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전문가 기고
명화와 함께 읽는 성경
명화와 함께 읽는 성경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윌리엄 블레이크의 ‘친구들의 비난을 받는 욥’(1825년)
윌리엄 블레이크의 ‘친구들의 비난을 받는 욥’(1825년)
“여러분! 예수 믿고 교회 열심히 다니고, 신실하게 사는 사람은 모두 축복받고 형통한 삶을 살까요?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사업도 번성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보장을 해 주시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 크리스천들이 대충대충 살아도 된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하용조 목사 생전 설교 중 한 대목이다. 당시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대한민국 성직자 중에서 성도들에게 설교하면서 이 내용을 이토록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욥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욥은 ‘고난 받는 의인’의 대명사이다. 왜 신실한 주님의 사람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이것이 욥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핵심 메시지이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욥 7:15).
욥은 절망 속에서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절규한다. 의인으로 칭송받던 신실한 욥이 흔들리는 모습은 그의 고통이 어떠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대학 시절 폐결핵을 앓기도 했던 하용조 목사는 평소 당뇨와 고혈압으로 고생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신부전증으로 일주일에 네 번씩이나 투석을 했다. 간암으로 7차례에 걸쳐서 수술을 받기도 했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그는 한국 복음주의 운동을 선도했던 한국 기독교의 큰 별이었다.
“아픔은 축복입니다. 고통은 내게 깨달음을 줍니다. 밤이 낮을 알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형교회를 개척했으면서도 세속적 권력과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뚜벅뚜벅 복음화의 외길만 걸었던 하용조 목사. 그는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욥기를 떠올리며 영적 충만을 경험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욥은 하용조 목사의 동일시(identification) 대상이자 영적인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날 하용조 목사의 질문이 바로 욥기의 주제이기도 하다.
하용조 목사 생전 설교 중 한 대목이다. 당시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대한민국 성직자 중에서 성도들에게 설교하면서 이 내용을 이토록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욥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욥은 ‘고난 받는 의인’의 대명사이다. 왜 신실한 주님의 사람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이것이 욥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핵심 메시지이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욥 7:15).
욥은 절망 속에서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절규한다. 의인으로 칭송받던 신실한 욥이 흔들리는 모습은 그의 고통이 어떠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대학 시절 폐결핵을 앓기도 했던 하용조 목사는 평소 당뇨와 고혈압으로 고생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신부전증으로 일주일에 네 번씩이나 투석을 했다. 간암으로 7차례에 걸쳐서 수술을 받기도 했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그는 한국 복음주의 운동을 선도했던 한국 기독교의 큰 별이었다.
“아픔은 축복입니다. 고통은 내게 깨달음을 줍니다. 밤이 낮을 알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형교회를 개척했으면서도 세속적 권력과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뚜벅뚜벅 복음화의 외길만 걸었던 하용조 목사. 그는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욥기를 떠올리며 영적 충만을 경험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욥은 하용조 목사의 동일시(identification) 대상이자 영적인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날 하용조 목사의 질문이 바로 욥기의 주제이기도 하다.
욥의 눈물과 시선…
오늘 우리가 욥기와 함께 묵상할 그림은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작품이다. 미술사학자 E. H. 곰브리치에 의하면 윌리엄 블레이크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에 사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르네상스 이래로 공인된 전통적인 규범을 의식적으로 포기한 최초의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런 까닭에 그의 그림은 다소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다. 그는 말년에 단테의 ‘신곡’과 성경의 ‘욥기’를 소재로 한 연작을 발표한다. 오늘 소개하는 ‘친구들의 비난을 받는 욥’(1825년)도 이 시리즈 중 하나이다.
욥기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공증을 두 번이나 받은 의인이다(욥 1:8, 2:3). 그런 욥이 엄청난 재앙에 직면한다. 자신 소유의 소와 양, 나귀와 낙타 등을 모두 잃고 휘하에서 일하던 일꾼과 목동들이 죽임을 당한다. 태풍으로 아들과 딸들이 죽고 욥 자신도 악성 피부병에 걸린다.
욥에게 닥친 시련은 그를 만신창이(滿身瘡痍)로 만들었다. 재산과 건강과 자식까지 모두 잃은 욥은 몸과 마음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었다. 초주검 상태이다. 늘 가까운 사람의 배신은 사람을 더욱 힘들게 하는 법이다. 믿었던 아내의 악담은 비수가 되어 욥의 심장을 찌른다.
“아직도 그 잘난 충성심이나 붙들고 있다니!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요!”(욥 2:9).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에서 가운데가 욥이고 왼쪽에 있는 여인이 욥의 아내이다. 피골이 상접했을 욥이 다소 건장하게 그려졌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하는 욥의 비애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욥의 아내는 남편을 응시하고 있다. 이 상황 자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당혹한 눈빛이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 등 세 명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다. 하지만 그들은 욥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욥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는 마음이 없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자네가 받고 있는 고통은 자네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라네. 그러니 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그들의 태도는 고통받고 있는 친구를 위로하는 바른 태도가 아니다. 마땅히 친구가 어디가 아픈 지부터 들어줘야 하고, 얼마나 아파하는 지를 알아줘야 한다. 친구의 고통 자체에 집중하고 공감하려는 자세가 치료하는 자, 위로하는 자의 첫 번째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럴 마음이 없다. 욥의 잘못을 찾아내어 콕 집어 이야기하고 싶어 안달이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위로하기보다는 가르치고 분석하는 눈빛으로 손가락질 해대는 세 친구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욥은 아내나 옆의 친구들에게 아랑곳없다. 그의 시선은 하늘을 향한다. 욥의 눈물과 시선이 이 그림의 핵심이다. 욥은 친구들의 지적질에 어처구니가 없다. 욥은 대놓고 친구들을 ‘재난을 주는 위로자’ ‘형편없는 위로자’라고 반발한다.
