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권세논쟁

마가복음 11장27절~33절

 

 

권세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섭리 앞에 자신의 삶을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다스리는 분입니다날마다 하나님의 질문에 진실하게 대답하며 사십시오.  풀리지 않던 인생의 질문들이 하나씩 풀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답하기 쉬운 것부터 수수께끼 같이 맞추기 어려운 것까지 다양한 질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대답하기 쉬운 질문으로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을 강조했습니다. 질문을 통해 책망하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17절부터 21절을 보면 “왜 빵이 없는 것을 두고 말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알지 못하고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해졌느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책망을 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등의 질문은 십자가와 복음의 핵심을 나타내는 질문이었습니다. 

 

대적자들의 교묘한 질문공세

 

예수님을 함정을 빠뜨리려는 대적자들도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대적자들이 예수님에게 여덟 번 공격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나오는데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두 질문으로 하셨습니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장 18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신랑이 함께 있는데 어떻게 결혼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들이 금식할 수 있느냐’고 대답하셨습니다. 또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질문했을 때’에는 ‘다윗이 배고플 때 그와 함께한 자들과 어떻게 했는지 너희가 읽어보지 못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외에도 ‘남자가 자기 아내와 이혼해도 좋은지에 대해 질문’하자 예수님은 ‘모세가 어떻게 하라고 명령했느냐’라고 하셨습니다.대적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교묘하게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일종의 트랩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시든지 올가미를 씌울 수 있는 구실을 만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질문을 하는 대적자들에게 교훈을 되는 진리의 질문을 던짐으로 그들의 질문을 피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악한 일을 위한 연합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거닐고 계시는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소?”(27~28절).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 당시의 권력자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가장 권세가 있었던 사람들이 어떤 일을 행했는지 보겠습니다. 그들은 악한 일을 하기 위해 연합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사두개인들로 구성된 혈통집단이고 두 번째 그룹은 대제사장이고 세 번째 그룹은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또한 각지파와 종족의 대표로 구성된 장로들이 당시  유대사회의 최고 권위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원의 중요한 멤버들이었습니다.여러분, 이들이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모였을 때 화합하고 서로를 존경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신학적인 이슈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이슈로 인해서 그들은 대립했습니다. 부활에 관한 이슈만 봐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늘 언쟁을 일삼았습니다. 그렇게 갈등하던 그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하나로 뭉쳤습니다. 악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 모인 역사상 가장 악한 정치적 연합이었습니다. 악한사람들은 대체로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평소에 싸우던 사람들과도 쉽게 연합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루려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다시 싸우는 자리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정치적 연합이요 권세자들의 악한 연합입니다. 이들은 악한 일에는 쉽게 연합하지만 선한 일에는 연합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망해가는 시기에도 이러한 현상이 일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선한 일에는 연합이 잘 안되고 누군가를 정죄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일에는  연합이 잘됩니다. 기도하고 이웃을 돌보고 섬기는 일에 참여하자면 잘 모이지 않던 사람들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서로 싸우는 일에는 열심히 연합하여 참여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가 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권위의 주인은 하나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 그리고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은 타락한 세상 권세에 중독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세가 가장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결정을 내리면 누구도 자신들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교만은 최종적인 결정권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교만은 모든 결정권이 지도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타락한 권세를 의지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타락한 권세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보다 뛰어나고 자기보다 인기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질투를 하고 그 사람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세상적인 권세를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의 배경과 백그라운드를 의지하고 과시합니다. 대제사장들은 신분을 의지했고 율법학자들은 지식을 의지했습니다. 장로들은 각 종족과 지파의 대표라는 혈통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적인 권세에 의지하면 진정한 권위는 사라지게 됩니다. 권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권세를 갖게 되면 악한 일을 하기 위해 연합한 무서운 권력이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 이기는 ‘하나님의 권세’

 

예수님이 십자가로 향하시면서 세상 권세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악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 연합한 이들이 예수님에게 ‘누구의 권세로 이러한 일을 하느냐’고 질문을 했는데 사실 이 질문은 자신들이 들었어야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질문을 하면서 권세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도전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권세에 사로잡혀 하늘의 권세를 가진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마치 이 장면은 군에서 사복을 입은 군사령관이 부대를 시찰하기 위해서 사복을 입고 나타났는데 초급 장교들이 사령관의 얼굴을 모르는 장교 계급장을 달고 있는 장교들이 사복을 입고 있는 군 사령관에게 무슨 권한으로 여기에 들어오는 왔냐고 추궁하며 야단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계급으로만 누군가를 평가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계급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누구보다 권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에는 권세가 있었고 그분의 행하심에서는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의 권세가 아니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나야합니다.  당시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장로들이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면 그 사람은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권세를 그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연합해 질문을 하면 예수님도 두려워 할 것이라고 상상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권세만을 의지하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여러분, 하나님의 권세를 의지하며 살면 세상의 권세가 두렵지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세를 의지하지 않고 살면 세상의 권세 앞에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권세를 의지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권세를 의지하십니까.

