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과학주의] 과학주의의 우연과 하나님의 은혜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과학주의
과학주의의 우연과 하나님의 은혜
과학주의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물질이며, 이들은 기본원소들의 집합체다. 과학주의는 물질 외에 존재하는 것은 없으므로 ‘하나님’이나 ‘영혼’ 같은 비물질적인 존재가 없다. 과학주의에서는 모든 것은 두 가지 ‘자연법칙’에 지배된다. 첫째, 자연법칙은 의도적인 창조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자연법칙 자체에는 목적성이 없으며, 그저 단순히 존재할 뿐이다. 둘째, 자연법칙은 불변하고 예외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도 자연법칙에 따라 상호작용하는 물질의 집합체이므로 생물과 같은 방법으로 탐구되고 설명해야 한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열망, 감정, 미학적 판단, 도덕적 선택도 물리화학적 반응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즉, 인간 활동의 원인은 뇌에서 일어나는 호르몬 등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1933년 과학주의자은 ‘인본주의자 선언’에서 자연법칙에 종교적 인본주의의 사상을 더했다. 즉, 종교적 사상이 적절하지 않지만, 선한 삶의 추구는 인류의 중심 과제라고 주장한다. 과학주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종교적인 구조와 신앙체계를 가진다.
과학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인간의 기본적인 경험을 설명할 때 문제가 생긴다. “원소들의 집합체가 어떻게 도덕적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가?”, “원자들 집합체가 사랑할 수 있는가?”, “단순히 물질의 집합체일 뿐인 인간은 왜 자신의 존재와 삶의 목적과 의미를 궁금해할까?” 과학주의는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적 가치, 삶의 목적 등을 밝혀 줄 아무런 기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이 해답을 줄 수 있다는 역설을 주장한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영원히 존재하시는지, 어떻게 무에서 만물을 창조하셨는지 설명할 수는 없다. 이를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비인격적인 물질세계에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필요한 믿음보다 큰 믿음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복음주의 작가 필립 얀시의 이야기다. 어느 날 해변을 걷고 있는데 한 아이가 장난감 통으로 백사장에 파놓은 큰 구멍에 계속 바닷물을 부어 넣고 있었다. 신기해서 아이에게 물었다.
“얘야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니?”
아이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오늘 모든 바닷물을 이 구멍에 담을 거예요.”
필자가 오래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를 방문해 연구할 때 일이다. 어느 날 학교 식당에서 점심 식사 기도를 하고 눈을 떠보니 앞에 한 백인 친구가 앉아있었다. 내게 그리스도인인지 물어보고는 자신은 불교도라고 했다. 참 이상한 친구라고 생각하고는 식사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냐?”고 그가 물었다. 자기는 미국 코넬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현재 뇌신경학을 연구하는 의사라고 소개했다. 그러고는 내게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물었다. 나는 허무주의로 좌절하다가 예수님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았음과 그 이후 겪은 감격스러웠던 영적 체험을 간증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내가 영적 체험과 기도 응답을 얘기할 때마다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뇌에서 일어난 변화의 영향과 우연으로 설명했다. 인내심으로 변론했지만, 계속되는 반론에 짜증이 났다. 답답한 마음에 속으로 하나님을 불렀는데 한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나는 점심때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었는데 너는 스테이크가 아니라 유기물질, 수분, 칼슘, 마그네슘, 칼륨, 황, 탄소 등을 먹은 것 같다. 너는 계속해서 분해된 구성 원소들이나 씹어 먹어라. 나는 감사함으로 맛을 음미하며 즐기겠다”라고 말했다. 말 끝마다 열심히 반박하던 친구가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놀라운 통찰력의 비유다”라고 말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백했다. 사실 자기 가족과 친척들은 독실한 3대째 기독교 집안인데 믿음이 강제되는 분위기가 싫어서 반항심으로 불교를 믿는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3년 사이 일어난 4건의 치명적인 교통사고 가운데서 극적으로 살아난 사건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때는 단순히 운이 너무 좋았을 따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진지하게 돌이켜보니 그러기에는 너무 큰 우연 같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운이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은혜일 수 있는데 온갖 지식으로 분해하며 난도질했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며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변화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다음 날 반갑게 인사하는 그 친구의 얼굴이 참 평안해 보였다.
