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가 양을 두고 어딜 가겠나” -이유택 목사
신앙의 선배를 만나다
4대 독자 이유택, 예수 만나 목사가 되다
(1905-1949)
이유택 목사는 이퇴계 선생의 후예다. 1905년 1월 9일 경북 안동군 도산면 운곡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4대 독자에 유복자다. 14살 나이에 일찍 조혼한 그는 15세에 자녀를 낳았다.
“네가 그토록 야소(예수)를 믿으려면 할 수 없다. 4대 독자이지만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자식은 그대로 살려둘 필요가 없다.”
이유택 목사가 어린 시절 예수를 믿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는 집안에 있던 모든 신주단지를 꺼내 불태워버렸다. 가족들은 이유택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면서 그를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멍석말이를 하고 발로 밟아 구타했다. 그러던 중 가족들 간의 의견이 갈렸다. 어떤 이는 그대로 죽이기는 애석하다, 또 어떤 이는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가 크리스천이 된 이유는 김 선생이라는 사람을 만나면서부터였다. 보통학교에 다니던 그는 김 선생에게 예수에 대해 전해 들었다. 그렇게 믿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딸 셋을 두었는데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가문에서 쫓겨났다. 그는 스스로 학비를 벌고 처자식들을 먹여 살리려고 온갖 고생을 다했다.
예안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나이 20세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민족주의자조만식 선생을 만났다. 조만식 선생에게 신앙뿐만 아니라 학문을 배우며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성장해나갔다. 1929년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한 이유택은 당시 교장이던 매쿤 박사에게도 신임을 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택 목사는
1933년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던 이유택은 당시 신현교회를 개척하고 전도사를 물색 중이던 길선주 목사의 눈에 띤다. 교회 김인서 장로의 천거로 이유택은 신현교회 전도사로 첫 목회를 시작했다. 이후 평양신학교에서 면학하다가 1937년 32회 졸업생이 됐다. 같은 해 평양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신현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 신사참배가 가결되었을 때 이유택 목사는 주기철 목사와 함께 금식기도를 하면서 통탄하며 절규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고 끝까지 대항했던 이유택 목사는 1938년 의성 농우회 사건(일제가 농우회를 탄압하기 위해 다수의 기독교 지도자를 체포한 사건)에 연루되었다. 주기철 목사와 함께 경북 의성경찰서로 잡혀가 7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될 정도 끔찍한 고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출옥했을 때 사역하던 신현교회가 폐교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택 목사는 굴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신현교회를 재건했고,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몰두했다. 그때부터는 공산당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주변인들은 그에게 월남할 것을 권유하지만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500명의 양떼를 버리고 갈 수 없다. 목자가 양을 두고 어딜 가겠나. 교회를 끝까지 사수하겠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6개월 전 그는 공산당에게 문제의 목사로 낙인찍혀 검거되었다. 그때 이유택 목사는 수요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공산단원들은 이유택 목사를 붙잡고 조사할 것이 있다며 끌고 갔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가족과 교회 성도들에게 이별의 말 한 마디 전하지 못했다.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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