 

믿음,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 예수님이 대적자들의 교묘한 질문에서 벗어나면서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도 한 가지 물어보겠다. 대답해 보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느냐, 사람으로부터 왔느냐? 말해보라’”(29~30절).대적자들의 공격적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대적자들의 질문을 그냥 무시해도 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침묵해도 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대적자들의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없었지만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알까요. 그것은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대적자들과 논쟁하기 위해서 그들의 질문에 질문으로 답을 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진실되게 대답을 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두려워서 질문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지식이나 정보가 필요해서 질문을 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관계를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들도 회복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질문은 회복되기 원하는 하나님의 호소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베드로가 회복되기를 원하는 예수님의 외침입니다. 믿음생활은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을 해나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진실하게 대답하면 우리의 삶은 변화됩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질문에 답하는 사람은 이웃을 돌보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때때로 우리가 던진 질문에 하나님이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거나 인생의 문제가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아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에 모두 응답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던진 질문에 하나님이 모두 응답하시면 하나님이 천지를 주관하시고 삶을 주관하는 분이 아니라 질문을 한 우리가 주관자인 셈입니다. 하나님은 대부분의 경우에 대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우리에게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게 하는 질문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거의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욥이 연속되는 인생의 고난과 아픔을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일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질문에 대답할 것을 기대하지 말고 답을 스스로 찾으면 해결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의 질문을 들으면서 회개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회복을 가져오는 질문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을 듣고 그 질문에 응답해가면 회복의 길이 빨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를 모르고 대적하는 이들에게 질문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단순히 그들을 곤란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질문을 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무시하고 침묵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진실하게 대답했다면 진리를 깨닫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온 유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이유는 세례요한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역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낸 선지자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권세자들에 의해 세례요한의 죽임을 당할 때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가 죽임당하는 것을 이들은 방임했습니다. 자신들의 위치와 권세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하십시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며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늘로부터 왔다’라고 하면 저 사람이 ‘그러면 왜 요한을 믿지 않았느냐?’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으로부터 왔다’라고 할수도 없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진정한 예언자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백성들이 두려웠던 것입니다”(31~32절)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분명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증거 했기 때문에 그들이 만약 세례요한을 인정하고 정직하게 대답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를 알면서도 서로 의논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답을 몰라 의논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정답을 이야기 하지 않고 빠져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의논을 했습니다. 그들은 비겁하고 정직하지 못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정답을 알면서도 회피했습니다. 자신들의 권세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잘 모르겠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33절).그들은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놓쳐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그들을 전도한 것인데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대답했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는 길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면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을 얻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질문에 먼저 대답하십시오.

 

 질문에 날마다 대답하는 삶

 

오늘 메시지는 지난주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기도에 우리가 먼저 응답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메시지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던지는 많은 질문에 응답하지 않을까요. 과연 어떻게 하면 응답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질문에 우리가 먼저 대답하면 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권세다툼이 빈번합니다. 누구의 권세가 더 큰 권세인가를 두고 날마다 다툽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의 권세를 내세우기도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길이 열리지 않으면 하나님께 따지면서 질문을 합니다. 이외에도 고난당할 때 욥처럼 하나님 앞에서 불평하면서 질문을 합니다. 또한 자신의 기득권과 자신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는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 기도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권세를 가진 존재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질문에 하나님이 반드시 대답해야 하는 것처럼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에 반드시 대답해야할 의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권세자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주관자

 

 하나님이 우리의 주관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다스리는 분입니다.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에 모두 응답하실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질문에 날마다 대답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권세와 섭리 앞에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말씀을 통해 주시는 수많은 하나님의 질문에 정직하고 진실하게 응답해 가면 풀리지 않던 인생의 질문들이 하나씩 하나씩 풀리게 될 것입니다. 욥처럼 회복되는 역사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인생의 문제도 하나님의 권세와 섭리로 해결되는 응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축복의 삶, 이러한 믿음의 삶을 날마다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참으로 진실하고 참으로 공의로운 우리 주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연합한 이 세상의 권세자들의 악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회복의 길을 주시며 그들도 품기 원하시고 그들도 변화되기 원하셔서 그들에게 질문을 던져 주신 주님 이나라의 이민족의 모든 위정자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세상의 권세를 의지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도 이 세상의 권세가 삶의 목표가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시고이 세상의 권세를 두려워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시고 세상의 권세로부터 상처받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주권만을 의지하며 사는하나님의 백성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기자 one@onniri.org일러스트 박정일: meteorjip@nate.com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