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무화과나무와 성전

마가복음 11장 12~21절

 

이 재 훈  목사

 

 

기도를 통해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교회는 하나님의 집이 되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됩니다.첫 무화과 열매가 되어서 우리를 통해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역사적으로 타락한 시대에는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권력을 종교화했습니다. 권력을 종교화 하는 것은 거의 모든 독재자들이 시도한 행위입니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종교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이 영원할 것처럼 포장했지만 권력을 종교화 한다고 해서 살아남은 권력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둘째는 종교를 권력화 했습니다. 이 모습은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교회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종교가 종교의 기능과 목적을 잃어버리면 종교는 권력을 지향하게 됩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이 일어날 무렵에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 권력화 된 로마교회의 부패를 지적했습니다. 어느 때부터 종교는 방탕하고 수치스러운 죄와 사망의 왕국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유대교회는 종교개혁 이전의 로마교회와 같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두 가지 사건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당시의 크리스천들의 영적 상태를 잘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

 

“이튿날 베다니를 떠나시려는데 예수께서 배가 고프셨습니다. 예수께서 멀리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는 열매가 있을까 해서 가 보셨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시니 잎만 무성할 뿐 무화과 열매는 없었습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12~13절). 

이 사건은 신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기대하셨는데 열매가 없는 것을 보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저주를 한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 저주의 대상이 식물인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선하신 성품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튿날 아침, 예수와 제자들이 지나가다 뿌리째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를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생각이 나서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저주하셨던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20~21절). 

지금까지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사람을 살리셨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무화과나무를 뿌리째  말라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파괴적인 기적을 행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물론 귀신들린 사람을 고칠 때 귀신을 근처에 있던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하셔서 돼지 떼가 몰살당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한 영혼이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파괴적인 기적을 행하신 것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이 유일합니다. 참새 한 마리도 귀하게 여기시고 들풀도 정성껏 키우시던 하나님의 아들이 성품이 지나치게 과격해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무화과나무의 독특한 특징

 

두 가지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그때에 배가 고프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예수님이 아침을 드시지 않고 길을 나서서 무척 배가 고팠는데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저주했다라고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렇게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의문이 드는 두 번째 단어는 무화과 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화과가 익을 철이 아닌데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기대한 것은 비상식적이거나 불합리한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이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순간 이성을 잃었을 것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든 것이 오해입니다.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열매를 맺는 지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합니다.

무화과나무는 4월부터 10월까지 다섯 번 열매를 맺습니다. 한 열매가 나고 떨어지면 또 다른 열매가 나기를 다섯 번 반복하는 독특한 나무입니다. 그런데 유월절 즈음에 나는 첫 번째 열매는 아주 작고 당도가 떨어져 맛이 없는 열매가 열립니다. 이 열매를 가리켜 히브리어로 ‘파게’라고 합니다. 무화과나무 주인은 파게를 내다 팔수 없습니다. 맛이 없고 작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열매는 모두 따야합니다. 파게를 따지 않으면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 열리는 맛있는 무화과가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게는 지나가는 행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따 먹어도 주인이 제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파게를 따 먹어주는 것이 주인을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 열리는 무화과 열매를 ‘테나’라고 합니다. 테나는 탐스럽고 맛있는 열매입니다.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열매가 열리지 않으면 그 다음 열매도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풍성한 열매 맺는 참된 신앙

 

예수님은 벳바게와 베다니 마을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벳바게의 벳은 집이라는 뜻이고 뒤에 있는 바게는 무화과나무의 첫 번째 열매인 파게를 상징합니다. 또한 베다니는 벳과 테나가 합쳐져서 베다니입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무화과의 집이라는 의미로 그만큼 예루살렘 주변에 무화과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지역의 이름으로까지 붙여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대한 열매는 테나가 아니라 파게입니다. 그러나 무화과 나무에는 잎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무화과 철이 아니라는 것은 테나가 열리는 시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13절 말씀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습니다.

파게가 열리지 않은 나무에서 테나가 열리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화가 나서 저주를 하신 것도, 철을 모르고 오해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오해를 해결했다고 해도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충격입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배고픔에 의한 분노나 심리적인 불안정 때문에 우발적으로 저주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나무의 뿌리부터 마르게 한 것은 충격적인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충격적인 교훈은 권력화 되어버린 유대교회를 향한 교훈이었습니다.

뿌리가 마른 나무는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영적공동체는 뿌리부터 마릅니다. 잎이 무성해서 살아있는 것 같지만 영적인 근원이 말라 버린 것은 종교의 타락과 영적 공동체의 타락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통해 가르쳐주시는 교훈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기 위해 무화과나무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듯이 우리의 인생도 철을 따라 열매 맺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신앙의 목표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열매 맺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참된 종교는 언제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나 거짓된 종교는 잎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뿌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를 통해 신앙을 설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 닮아가는 ‘참된 신앙’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래서 그의 신뢰가 여호와께 있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그는 물가에 심어서 시냇가에 뿌리를 내린 나무 같을 것이다. 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 잎이 항상 푸르다. 가뭄의 해에도 걱정이 없으며 그치지 않고 열매를 맺는다”(예 17 7:8).

