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과 전통
사도행전 21장 17~31절
이재훈 목사
“정통으로 전통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전통이 정통을 무너뜨리게 될 것입니다.”
발음이 비슷하지만 그 의미가 전혀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인 ‘ 정통과 전통’ 입니다. 정통은 언제나 옳은 것입니다.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어 변하지 않고, 타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판단의 기준이 되고, 표준이 되는 가치입니다. 전통은 오랜 시간 전속되어 가치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대개는 옳은 것이었기 때문에 지속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옳지 않은 가치도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힘을 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은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공존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잘 분별하지 못할 때 갈등과 충돌을 겪게 됩니다. 계속 전속시켜야 될 옳은 전통까지도 과거의 것이라고 생각해서 버리라고 하는 경우 갈등이 생깁니다. 변화지상주의는 옛 것은 모두 잘못되었고, 전통은 틀린 것이라고 생각해서 변화만을 추구하려다 그 사회와 갈등하게 됩니다. 또한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변화되어야 하고, 변화될 수 있는 전통을 옳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주의’ 도 갈등을 유발합니다. 이 두 가지 흐름이 사회뿐만이 아니라 교회에도 존재합니다.
정통성 있는, 정통성을 상실한
예수님이 유대사회에 오셨을 때 부딪힌 많은 도전들은 정통을 떠나있거나 전통에 매여 있는 유대인들의 문제였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그 대표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바리세인들과 당시 율법학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문제를 제기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도전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해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위선자들에 대해 이사야가 예언한 말이 옳았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됐다. ‘이 백성들은 입술로만 나를 공경하고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 사람의 훈계를 교리인 양 가르치고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만 붙들고 있구나’ ”(막 7:5).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더러운 손으로 음식 먹는 것을 보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청결하고 좋은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왜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깨끗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전통은 단순한 청결 복원의 차원을 뛰어넘어서 손 씻는 행위를 하나님의 계명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손 씻을 물이 없으면 때로는 더러운 손으로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손을 씻지 않으면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면서 손 씻는 일을 하나님의 계명 수준으로 올려놓은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제기한 문제에 더해서 한 가지 문제를 더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는 너희만의 전통을 지킨다는 구실로 그럴듯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제쳐 두고 있다! 모세는 ‘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고 했고 ‘누구든지 자기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드리려던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됐다’ 라고 하면 그만이라면서 너희 부모를 더 이상 봉양하지 않으니 너희는 전통을 핑계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 또 너희가 많은 일들을 이런 식으로 행하고 있다’ ”(막 7:9~13).
예수님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 고르반’ 이라는 전통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이 되었으면 부모를 봉양하지 않아도 된다는 전통이 바리새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 부모를 공경하라’ 고 했습니다. 그 계명이 십계명에 있습니다. 정통성이 있는 말씀이 있고, 정통성을 상실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까요. 정통성이 남아 있는 말씀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어느 시대, 어느 문화, 어떤 민족에게도 동일하게 정통성이 있습니다. 정통성을 잃어버린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모두 성취됨으로써 구약의 시대에는 적용되었지만 신약의 시대와 오늘날 사람들은 지킬 필요가 없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잘 구별해서 이 시대에 적용해야 합니다. 구약시대 제사 제도를 오늘이 시대에 그대로 지켜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정통이 아닙니다. 전통 속에 담긴 정통을 찾아서 의미와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떻습니까. 구약시대와 가까운 시대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 드릴 것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 되었다면 부모를 공양하지 않아도 된다며 불효를 종교적으로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고르반이 되었다는 것은 부모님을 공양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너뜨리는 전통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전통을 십계명 말씀 앞에서 점검해봐야 합니다. 만약 십계명의 정통에 합당하지 않으면 바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 이유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고난을 받게 되는 것도 정통을 잃어버린 전통에 빠져있는 유대인들 때문입니다. 그들 때문에 사도바울이 고난 받고, 로마에 압송되고, 수많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동족에게 배척받고, 이유 없이 체포되고, 투옥되었습니다. 부당하게 고소되고, 거짓증인들이 허위진술을 했습니다. 법정에서 죽이라고 외치는 폭도들이 등장했습니다. 다섯 번에 걸친 재판을 받았고 예수님과 동일하게 세 번씩이나 법정에서 무죄라고 선포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죽일 만한 죄를 찾지 못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의 관리들이 세 번씩이나 무죄를 선언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이 전통에 눈이 가려져서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고, 무고한 예수님과 사도들을 박해하였는데, 로마당국은 객관적으로 옳고 그름을 공명정대하게 법적으로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사도들을 보호하는 일들을 하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례를 보면 치안관들이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투옥한 것을 사과하고 풀어주었습니다. 고린도에서도 총독 갈리오가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것을 기각시켰습니다. 에베소에서는 서기장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돌려보낸 것입니다. 전통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죽여야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정통입니다. 그 뜻을 전하는 이들을 정통을 떠난 전통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해치려고하는 일들이 사도행전에서 나타납니다. 이것 때문에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만류했습니다. 두로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강권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장차 고난이 있을 것을 알았기에 사도 바울에게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이사랴에서는 선지자가 바울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로마당국에 넘겨져서 호송당할 것도 예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예언을 듣고도 그 길은 피할 길이 아니라 가야할 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비록 고통을 받을 지라도 그 과정을 통해서 복음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장차 예루살렘에서 어떤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전통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이 자신을 어렵게 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생겨난 전통, 정통을 상실한 죽은 전통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고통스럽게 할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고통을 감당하면서까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전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힘들다고 그들을 피해버리면, 그들은 전통에 빠져있다는 것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가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면 사도행전은 20장에서 끝났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28장까지 이어지면서 전통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어떤 모습이 잘못되었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정통성이 있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신 