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입성
마가복음 11장 1~11절

이 재 훈 목사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우리가 외치는 호산나는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길에 우리의 죄와 허물을 내어드리면십자가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됩니다.
예수님은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거나 주목받는 것을 피해 기적을 베풀고 난 이후에는 산이나 광야로 가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반복해서 자신의 존재를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말하고 다녔습니다”(막 7:36).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이야기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아직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태도가 바뀝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신 예수님
예루살렘 근처에 벳바게 마을과 베다니 마을이 있었는데 두 마을은 거의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벳바게 마을의 위치가 지금의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이 마을은 예루살렘과 가까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숙박하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마을에 도착해서 나귀를 타고 사람들의 찬양과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장면을 보고 온 성이 떠들썩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주목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이 사건을 승리의 입성이라고 말합니다. 절기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주간을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역하는 동안 몇 차례 배를 탄 것을 제외하고는 걸어서 다녔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는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지금까지 보여 주신 모습과 다르게 행동하셔서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나타내야 하는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며칠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당시 유월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요세푸스라는 학자는 300만이 넘는 인원이 모였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예수님이 엄청난 인파들 앞에서 자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도구는 나귀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나귀를 선택했을까요.
나귀를 빌려 오라는 명령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올리브 산 근처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 제자 두 명을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저기 보이는 마을로 들어가라. 그곳에 들어가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하나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서 이리로 끌고 와라. 만약 누가 ‘왜 이러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필요하시니 쓰고 제자리에 갖다 놓겠다’고 하라’”(1~3절).
제자들에게 나귀를 끌고 오라고 명령하신 예수님의 지시는 얼핏 보면 절도행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인의 동의를 얻은 이후에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어느 장소에 가면 나귀가 있고, 제자들이 나귀를 끌고 오려고 하면 그 이유를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그 사람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까지 알려주셨습니다. 이렇듯 장차 일어날 일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가르쳐 주시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나귀를 끌어올 때 빼앗거나 그냥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빌려 오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늘과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나귀의 주인 아닙니까. 예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신데 쓰고 돌려주겠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멋있는 모습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사용하겠다는데 누가 거부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쓰겠다고만 하지 않으시고 제자리에 가져다 놓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평생을 사셨습니다. 시몬이 빌린 배에 오르셔서 가르치고, 빌린 다락방에서 유월절 식사를 하고, 빌린 집에서 사셨습니다. 무덤도 빌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나귀도 빌리셨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권리를 마땅히 주장하실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빌려서 사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에게 빌려야 한다고 해서 상처받지 마십시오.
구약의 예언 이루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빌린 것은 확실하게 제자리에 갖다놓으셨습니다. 돈은 물론이고 빌린 것은 확실하게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이 크리스천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의 신비를 믿기 싫어하는 어떤 학자들은 틀림없이 예수님이 베다니에 자주 다니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귀 주인에게 미리 부탁해서 나귀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예수님이 나귀의 주인과 사전에 모의를 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당시 문화를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늘날에는 핸드폰과 이메일이 있어서 사전모의가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걸어서 소식을 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귀를 가져오라고 하신 이유는 구약에서 메시야가 나귀를 타고 오시는 분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시온의 딸아, 마음껏 기뻐하여라! 예루살렘의 딸아, 소리쳐라! 보아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다. 그는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니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스 9: 9) 메시야는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성경에는 200여 가지가 넘는 예언이 있습니다. 혼자서 200여 가지가 넘는 예언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한일입니다.
나귀타고 오신 겸손과 평화의 왕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관련된 모든 일들은 한 사람이 만들어 낸 시나리오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메시야가 한 일을 인간의 힘으로 조작해서 성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가진 분이 아니면 이뤄낼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한 것이지 자신이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행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놀라운 주권과 신비를 이해해야합니다.
스가랴에 예언된 메시야는 나귀를 타시고 오시는 겸손한 왕입니다. 대개 왕이 타는 동물이 말과 나귀입니다. 왕이 말을 탄다는 것은 전쟁 중이라는 신호이고, 나귀를 타면 평화의 시대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나귀는 무시당하는 동물이지만 당시에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왕의 동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와 연관이 많습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단어 중 하나가 예수님이 누우신 구유를 말구유라고 생각하는데 시대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이 누우신 구유는 나귀구유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났을 때에는 나귀의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십자가로 향하실 때에는 나귀를 타고 가셨습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은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세상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 오신 메시야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메시야로 오해하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 겉옷을 깔아 드렸고 또 어떤 사람들은 들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와 길에 깔기도 했습니다. 앞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라가는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호산나! 복이 있으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여!’ ‘복이 있도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8~10절).
