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누리 미디어 커뮤니케이터 아카데미 1주 - 성경적 언론과 뉴스 / 이인용 장로

이인용 장로
하나님께서는 ‘겸손’과 ‘정직’을 요구하십니다.
‘제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맡기셔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하고 있습니다’하는 태도입니다.
크리스천 미디어 커뮤니케이터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가벼운 농담과 함께 강의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계속 생각해봐야할 과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조지 부시 미국 제43대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킬 당시였습니다. 당시 국무장관인 콜린 파월과 부시 대통령이 워싱턴 시내에 있는 조그만 바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시민이 지나가다 두 사람이 바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다가왔습니다. 그는 다가가서 “두 분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세계 제3차 대전을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시민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우선 우리는 이라크에 있는 천만 명의 이라크인과 세계에서 미소가 가장 아름다운 금발 미녀를 죽일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시민은 이 이야기를 듣고 더욱 놀랐습니다. 그는 왜 금발 미녀까지 죽이는 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때 조지 부시 대통령이 콜린 파월의 어깨를 치며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천만 명의 이라크인을 죽이는 데에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했지?”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조크에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조지 부시 대통령은 강경파고 콜린 파월은 온경파입니다. 천만 명의 이라크 사람들이 죽게 되면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 하는 이야기를 했을 때 부시 대통령은 천만 명의 이라크 국민이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민이 물어봤을 때, 금발 미녀를 죽인다는 이야기를 살짝 더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시민은 전쟁이 발발할 때 국민이 죽는다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는데 미소가 가장 아름다운 금발 여인을 죽인다고 했을 때에는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뒷말을 앞에 살짝 얹음으로써 관심을 돌린 것입니다. 이것을 ‘메시지에 스핀을 건다’, ‘왜곡한다’고 말합니다. 의도적으로 한마디를 덧붙이면서 핵심적인 메시지에 대한 이해를 흐려버리는 것입니다. 이 조크가 사실이라면 부시 대통령은 천재적인 커뮤니케이터입니다. 제가 이 농담을 던진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현상을 생각할 때,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과 함께 이 조크가 담고 있는 함의가 무엇인지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미디어의 본질과 직업으로서의 언론
제가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미디어의 수는 몇 개일까요?” 짐작해 보십시오.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약 4,700만 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정답에 가깝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국민 한 사람이 미디어가 된다는 것입니다. 미디어 환경이 급변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미디어라고 하면 신문을 떠올렸습니다. 기자라고 해도 신문기자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개인 한 사람이 미디어가 되는 퍼스널 미디어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를 운영합니다. 미디어의 영향을 능가하는 파워블로거, 트위터리안도 있습니다. 한 개인의 팔로워가 100만이 넘기도 합니다. 그가 어떤 한 메시지를 올리면 백만 명이 청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디어의 환경은 급변하지만 미디어의 가치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미디어의 본질, 미디어의 기본적인 가치는 무엇일까요? 학문 중에 인류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들은 수백 수천 년도 더 이전에 인간의 삶의 모습을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외딴 부족이나 남태평양 섬에 가면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수천 년 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부족들이 있습니다. 인류학자들은 그 속에 뛰어들어 생활방식, 가치, 가족관계 등을 조사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조사하는 내용 중에는 미디어현상에 관한 것도 있었습니다. 인류학자들이 미디어와 미디어가 전하는 뉴스에 대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아프리카의 고립된 부족 사회에서 태평양의 외진 섬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뉴스가 무엇인가에 대해 본질적으로 똑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한 삶을 유지해가는 원시부족민들도 뉴스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도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재빨리 달려가 정보를 정확히 수집하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해줄 사람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알려고 하는 ‘정보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의 제도화된 언론은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재빨리 달려가 정보를 정확하게 수집하고 전달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직업으로서의 언론은 어떤 것일까요.
인간은 정보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론은 이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언론이 보여주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CGNTV의 조정민 목사님은 8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갖고 있는데 목사님의 트위터에 보면 “안 보면 세상을 알 수 없고, 보면 세상을 잘못 알게 되고... 이것이 미디어 세상의 딜레마입니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굉장히 핵심을 찌르는 말입니다.