어떤 찬송가 가사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누려온 많은 것들과 감사한 기도응답들을 스티브가 짧은 지식과 이성으로 분해 해왔던 것처럼 분석하며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받은 은혜는 분해가 아니라 그저 감사하며 누리는 것이다. 인류는 과학의 급진적 발전에 도취 되어 하나님보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과학주의)을 바라본다. 과학주의가 세상을 진보시키고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전능자 하나님 앞에서 과학주의의 주장은 백사장 작은 구멍에 바닷물을 모두 담을 수 있다는 아이의 생각 그 이상이 아니다. 과학주의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배하는 그 시간을 기다린다.
/ 성태연 집사(서초C공동체, 온누리세계관학교)
1933년 과학주의자은 ‘인본주의자 선언’에서 자연법칙에 종교적 인본주의의 사상을 더했다. 즉, 종교적 사상이 적절하지 않지만, 선한 삶의 추구는 인류의 중심 과제라고 주장한다. 과학주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종교적인 구조와 신앙체계를 가진다.
과학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인간의 기본적인 경험을 설명할 때 문제가 생긴다. “원소들의 집합체가 어떻게 도덕적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가?”, “원자들 집합체가 사랑할 수 있는가?”, “단순히 물질의 집합체일 뿐인 인간은 왜 자신의 존재와 삶의 목적과 의미를 궁금해할까?” 과학주의는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적 가치, 삶의 목적 등을 밝혀 줄 아무런 기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이 해답을 줄 수 있다는 역설을 주장한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영원히 존재하시는지, 어떻게 무에서 만물을 창조하셨는지 설명할 수는 없다. 이를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비인격적인 물질세계에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필요한 믿음보다 큰 믿음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복음주의 작가 필립 얀시의 이야기다. 어느 날 해변을 걷고 있는데 한 아이가 장난감 통으로 백사장에 파놓은 큰 구멍에 계속 바닷물을 부어 넣고 있었다. 신기해서 아이에게 물었다.
“얘야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니?”
아이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오늘 모든 바닷물을 이 구멍에 담을 거예요.”
필자가 오래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를 방문해 연구할 때 일이다. 어느 날 학교 식당에서 점심 식사 기도를 하고 눈을 떠보니 앞에 한 백인 친구가 앉아있었다. 내게 그리스도인인지 물어보고는 자신은 불교도라고 했다. 참 이상한 친구라고 생각하고는 식사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냐?”고 그가 물었다. 자기는 미국 코넬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현재 뇌신경학을 연구하는 의사라고 소개했다. 그러고는 내게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물었다. 나는 허무주의로 좌절하다가 예수님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았음과 그 이후 겪은 감격스러웠던 영적 체험을 간증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내가 영적 체험과 기도 응답을 얘기할 때마다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뇌에서 일어난 변화의 영향과 우연으로 설명했다. 인내심으로 변론했지만, 계속되는 반론에 짜증이 났다. 답답한 마음에 속으로 하나님을 불렀는데 한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나는 점심때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었는데 너는 스테이크가 아니라 유기물질, 수분, 칼슘, 마그네슘, 칼륨, 황, 탄소 등을 먹은 것 같다. 너는 계속해서 분해된 구성 원소들이나 씹어 먹어라. 나는 감사함으로 맛을 음미하며 즐기겠다”라고 말했다. 말 끝마다 열심히 반박하던 친구가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놀라운 통찰력의 비유다”라고 말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백했다. 사실 자기 가족과 친척들은 독실한 3대째 기독교 집안인데 믿음이 강제되는 분위기가 싫어서 반항심으로 불교를 믿는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3년 사이 일어난 4건의 치명적인 교통사고 가운데서 극적으로 살아난 사건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때는 단순히 운이 너무 좋았을 따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진지하게 돌이켜보니 그러기에는 너무 큰 우연 같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운이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은혜일 수 있는데 온갖 지식으로 분해하며 난도질했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며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변화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다음 날 반갑게 인사하는 그 친구의 얼굴이 참 평안해 보였다.
어떤 찬송가 가사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누려온 많은 것들과 감사한 기도응답들을 스티브가 짧은 지식과 이성으로 분해 해왔던 것처럼 분석하며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받은 은혜는 분해가 아니라 그저 감사하며 누리는 것이다. 인류는 과학의 급진적 발전에 도취 되어 하나님보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과학주의)을 바라본다. 과학주의가 세상을 진보시키고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전능자 하나님 앞에서 과학주의의 주장은 백사장 작은 구멍에 바닷물을 모두 담을 수 있다는 아이의 생각 그 이상이 아니다. 과학주의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배하는 그 시간을 기다린다.
/ 성태연 집사(서초C공동체, 온누리세계관학교)
작성자 김다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