종려주일예배를 드릴 때 이 찬양을 많이 부릅니다. 그런데 이 군중들의 노래는 순수한 찬양이 아닙니다.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오해와 편견이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위한 퍼레이드이고 분명히 예수님을 환영하는 행진입니다. 그러나 군중들의 의도는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길 위에 깔면서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지만 그들 모두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군중들이 외치고 있는 호산나라는 단어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시편 118편 25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오 여호와여 간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오 여호와여 간구합니다. 우리가 잘되게 하소서” (시118:25).
호산나의 뜻은 우리를 구원하소서입니다. 호산나는 구원에 대한 갈망을 외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이 외치고 있는 호산나는 분명히 같은 단어이지만 의미가 다릅니다. 지금 이들이 외치고 있는 구원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외치고 있는 구원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릅니다.
습관대로 예수님을 환영
세속적인 왕이 지나갈 때 군중들은 왕으로 모신다는 의미로 옷을 길 위에 깔아 놓습니다. “왕의 신하들은 각각 얼른 자기 옷을 벗어 예후의 발 아래 깔았습니다. 그러고는 나팔을 불며 소리쳤습니다. “예후가 왕이다”(열 9:13).이 행위는 구약시대에 세속적인 왕, 장치적인 왕에게 하는 행동입니다. 또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또 다른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주전 175년에 유대가 시리아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을 당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황폐화 되자 그들은 성전을 매음굴로 만들고 우상 숭배하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마카디우스라는 사람이 참지 못해 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했습니다. 전쟁을 마치고 마카디우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재탈환한 그를 환영하는 의미에서 유래된 행동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을 환영할 때 하는 행위입니다.
군중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보고 호산나라고 외치면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여러 시대에 있었던 습관들이 한꺼번에 나타난 것입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대로 환영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겉옷을 깔고 호산나를 외치기도 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행동의 공통점은 모두 오해라는 것입니다. 그 행위는 십자가로 향해 가는 메시야를 향해 구원을 갈망하기 위해 한 환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묵묵히 예루살렘에 입성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보고 싶어서 나온 사람도 있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나온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라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환영하거나 종려나무를 흔든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은 흥분했지만 예수님은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군중들의 환호성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군중들이 흥분했기 때문에 통제가 쉽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묵묵히 나귀를 타고 조용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나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군중들이 흥분을 했다고 나귀에서 내려서 숨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루살렘 입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승리의 입성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정복자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가시 면류관을 쓰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의 보좌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는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조롱받으시고 고난을 받기 위해 오신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대적 자들에게도 존재를 드러냄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겸손과 섬김, 자기희생으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오해는 무너졌습니다. 군중들은 흥분해서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오는 의미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스가랴 9장 9~10절의 말씀을 그들이 기억했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들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내가 에브라임에 있는 전차를 없애고 예루살렘에 있는 말을 없애고 전쟁용 활도 부러뜨릴 것이다. 그가 다른 민족들에게 평화를 말하고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다스리며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릴 것이다”(스 9~10장).
이 말씀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평화의 왕이 이룰 나라의 모습입니다. 9절에 나귀를 타고 오신 평화의 왕이 이룰 나라의 모습을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으로 이뤄지는 나라가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평화를 전하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분입니다. 유대인들이 이 구절을 분명히 알았다면 예수님이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라는 것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예루살렘에는 누가 있습니까. 그곳에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대적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을 헤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도시를 가야만 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숨어서 비밀리에 가지 않겠습니까.
십자가 승리 부르는 ‘호산나’
아마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파악하기 위해 사람을 배치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행동을 드러내어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닷새 전입니다. 자신을 유월절의 대속 제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장차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그분의 기쁨이요 간절히 바라는 소망인 것처럼 예수님은 대적 자들에게 자신을 노출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향해서 나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영광스러운 발걸음이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나아가는 발걸음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환영하고 외쳤던 군중처럼 호산나를 외쳐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외치는 호산나의 의미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야합니다. 군중들은 겉옷을 그분 앞에 깔아놓으며 그분을 정치적인 지도자요, 개선장군이요, 세상의 정복자라고 오해했지만 우리는 연약함과 염려, 불안, 두려움, 상처, 고집, 편견을 그분 앞에 깔아 드려야합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밟고 지나가시도록 내어드려야 예수님이 사탄의 모든 권세를 짓밟으시고 승리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정복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환영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외치는 호산나가 참된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길에 우리의 죄와 허물을 내어드림으로 십자가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되게 하십시오.
기도합시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땅에 오신 주님을 환영하며 날마다 주님을 모셔 들이는 우리의 삶이되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분을 환영하며 다윗의 나라를 이루실 그분을 환영하며 바다에서 바다까지 땅 끝까지 다스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나라가 온 열방에 이뤄지도록 우리의 삶을 드리고 우리 모든 삶을 드려 주님의 나라가 이뤄지는데 쓰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일러스트 박정일 meteorjip@nate.com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