각 언론사에는 사시(회사가 추구하는 가치)가 있는데 그 안에는 공통적으로 ‘진실 추구’라는 것이 있습니다. 언론은 진실을 추구하지만 진실은 인간 앞에 그 사실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언론은 진실을 위해 눈에 보이는 사실의 조각을 수집하고 그 조각으로 관계망을 짜고 재구성하는 일을 합니다. 이것을 사실의 재구성이라고 합니다. 그 재구성된 현실이 우리가 보는 뉴스입니다. 재구성이라고 하는 개념은 우리가 언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먼저 언론이 사실을 재구성하는 과정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언론이 사실을 선택해서 재구성하는 과정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하는가’ 입니다. 무엇이 우리가 세상을 보는 의식과 태도에 영향을 미칩니까. 저는 언론이 세상을 재구성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큰 요소를 외부적 요소와 내부적 요소로 나누겠습니다.
외부적인 요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는 권력입니다. 흔히 언론은 권력을 비판하는 기능, 감시하는 기능, 견제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 권력은 힘을 갖습니다. 그 힘으로 언론을 통해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권력은 내 모습이 이왕이면 좋게 비춰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못쓰게 하려고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권력의 속성입니다. 둘째는 사회적인 분위기입니다. 기자가 기사를 쓸 때에는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습니다. 사회의 분위기가 일반적으로 공격적인 분위기라면 기자는 위축됩니다. 사회적 분위기는 기자들이 세상을 읽고 판단하는데 영향을 미칩니다. 세 번째는 자본입니다. 광고주를 말하기도 합니다. 언론에서는 광고가 기업의 수입원입니다. 광고주는 언론의 세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세 가지가 외부요인입니다.
문제는 내부적인 요인입니다. 내부요인은 기자 자신을 말합니다. 조금 확대하면 언론사를 말합니다. 언론사와 그 안에 있는 기자의 가치관, 이데올로기적 생각, 역사관에 따라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 신자와 불교 신자가 이번에 일어난 조계종 사건에 대해 보는 눈이 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저는 내부요인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외부요인은 드러난 문제입니다. 그러나 내부요인은 드러나 있지 않은 요인이기 때문에 이 부분이 정말 문제가 됩니다.
인간 인식과 커뮤니케이션의 한계
우리는 한 사건을 보고도 말이 다른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객관적으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우리 마음대로 보게 됩니다. 내 마음대로 보고 듣고 생각합니다. 실제 고대부터 역사가와 사상가들은 인간의 이런 ‘인식의 한계’를 지적해왔습니다.
기원전 5세기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서문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저는 이것을 읽으며 기원전 5세기 글쓴이와 저와 무엇이 다른가 생각했습니다. “나는 나에게만 일어난 이야기를 쓰지 않고 나 자신의 일반적인 인상에 이끌려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또, 가능한 한 철저히 사건 현장에도 직접 가 보았다. 그렇게 했는데도 진실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똑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목격자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어느 한쪽이나 다른 쪽에 서서 편파적으로 이야기하거나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해 이야기한다.” 이것이 2500년 전에 역사가가 쓴 글입니다. 저는 이 글은 21세기의 기자가 쓴 글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책을 쓰면서 역사가가 자기 자신의 한계를 토론했는데 문명이 발달한 우리는 투키디데스보다는 나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자들이 사건현장에 가보면 똑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건현장에서 목격자를 만나면 목격자 A와 B와 C와 D의 이야기가 다 다릅니다. 성경에서도 인간 인식의 한계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있던 일입니다. 모세가 열두 명의 정탐꾼을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했는데 결과는 여호수아와 갈렙과 나머지 열 명의 정탐보고가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올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그러고는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들이 살펴보고 온 땅에 관해 좋지 못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온 그 땅은 거기 사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땅입니다. 우리가 거기서 본 사람들은 모두 신장이 컸습니다. 우리가 거기서 네피림, 곧 네피림에게서 나온 아낙 자손들을 보았습니다. 우리 눈에도 우리가 메뚜기처럼 보였으니 그들 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민 13:31~33).
“그때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들을 진정시키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올라가 그 땅을 점령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민 13:30).