분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야고보와 지도자들이 환영해 주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짐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지도자들이 사도바울에게 심각한 이야기들을 해줬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배신자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믿는 유대인들이 수만 명이나 되는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율법도 동일하게 존중하고 있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비울이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할례도 행할 필요가 없고, 모세의 원수처럼 행하고 있다는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모세를 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전파하고,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을 지키는 일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 것은 사실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는데 있어서 유대인처럼 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 율법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라, 모세의 원수처럼 행하라고 가르친 적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모세를 버리라고 가르쳤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과장된 것이고, 잘못된 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것은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케 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한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아주 미묘한 차이처럼 느껴지지만 엄청난 차이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폄하했습니까. 율법을 무너뜨렸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전한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뼈 속 깊이 스며들어 있는 전통을 지킨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전통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까지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그 전통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사례가 사도행전 16장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전도하고,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받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한 이유는 디모데의 어머니가 유대인이고,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으면 장차 유대인들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 전도를 위해 할례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나름대로 전통을 존중하면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선한 의도로 할례를 받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선교적이고, 매우 지혜로운 일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정통성이 없는 전통을 지키느라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고, 유대인들에게는 그들 뼛속 깊이 뿌리내린 전통을 무시함으로 관계가 깨어져서 복음을 듣지 못하는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 대해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됐습니다. 이는 내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유대 사람처럼 된 것은 유대 사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나 자신이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된 것은 그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떠난 사람이 아니지만 율법 없는 사람들에게 율법 없는 사람처럼 된 것은 그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에게 내가 연약한 사람처럼 된 것은 연약한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어떻게든지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함입니다”(고전 9:19~22).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교제하고, 신앙을 지키면서도 믿지 않은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합니다. 유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더 얻기 위해서입니다. 율법 없는 사람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처럼 되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된다는 것은 카멜레온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중적인 삶을 산다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자유를 사랑을 위해 쓴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로마서에도 나옵니다. 로마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방인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나눠 먹기 위해 갖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은 우상에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꺼림칙해서 “이거 먹으면 안 되지. 이건 우상에게 바쳐진 것인데 내가 먹으면 우상숭배를 하는 것처럼 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해서 먹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우상이란 존재하지 않는 건데. 먹으면 다 건강에 도움이 되고 소득에도 도움이 되지. 감사하지”하며 먹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믿음이 강합니까. 음식을 먹는 사람입니다. 먹지 않는 사람은 먹을 때 마음에 걸리기 때문에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
더라도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으면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원리가 고린도전서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지도자들이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당신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전에는 나실인 서원을 했지만 돈이 없어서 정결의식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신이 함께 참여하고 그들의 비용을 대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존중하는 당신을 보고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통을 존중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라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와 과장이 가득한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고난 속에 집어넣고야 말았습니다. 누군가 사도 바울이 이방들과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고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고 추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의 전통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인데 전통을 어기면서까지 소요를 일으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과는 다른 소문이 계속 퍼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의도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 과장, 추측, 편견, 잘못된 전통이 사도 바울을 고난 속에 던져버렸습니다.
여러분, 전통은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계를 넘어 무조건 옳은 것이 되어 정통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면 그 전통은 사람을 해치는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말씀보다 중요하게 여긴 것처럼 오늘 이 시대 교회의 전통이 정통성 있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권위 있게 여겨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회법이 더 중요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절차가 중요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개인이 오랫동안 경험했던 전통이 중요하게 되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이러한 모순적인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하며, 편안한 만족감에 빠지고, 심지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조차도 고르반이라는 전통으로 무너뜨렸던 그 시대처럼 성령의 역사하심과 말씀의 권위에 관심이 없고, 오랜 교회 전통만을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한다면 지적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정통이 살아 있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사도행전처럼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고, 도전하고, 변화해야 합니다. 정통으로 전통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전통이 정통을 무너뜨리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그런 모습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정통으로 전통을 개혁하고 변화해 가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이소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