무엇보다 둘째 아들의 목이 하루빨리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토야 자매는 몽골에서 결혼했다. 두 아이를 낳아 기를 때까지 예수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한국인 선교사에게 복음을 들은 친언니가 “예수 믿으라”고 권면했지만 복음이 잘 들리지 않았다. 예수를 믿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토야 자매에게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의 가장 큰 어려움은 둘째 아들의 장애였다.
“둘째 아들을 낳을 당시 아이의 머리가 잘 나오지 않아서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때 의사가 무리하게 아이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목에 장애가 생겼어요. 정확한 병명은 알지 못하지만 목이 뻣뻣하게 굳는 병이에요.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더라고요.”
결국 토야 자매는 지난해 4월 둘째 아들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한국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한국말을 할 수 없어서 직장을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러던 중에 평택M센터를 알게 됐다. 평택M센터 겨울수련회에 참석하면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날 이후 토야 자매는 수요예배, 큐티 모임 등 모든 예배에 참석했다. 성경 말씀이 꿀처럼 달았다. 한국생활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마음의 평안도 얻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했던 구직활동도 할 수 있게 됐다. 몽골어예배에 함께 참석하는 자매의 도움을 받아 화장품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토야 자매는 화장품공장에서 근로계약 기간이 만료되면서 지난 4월 경상북도 성주군에 있는 한 참외농장으로 이직했다. 더 이상 평택M센터 몽골어예배에 참석할 수 없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성주 제일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성주 제일교회에는 몽골어예배가 없다. 목사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찬양의 가사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기도하는데 제가 평택에서 6개월 동안 배웠던 말씀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씀이 전도에 관한 것이었어요.”
그때부터 참외농장에서 함께 일하는 몽골인 친구들을 하나둘씩 전도했다. 성주에 온 지 3달이 채 되지 않아 무려 7명을 성주 제일교회로 인도했다. 몽골인 자기 자매도 그중 하나였다.
“토야의 성실함과 친절함 때문에 교회에 호감을 갖게 됐어요. 토야가 들려주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요.”
서철봉 목사(성주 제일교회 담임)와 이신근 안수집사(성주 제일교회)도 토야 자매의 신실한 믿음을 칭찬했다.
“토야 자매는 기도하는 법, 예배드리는 법, 식당 안내 등 몽골인 형제자매들이 교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성심성의껏 섬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토야 자매의 열정 가득한 전도로 몽골인의 수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성주 제일교회에서는 그들을 위한 예배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토야 자매가 가슴 속에 소중하게 품고 있던 소망을 고백했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끝까지 전하고 싶어요. 무엇보다 둘째 아들의 목이 하루빨리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작성자 홍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