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이 있다
요한복음 20장 24~29절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신약의 증거를 믿고,
부활을 증거하고, 순교했던 이들처럼 믿고, 순종하십시오.”
이재훈 목사
부활은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점점 신비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
니다. 이성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면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심지어 비난까지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견은 신비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별들의 신
비를 탐구하면서 천문학이 발전했습니다. 지구를 바라보면서 지층의 신비를 발견하고, 지
질학이 발전했습니다.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면서 생물학이 발전했습니다. 모두 신비에 대
한 인간의 도전과 응답이 과학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모든 신비를 해결했습니
까. 아닙니다. 여전히 신비로운 세상 아래 과학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신비
아래 이성이 있습니다. 신비를 찾아 헤매다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신비가 더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발견한 것은 신비 앞
에 너무나 작은 것이라는 겸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발견해준 진리를
외우거나 저장한 사람들은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외우고 머릿속에 집어넣
은 지식만이 전부라고 생각해서 신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만함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는 신비입니다. 의심의 존재자체는 하나
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주는 말없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우
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의심할 수 있는 능력까지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
험하지 못한 신비 앞에 의심이 생기는 것은 때로는 자연스러운 일이며, 진지한 모습의 결
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제자들이 한결 같
이 믿기 어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공포에 떨었고, 두려워했고,
그 경외감에 놀라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두려웠고, 의심했고, 당황스러워했습니
다. 이것은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거나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앞에서
우리는 당황하고, 불안하고,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주
셨을 때 그들은 확신에 이르게 되었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살았습니다. 심지어 순
교까지 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신약성서를 부인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제자들이 조작하고, 말을 만들고, 퍼뜨렸다고 주
장합니다. 그렇게 주장을 하려면 두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첫째, 부활을 착각하거나 부활을 조작한 당사자들이 자신들에 관해 기록할 때 한결 같이
“믿기 어려워했다”는 반응을 쓸 수 있을까요.
스스로 거짓말을 꾸며낸 것을 “자신들이 믿기 어려워했다”는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을까
요.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그런 것까지 계산해서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조작한 일을 합리화하고, 거짓을 지키기 위해 자
신의 생명을 내걸 수 있을까요. 두 번째 대답이 더 어렵습니다. 제자들이 거짓을 만들어놓
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내걸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면 십자가 앞에서 두려워하면서 예수님이 끌려가실 때 도망하였던 제자들이 3일 만에 정
신을 차리고, 의기투합했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
서는 두려워 도망했지만 예수님이 여러 번 말씀하신 것을 이루어 드려야 되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놓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하자. 그리고 그 거짓말을 지
키기 위해 우리가 죽자”고 결정할 수 있었을까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였던 ‘ 척 홀스’ 라는 사람이 닉슨 대통령 시대에 ‘ 워터게이트사
건’ 에 연루되어서 감옥에 갔습니다. 후에 그는 교도소사역을 하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자서전을 보면 워터게이트 사건 이면에 있었던 음모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국
최고의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 꾸며놓은 음모에 대해 FBI가 조사를 시작하자 2주를 버티
지 못했다고 합니다. 생명을 거는 문제도 아니었지만 그 거짓을 지키는데 2주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힘과 권세가 없던 제자들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을 지키
기 위해서 모두가 다 순교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진리와 진실을
위해서 죽을 수 있지만 거짓을 위해서는 죽을 수 없습니다.
17세기 뛰어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이 쓴 <팡세>라는 책은 유명한 묵상집입니
다. 거기에 나오는 글입니다.
