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 순교비에 서린 선구자들의 눈물과 신앙
순교비에 서린 선구자들의 눈물과 신앙
시즈오카는 일본 역사와 기독교 순교의 현장



일본의 상징 후지산, 끝없이 펼쳐진 녹차밭, 일본 3대 국민 애니메이션 중 하나인 ‘치비마루코짱’의 무대, 스시의 화룡점정(畵龍點睛) 와사비, 사시미(회)의 꽃 오토로(참치 뱃살)… 우리가 일본하면 떠올리는 이 모든 것들이 ‘시즈오카(静岡)’의 작품들이다.
사실 우리에게 시즈오카는 생소하지만 일본에서는 1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시즈오카는 역사적, 신앙적으로도 그 의미가 깊다. 시즈오카는 100년 동안 이어져온 전국시대를 종결하고 에도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고난과 인내, 욕망이 숨겨져 있는 곳이다. 대장군 이에야스의 명을 따르지 않고 유배된 조선인 성녀 ‘오타 줄리아’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고장 ‘시즈오카’
시즈오카역 광장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상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어린 시절, 다른 하나는 40대 후반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시즈오카 시내에는 총 세 개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상이 있다. 두 개는 시즈오카역, 하나는 슨푸성공원에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더불어 일본의 3대 명장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국시대를 종결짓고 에도막부를 창설한 이후 메이지유신이 단행되기까지 약 260년 동안 일본의 평화와 문화 부흥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시즈오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75년 인생 중 43년을 시즈오카에서 지냈다. 어린 시절 슨푸(시즈오카의 옛 지명)에서 인질생활을 했고, 미카타하라 전투에서 대패하고 16년 동안 몸을 피해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도요토미가 죽고 정권을 잡은 후에는 쇼군(장군)의 지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교토, 오사카, 에도(지금의 도쿄)의 중간 지점인 시즈오카에 자리잡고 막강한 정치 영향력을 행사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죽어서도 시즈오카를 떠나지 않았다. 시즈오카에 있는 ‘구노산 도쇼구(東照宮)’라는 신사에 그의 유해가 있다.
슨푸성공원은 시즈오카 번화가에 있는데 성터 유적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상이 아니었다면 그냥 밋밋한 공원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한산하고 특징적인 것이 없다. 오히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년 동안 몸을 사리며 인고했던 하마마쓰성(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묻혔다는 구노산 도쇼구에는 평일인데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참배하러 오고 있었다. 참배객들은 하나같이 상자에 동전을 넣고, 박수를 세 번 치며 기도했다. 그들은 400년 전 죽은 이에게 도대체 무엇을 빌고 있을까?
“지상의 왕을 위해
하늘의 왕을 불편하게 할 수 없다”
“불타라 여름의 십자가 남쪽하늘 높이
밤의 어둠을 비추는 별은 눈물의 상들리에”
일본 국민 밴드 ‘서던올스타스’(Southern All Stars)의 ‘꿈으로 사라진 줄리아’라는 노래가사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줄리아는 실존 인물이다. 주인공은 크리스천 다이묘(영주,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양녀 ‘오타 줄리아’다. 오타 줄리아는 조선인이다. 임진왜란 당시 세 살배기 아기가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뒤 고니시 유키나가의 양녀가 되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고니시는 조선인 양딸에게 줄리아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오타 줄리아는 양아버지 고니시처럼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성장했다.
시련은 갑자기 찾아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고 반대파인 고니시를 처형한 것. 고니시가 죽은 이후 오타 줄리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어 슨푸성에서 기거하게 됐다. 시녀가 된 오타 줄리아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성경을 읽고 기도했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눈을 피해 크리스천 석등(외형은 봉양탑)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오타 줄리아는 총명하고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오타 줄리아를 마음에 들어 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측실이 될 것과 종교를 버릴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오타 줄리아는 거부했다.
“지상의 왕을 위해 하늘의 왕을 불편하게 할 수 없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뜻을 거부한 오타 줄리아를 멀리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섬(고즈시마, 神津島)으로 유배를 보냈다. 오타 줄리아는 유배지에서도 신앙을 놓지 않았다. 고니시 가(家)에서 배운 약학 지식을 살려 환자를 간호하면서 복음을 전하다 생을 마쳤다(이에야스 사후 유배에서 풀려나 일본 본토에서 생활했다는 설도 있다).
슨푸성공원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호다이인’이라는 작은 절이 있다. 그 곳에 작은 석등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타 줄리아가 기도하던 기리시탄(크리스천의 일본식 발음) 석등이다. 그 석등 앞에서 잠시 줄리아를 상상해 보았다. 어린 나이 전쟁을 겪고, 포로로 끌려가 적장의 딸이 되었다. 양부의 보살핌도 잠시, 가문이 몰락하고 원수의 시녀로 전락했다. 설상가상 배교와 측실이 되라는 압박까지 받았다. 작고 힘없는 외국인 소녀가 무슨 힘으로 그 험난한 세월을 버틸 수 있었을까? 신앙이 아니고서는 결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최고 권력자에게 반기를 든 그녀의 용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작고 초라한 순교비의 의미
시즈오카역에서 아베가와행 버스를 타고 약 10분쯤 가면 ‘아베강변’이 나온다. 이곳에서 기리시탄들이 처형을 당했다. 1612년 기리시탄 금교령을 발표한 도쿠가와 막부는 오타 줄리아를 포함한 기리시탄 무사와 여종을 슨푸에서 추방하고 교회를 파괴했다. 그들의 순교비에는 “1614년 마을 내 중요한 기리스탄 8명을 체포, 그 중 6명의 이마에 뜨거운 철 십자가 화인을 찍어 마을을 돌게 한 후 정념사(아베강 근처)에 도착했다. 양 손가락과 다리 힘줄이 잘린 그들은 방치된 채 숨을 거두었고, 슨푸 기리시탄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적혀져 있다.
순교비는 초라해도 너무 초라했다. 노인 요양시설 주차장 한편에 덩그러니 서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일부러 그곳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들르지 않는 이상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작은 비석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이 초라한 순교비의 의미가 결코 작거나 볼품없지 않다. 전국시대의 혼란에 종점을 찍고 일본에 평화를 가져온 도쿠가와 막부의 빛나는 치세 아래에는 수많은 크리스천의 피와 눈물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놓고 간 예쁜 꽃다발을 보며 고통 속에 죽었을 기리시탄 선구자들의 넋을 위로했다.
시즈오카는 그 이름 그대로 참으로 고요한 도시다. 자동차 경적 소리 한번 들리지 않았다. 시즈오카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는 후지산의 절경을 딱 한 번밖에 못 본 것이 몹시 아쉽다. 후지산의 설경은 감동 그 자체였다. 후지산 중턱이 안개와 구름으로 가려져 하늘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만년설 쌓인 후지산 정상은 장관이었다. 유명한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가 연상될 정도로 신비롭기까지 했다. 녹차는 또 얼마나 향긋하고 그윽한지 모른다. 시즈오카의 고요하고 신비로운 매력에 담뿍 젖어들 수밖에 없었다. 시즈오카는 일본 역사와 기독교 순교의 현장이다. 시즈오카에서 울려 퍼진 러브소나타가 뜻 깊은 이유다.
시즈오카 러브소나타 실행위원장 스리야사노 목사는 “시즈오카 러브소나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어서까지 영적으로 묶은 우상숭배의 흐름을 깨뜨리는 중요한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