열두 명은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소리를 합니다. 나의 사물 인식, 커뮤니케이션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나’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나’와 나머지 열 명의 ‘나’가 서로 다른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BC 6~7세기) 제나라 환공과 윤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진 군주로 알려진 제나라 환공이 어느 날 조용히 누각에 앉아 옛 성현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밑에서 수레바퀴를 닦던 윤편이라는 사람이 환공에게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환공은 옛 성현의 글을 읽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현은 살아있습니까? 죽었습니까?” “돌아가셨지”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옛사람의 껍데기를 읽고 계신거로군요” 이 말을 듣자 환공은 천한 직업을 가진 윤편이라는 자가 군주인 자신을 조롱한다고 생각해 화를 냈습니다. “네 놈이 한 말이 방자하기 짝이 없다. 만약 네가 한 말의 뜻을 내게 올바로 이해시킨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전하, 저는 제가 살아온 과정을 보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저는 수레바퀴를 닦고 축을 끼울 때 축을 끼우는 구멍을 파는데 이 구멍은 조금만 느슨해도 축이 빠집니다. 조금만 조이면 축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구멍을 딱 맞게 깎는 것은 제 손의 감각만이 압니다. 이것은 전하께 설명해드릴 수 없고 제 자식에게도 알려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옛 성현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해도 이와 같은 이치겠지요”
이 질문은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이 이야기는 ‘언어라는 것이 뜻을 제대로 전달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언어는 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이른바 ‘언불진의’라고 인식되어 왔습니다. 언어가 뜻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마음을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언불진의 앞에 또 하나가 있습니다. ‘서불진언’이라는 것입니다. 글은 말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불진언 언불진의’ 이것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1917년에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무산계급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러시아가 인류 최초 공산주의 체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모스크바에는 미국 주요 언론의 특파원들이 있었습니다. 특파원이라는 건 그 나라 현장에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있는지 보고 각 나라에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당시 미국 언론사 특파원들이 러시아에서 짜르(전제정치)가 무너지고 공산주의 과정이 들어서는 그 과정의 현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알리지 못했습니다. 원래는 한두 달 전에 미리 보고 기사를 내서 알려야 하는데 미국 독자들은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 자기반성이 일어났습니다. 20세기 미국의 언론인 월터 리프만은 “미국 언론이 러시아 혁명에 관해 정확한 실상을 전달하는데 실패한 것은 무엇이 실제 일어났는지를 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기가 막힌 정의입니다. 이것은 아까 말씀 드린 투키디데스의 고백과도 닮아 있고 조정민 목사님의 트윗과도 닮아 있고 여호수아와 갈렙과 열 명의 정탐꾼과도 닮아있습니다.
21세기의 대한민국 언론은 어떠할까요. 저는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이것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보면 ‘언론의 포퓰리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정치권을 비판할 때 포퓰리즘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포퓰리즘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월터 리프만의 이야기를 보면 미국도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았다는 합니다.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게 가면 언론도 거기에서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사회의 분위기가 보는 눈을 규정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직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
인간은 왜 이렇게 커뮤니케이션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최초의 인간부터 그랬습니다. 이것을 알게 되니 20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며 묵었던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동산의 각종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 2:16~17).
“그러나 하나님께서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말고 건드리지도 마라’고 말씀하셨다”(창 3:3).
이 두 말씀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하와에게 들어온 메시지는 ‘먹지 마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였는데 하와의 입에서 나갈 때는 ‘먹지도 건드리지도 마라’, ‘죽지 않으려거든’으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에 굉장히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두 부분이 말이 바뀌는데 패턴은 반대입니다. ‘먹지 마라’는 것은 ‘먹지도 건드리지도 마라’는 식으로 과장이 됩니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죽지 않으려거든’으로 약화되었습니다. 하나는 과장이 되었는데 다른 하나는 약화되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하와는 이미 자기에게 들어온 메시지의 금지의 영역을 지키고 싶은 생각이 많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유혹에 절반 이상 넘어온 상태에서 이야기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지키고 싶지 않은 금지명령은 그 금지명령이 부당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집니다. 부당성을 강조함으로써 내가 지키지 않는 정당성을 확보하고 싶은 심리적 욕구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와만의 문제일까요? 저는 이것을 묵상하며 나 자신의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인류 최초의 커뮤니케이션의 왜곡이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인간이 이런 커뮤니케이션의 왜곡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이 왜곡이 있고 나서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이 커뮤니케이션의 왜곡은 인간의 범죄를 있게 한 범죄입니다. 범죄 중에 큰 범죄인 것입니다.
여기까지 왔으면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계보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가치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있게 하는 기본 가치는 언론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언론의 자유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함께 이야기해야 할 것이 바로 책임의 문제입니다.