“사도들이 악당들이었다는 가설은 정말로 불합리한 것이다. 예수님이 죽은 이후 열두
명의 제자들이 모여 그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다고 퍼뜨리자고 모의하게 되는 과정을 끝
까지 따라가며 상상해보라. 이것은 당시 모든 당국자들을 공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마음은 변덕과 변화와 뇌물에 약하다.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이러한 유혹으로 인해 혹은
투옥과 고문과 죽음의 가능성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했다면 그들은 완전히 실패
했을 것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유대지도자들의 압력에 무릎을 꿇었다면 오늘날 교회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완벽하게 거짓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천만에요. 있
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부활의 실제가 없었다면,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은 목숨을
걸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도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의심했습니다. 다른 제자
들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제자들과 함께 있
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소!’ 하고 말했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 내가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
어 보며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는 한 나는 믿을 수 없소’ 하고 말했습니다”
(24~25절).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예수님을 보았소”라고 말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섯 번
째 나타나신 시점입니다. 도마에게 나타난 것이 여섯 번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막
달라 마리아와 여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베드로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시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제자들이 함께 모였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도마에게
나타나신 것이 여섯 번째입니다. 도마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 다섯 번이나
증거되었음에도 그는 믿지 못했습니다. 자기 손으로 만져보고,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않
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의심은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고 기질에서 나오는 것입
니다. 매사에 부정적인 면을 크게 보고, 매사에 어두운 면을 보고, 매사에 삐딱하게 보는
DNA가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진지한 과학적 질문과 합리적인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만약 부활이 사실이 아니
라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당시 존재했던 문서들이 존
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버렸을 것입니다. 거짓으로 꾸며진 진리가 이렇게 오랫
동안 존재할 수 없습니다. 1, 2세기에 만들어진 거짓으로 꾸며진 문서들이 지금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6.25전쟁에 대해서, 일제강점기에 대한 거짓기록을 써서 사람들에게
돌리면 받아줄까요. 생존자들이 있고, 증언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받아주지 않습니다. 역사
는 냉정합니다. 아무거나 남겨주지 않습니다. 사실만이 직속됩니다. 합리적인 의심과 정당
한 질문을 던지면 해답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마의 태도가 어떻습니까. 도마는 자신의 감
각을 믿고, 자신의 눈을 믿고, 자신의 손가락을 믿겠다고 했습니다. 다섯 번에 걸쳐서 예
수님이 나타나신 것을 본 사람들의 증언을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기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런 의심이 아니라 불순종과 죄악과 악의 습관 속에 사로잡힌 의
심입니다. 도마의 기질이 잘 나타나는 것이 요한복음 11장 15절입니다. 나사로가 죽어가
고 있을 때 예수님이 가겠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말렸습니다. 제자들이 가시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데도 예수님이 가겠다고 하니까 도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이 말이 용기 있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굉장히 회의적인 말입니다. 도마
는 어두운 사람입니다. “그냥 우리도 같이 죽어버리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회의주의
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고, 진지한 의심을 통해 신비를 탐구하는 하나님이 주신 밝
은 면이 아닙니다. 매사에 의심을 하고, 모든 것을 평가하는 회의주의적인 사람입니다. 불
순종의 모습입니다.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모순
여러분, 이 세상에 깔려 있는 사상의 밑바닥에는 회의주의가 있습니다. 증거를 보고 판단
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고 증거를 요구합니다. 믿지 않으려는 의심으로 가득 차 있
으면 아무리 증거를 가져다 줘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만진 것만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나이아가라폭포는
가보지도 않고 믿습니다. 소크라테스와 악수해 보지 않고도 믿습니다. 여러분, 소크라테
스의 책은 사본입니다. 원본은 없습니다. 그 사본이 천년 이상 지난 다음에 발견되었습니
다. 그것을 진짜 소크라테스가 썼는지 안 썼는지 어떻게 압니까. 천년 이후에 발견된 것
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믿습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
사본이 50년에서 150년 사이입니다. 학문적으로 사본의 기간이 짧을수록 진정성이 있습
니다. 어느 것을 더 믿어야합니까. 소크라테스가 쓴 사본은 실제라고 믿고, 신약성경은
실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의심이 아니라 안 믿으려고 발버둥치는 못
된 성격에서 나오는 의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신약의 증거를 믿고, 부활을 증거하고, 순교했던 이들처럼 믿고, 순종하십시오.”