물가에 심은 나무는 뿌리가 시냇가와 연결되어 있어서 더위와 가뭄에도 걱정 없이 열매를 맺

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 있으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수 없다” (요 15: 4).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열매는 맺는 것이 아니라 맺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 안에 거하면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고 열매가 맺어집니다.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용서하거나, 헌신을 해야만 한다는 관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거했더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용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어떠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히면 율법적인 종교에 머무르게 되지만 하나님 안에 거하면 열매 맺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관념에 머무르는 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거짓종교일수록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들의 겉모습은 화려하고 복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참된 신앙은 단순합니다. 그저 예수님을 닮아 가면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그와 함께 살아가면 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우리가 목표를 세워 행동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여정입니다. 씨앗을 심으면 나무가 자라 열매가 맺히듯이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 씨앗을 뿌려서 내일 열매를 거둘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기대하신 첫 열매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인격과 삶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유대교회가 때에 따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유대교회는 하나님이 충분한 시간과 은혜, 그리고 충분한 영양분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열매 맺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식물을 싫어해서도 아니고 기분이 나빠서도 아닙니다. 무화과나무가 당시의 성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유대교회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같다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 나는 여름 과일을 다 따 간 뒤와 같고 포도를 다 거두고 난 뒤와 같구나. 먹을 만한 포도 한 송이 없고 먹고 싶은 무화과 첫 열매도 없구나. 경건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사라졌고 의인이라고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구나. 그들은 모두 피를 보려고 숨어서 기다리고 있고 각자 자기 형제를 그물로 잡는 구나. 두 손은 악을 행하는데 뛰어나고 관리와 재판관은 뇌물을 요구하며 권력자들은 자기의 욕망이 내키는 대로 지시하고 그것을 위해 함께 일을 꾸미는구나”(미 7: 1~3).

 

예수님이 기대한 열매는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는 비록 상품가치는 없지만 누구나 따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첫 열매가 열려야 다섯 번째까지 열매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 열매가 열린 다는 것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게서 본 것과 당시 성전에서 공통적으로 본 것은 잎만 무성한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이 거짓 종교입니다. 의미를 잃어버린 종교의 모습입니다. 열매 없는 종교 일수록 겉은 화려합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는 것은 열매이지 잎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대하는 열매는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과 강도의 신앙

 

“예루살렘에 도착하시자마자 예수께서 성전으로 들어가 거기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내쫓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돈 바꿔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라도 장사할 물건들을 들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5~16절). 

사람들을 내쫓고 장사하는 사람들의 의자를 엎으시는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과격한 행동을 하셨을까요. 흠 없이 제물을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의도와 율법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성전에서만 받는 화폐로 바꿔야만 했는데 환전수수료를 부풀려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상징적으로 그것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물러났겠습니까. 예수님은 영적 권위로 사람들을 쫓았지만 시장을 폐쇄할 만큼 물리적인 힘을 행사한 것은 아닙니다.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모든 민족들이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성경에 기록돼 있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말았다”(17절).

예수님이 분노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맘몬신을 섬기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강도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것은 기도를 잃어버리면 강도가 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한순간에 강도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한꺼번에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습니다. 기도와 예배를 잃어가는 순간 서서히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갑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뤄지고 일들을 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자 어느 순간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되어있었습니다. 중세 교회가 처음부터 강도의 소굴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면죄부를 사면 먼저 죽은 사람도 천국에 갈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초대교회의 신앙과 기도, 그리고 예배를 잃어버리면서 변질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어느 순간 강도의 신앙이 될지 모릅니다. 참된 신앙을 잃어버리면 어느 순간강도의 신앙이 됩니다. 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내 뜻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나 강도 같은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맞추지 않고 온전히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하나님을 이용해서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포장해서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잇는 ‘기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집이 너희가 보기에 강도들의 소굴이 됐느냐? 내가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 여호와의 말이다”(예 7: 11).

여러분 기도는 프로그램도 아니고 비전을 이루는 도구도 아닙니다. 기도는 그 자체가 신앙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기 위해서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자신의 삶을 맞춰가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기도가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해 줍니다. 참된 기도를 드리면 열매를 얻습니다. 반대로 기도를 잃어버리면 종교생활을 하게 됩니다. 종교생활은 헛된 생활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모임이 강도의 신앙이 될지 모릅니다. 겉으로 봐서는 화려하고 웅장하지만 열매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모임은 강도의 소굴이 되어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도와 예배를 잃어버리게 되면 어느 순간에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지적을 들은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기도 통해 하나님 뜻에 순종해야

 

“이 말을 듣고 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죽일 방도를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치심에 놀라는 것을 보고 예수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18절).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잃어버린 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을 그렇게 대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강도가 되어 버렸기에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겉으로는 지도자나 종교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기도를 잃어버리고 참된 예배를 잃어버린 강도들이었습니다.

정직한 기도와 신령한 예배를 잃어버리면 우리도 그들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만약 교회가 기도를 잃어버리면 교회는 권력화됩니다. 교회 내부에서 권력싸움이 일어날 것입니다. 많은 교회의 갈등은 권력싸움에서 시작됩니다. 교회가 교회끼리, 교회안의 사람과 사람끼리 권력다툼을 합니다. 교회가 권력화 되면 마치 권력이 종교화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강도의 소굴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감추어진 권력의 유혹을 철저하게 제거해야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 되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됩니다. 우리가 첫 무화과 열매가 되어서 우리를 통해서 제2 제3의 열매가 맺어져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일러스트 박정일 meteorjip@nate.com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