지금은 이 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언론, 미디어는 대상을 판단하고 규정합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제가 기자생활을 할 때 우쭐해졌던 적이 있습니다. 1987년 당시 입사 6년차에 정치부 기자였는데 당시 평민당 총재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자주 만났습니다. 그 당시 제가 평민당을 출입할 때는 기자가 지금처럼 많지 않아서 매일 아침 7시에 동교동 자택에 가면 다섯 명 정도의 기자가 있었습니다. 동아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석간 기자 3명 등 매일 김대중 총재와 아침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시기상 김대중 총재가 굉장히 힘들 때였는데 하루는 아침을 먹으며 앉아있는 기자들한테 정색하며 말했습니다. “왜 언론은 나한테 호의적이지 않습니까?” 그때 제 나이가 서른이었는데 제가 기자가 아니었다면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이 왜 저와 밥을 같이 먹으며 아들 뻘도 안 되는 사람을 앉혀놓고 진지하게 자기 고민을 토로했을까요. 제 인격이 훌륭해서, 지식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제가 김대중 총재에 관해 기사를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이는 서른 살이지만 판단하고 규정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언론인은 권력이 있습니다. 언론은 대상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대상을 판단하고 규정하기까지 이 대상을 놓고 재구성하는 과정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합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라는 사람은 왜곡되고 축소될 수 있습니다. 내가 보는 대상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이 아닌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가 만드는 대상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우리가 책임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언론은 대상을 판단하고 규정함으로 인격살인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현상은 무엇일까요? 예로 나꼼수를 들어보겠습니다. 나꼼수도 현실적으로 언론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언론을 통해 나꼼수로부터 규정되고 판단된 대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사실과 다르고 진실과 거리가 멀 때, 그 규정되고 판단된 대상들은 어떻게 될까요. 주위에서 일어난 현상들을 놓고도 이 문제를 볼 수 있습니다.
저희 큰 아이는 대학생인데 아이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기자를 할 때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저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내가 보고 듣고 취재하고 판단하고 규정하는 기사가 진실에 가까울까’, ‘진실에 다다르지 못했다면 누구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까’하는 두려움이 지배하면서 기자라는 직업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는 “네가 어떤 직업을 선택할지는 네가 전적으로 생각해라. 상담해주고 도와줄 수는 있지만 네가 행복한 것을 해라. 그런데 한 가지, 네가 판사나 검사나 기자가 되고 싶으면 나랑 이야기를 많이 하자”고 말했습니다. 판사와 검사와 기자의 공통점은 대상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인간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그래서 저는 판사와 검사와 기자 중에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을 보면 정말 무섭습니다. 성경에는 곳곳에 판단하지 말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판단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은 여간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않으면 힘든 일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판단하는 그것으로 그대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그대가 똑같은 일들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진리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내린다는 것을 압니다”(롬 2:1~2).
판단하는 우리는 무슨 차이가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똑같습니다.
“왕의 판결은 하나님의 판결이니 왕은 공의롭게 판결해야 한다. 공정한 저울과 추는 여호와의 것이고 주머니 속의 모든 추들도 다 그분이 만드신 것이다”(잠 16:10~11).
이렇게 판단은 오직 하나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의 정의감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적 언론관, 겸손과 정직
이제 결론을 내겠습니다. 성경적 언론관은 어떤 것일까요? 성경이 쓰여진 시기에 직업으로서의 언론인은 없었고 제도화된 기구나 기관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판단을 직업으로 하는 언론과 닮은 직업이 있습니다. 재판관입니다. 성경에서는 재판관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내가 그때 너희 재판장들에게 명령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있는 사건이든,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의 사건이든 너희 형제들 사이의 분쟁을 잘 듣고 공정하게 심판하고 편파적으로 하지 말고 낮은 사람이든 높은 사람이든 똑같이 대하며 너무 어려운 일이거든 내게 가져와 듣게 하라고 했다. 그때 내가 너희가 해야 할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신 1:16~18).
“너희는 재판할 때 의롭지 못한 일을 하지 말라. 곧 너희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두둔해서는 안 되고 힘 있는 사람이라고 옹호하지도 말라. 다만 네 이웃을 공평하게 재판하라”(레 19:15).
이 짧은 구절 속에 어떻게 언론인, 재판관이 들어야 할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긍휼과 공의를 혼동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긍휼을 베풀어야 할 대상이지만 긍휼과 공의를 혼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론에 있어 ‘겸손’을 요구하십니다. 공손한 태도를 말하는 겸손이 아니라 ‘제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맡기셔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하고 고백하며 무릎 꿇는 태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1의 덕목입니다. 그 다음 제2의 덕목은 ‘정직’입니다. 제가 앞에서 대상을 재구성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는 것 중 가장 무섭고 중요한 것은 ‘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내가 듣고 싶지 않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은 어떤 형태이든지 합리화하는 모습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고 판단하고 인식할 때 가장 견제해야 할 것은 나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대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와에 대입하면 내가 듣고 싶지 않은 금지의 명령이지만 나에게 불리하더라도 그 메시지를 올바로 흘려보내는 것이 정직입니다. 이것들은 성경적인 크리스천 미디어 커뮤니케이터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또한 깊이 내면화되어야 할 가치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 정리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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