유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말을 ‘ 의심’ 으로 바꿔야 합니다. 뭐든지 그대로 믿지
말고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학처럼 모든 것이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것은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이런 사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 정
말 우리가 경험한 것만 믿을 수 있습니까. 과학자들이 연구를 할 때 가설을 세웁니다. 가설을 세우고 연구하고 실험을 합니다. 가설을 세울 때 어느 정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조금도 가능성이 없는 것을 가설로 세워놓고, 실험을 하는 과학자는 없습니다. 다 증명되고 가설을 세웁니까. 아닙니다. 일단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시작합니다. 가설을 세울 때는 믿
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발견도 신비로운 세상에 대해서 믿음으로 두들기며 발견하는 것입니다. 다 증명된 것만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운동을 할 때도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바퀴가 두 개가 달린 기구가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다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자전거를 못 탑니다. 불신이 있는 사람은 절대 탈 수 없습니다. 물에서 허
우적거리거나 수영을 못 배우는 사람은 물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빠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수영을 합니다. 그 믿음이 없기 때문에 계속 발버둥 치면서 더 빠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물에 자신을 맡길 수 있습니다.
그때 움직이면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우연이라고 밖에 설명하지 못하면서 부활에 관해서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도마를 만나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의심하는 도마를 온유하게 만나주십니다.
“8일 후에 예수의 제자들이 다시 그 집에 모였고 도마도 그들과 함께 거기 있었습니다. 문이 잠겨 있었는데 예수께서 들어와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에게 평
강이 있을지어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사
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돼라’ ”(26~27절).
흥미로운 사실들이 발견됩니다. 문이 닫혀 있는데 예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초자연적인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내 옆구리를 만져보고 내 손을 만져보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있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새로운 몸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처음에는 예수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전에는 이사야 53장처럼 볼품없고, 사람들이 흠모하는 것이 없을 만큼 멋진 얼굴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영광스런 예수님의 모습은 광채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십자가의 상처가 없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몸에는 상처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님의 몸에 상처가 있다는 것은 그 상처를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 상처를 다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지만 상처를 남겨두셨습니다. 도
마처럼 회의적이고, 의심하고, 자신의 눈으로 보고, 만진 것만 믿는 자들을 위해서 상처를 남겨두셨습니다. 도마에게만 보여주고 완전히 사라지게 했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게는 지금도 그 상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보고 알게 될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복되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어라.” 그때 도마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기질 속에, 성격 속
에 숨어있는 깊은 회의가 이제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의심을 받아주시고,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온유하신 예수님입니까. 그리고 한 말씀 더 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사람은 복이 있다’ ”(29절).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지금은 승천하셨기 때문에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육체로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꿈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환상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로 계신 예수님을 만질 수 없습니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볼 수 없지만, 만질 수 없지만,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자는 도마보다 훨씬 복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의심을 통해 믿음에 이르게 되지 않습니다. 앎을 통해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도 믿는 사람의 축복에 대해서 유대인 랍비 ‘ 시몬 벤 락큐’ 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교도에서 개종한 사람들은 시내산에서 있었던 유대인들보다 더 귀한 존재이다. 유대인들은 천둥과 불꽃과 번개와 요동하는 산과 나팔소리를 목격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중 아무것도 보지 못한 이들은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다. 이보다 더 귀한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베드로도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을 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자신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만지고, 함께 자고, 동고동락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의심하고, 십자가 앞에서 도망하였지만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지도 못했음에도 불구
하고, 만져보지도 못했지만 믿고, 순종하고, 배반하지 않고, 순교하는 이들을 보며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복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신약의 증거를 믿고, 부활을 증거하고, 순교하기까지 의지했던 이들처럼 보지 않고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이소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