“나도 그런 것들은 많이 들어 보았네. 자네들이 위로라고 하는 말이 다 형편없네. 쓸데없는 말에 끝이 있겠나? 그렇게 말하는 저의가 무엇인가?”(욥16:2~3).
성서학자 송민원 교수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욥기를 읽지 말라고 단언한다.
“원죄론이나 이신칭의, 행위와 율법의 이분법과 같은 구약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또는 구약시대의 독자들에게는 낯선 틀로는 욥기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신학적 관점은 반성적 지혜가 제기하는 ‘의로운 자의 고난’이라는 주제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욥기 해설서들이 대개 실패하는 이유가 이 프레임(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여호와 하나님은 욥의 읍소에 신학적인 논거를 들어 비판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서 홀연히 나타나서 욥에게 당신의 위대함을 보여 주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아는 게 있으면 말해 보아라”(욥 38:3). “내가 너를 지은 것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욥 40:15).
욥은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함 앞에 찬탄하며 무릎을 꿇는다.
“나는 주께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고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 이루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욥 42:2).
오늘 우리가 욥기와 함께 묵상할 그림은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작품이다. 미술사학자 E. H. 곰브리치에 의하면 윌리엄 블레이크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에 사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르네상스 이래로 공인된 전통적인 규범을 의식적으로 포기한 최초의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런 까닭에 그의 그림은 다소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다. 그는 말년에 단테의 ‘신곡’과 성경의 ‘욥기’를 소재로 한 연작을 발표한다. 오늘 소개하는 ‘친구들의 비난을 받는 욥’(1825년)도 이 시리즈 중 하나이다.
욥기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공증을 두 번이나 받은 의인이다(욥 1:8, 2:3). 그런 욥이 엄청난 재앙에 직면한다. 자신 소유의 소와 양, 나귀와 낙타 등을 모두 잃고 휘하에서 일하던 일꾼과 목동들이 죽임을 당한다. 태풍으로 아들과 딸들이 죽고 욥 자신도 악성 피부병에 걸린다.
욥에게 닥친 시련은 그를 만신창이(滿身瘡痍)로 만들었다. 재산과 건강과 자식까지 모두 잃은 욥은 몸과 마음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었다. 초주검 상태이다. 늘 가까운 사람의 배신은 사람을 더욱 힘들게 하는 법이다. 믿었던 아내의 악담은 비수가 되어 욥의 심장을 찌른다.
“아직도 그 잘난 충성심이나 붙들고 있다니!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요!”(욥 2:9).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에서 가운데가 욥이고 왼쪽에 있는 여인이 욥의 아내이다. 피골이 상접했을 욥이 다소 건장하게 그려졌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하는 욥의 비애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욥의 아내는 남편을 응시하고 있다. 이 상황 자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당혹한 눈빛이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 등 세 명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다. 하지만 그들은 욥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욥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는 마음이 없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자네가 받고 있는 고통은 자네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라네. 그러니 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그들의 태도는 고통받고 있는 친구를 위로하는 바른 태도가 아니다. 마땅히 친구가 어디가 아픈 지부터 들어줘야 하고, 얼마나 아파하는 지를 알아줘야 한다. 친구의 고통 자체에 집중하고 공감하려는 자세가 치료하는 자, 위로하는 자의 첫 번째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럴 마음이 없다. 욥의 잘못을 찾아내어 콕 집어 이야기하고 싶어 안달이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위로하기보다는 가르치고 분석하는 눈빛으로 손가락질 해대는 세 친구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욥은 아내나 옆의 친구들에게 아랑곳없다. 그의 시선은 하늘을 향한다. 욥의 눈물과 시선이 이 그림의 핵심이다. 욥은 친구들의 지적질에 어처구니가 없다. 욥은 대놓고 친구들을 ‘재난을 주는 위로자’ ‘형편없는 위로자’라고 반발한다.
“나도 그런 것들은 많이 들어 보았네. 자네들이 위로라고 하는 말이 다 형편없네. 쓸데없는 말에 끝이 있겠나? 그렇게 말하는 저의가 무엇인가?”(욥16:2~3).
성서학자 송민원 교수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욥기를 읽지 말라고 단언한다.
“원죄론이나 이신칭의, 행위와 율법의 이분법과 같은 구약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또는 구약시대의 독자들에게는 낯선 틀로는 욥기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신학적 관점은 반성적 지혜가 제기하는 ‘의로운 자의 고난’이라는 주제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욥기 해설서들이 대개 실패하는 이유가 이 프레임(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여호와 하나님은 욥의 읍소에 신학적인 논거를 들어 비판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서 홀연히 나타나서 욥에게 당신의 위대함을 보여 주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아는 게 있으면 말해 보아라”(욥 38:3). “내가 너를 지은 것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욥 40:15).
욥은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함 앞에 찬탄하며 무릎을 꿇는다.
“나는 주께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고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 이루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욥 42:2).
욥인가? 아내인가? 세 친구인가?
융심리학자인 안셀름 그륀은 고통에 빠진다고 반드시 자신에게 죄를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욥기는 우리가 호소하고 절규하고 저항해도 된다고 허락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런 공격적 태도의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불가해한 사랑의 신비로 이끌려가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다만 침묵하고 경배하며 무릎을 꿇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불가해한 사랑 속에서 우리의 불가해한 고통이 변화합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라는 사탄의 질문에 대한 욥의 대답은 이렇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니이다”(욥 1:21).
하용조 목사는 아니 욥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욥기는 우리가 호소하고 절규하고 저항해도 된다고 허락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런 공격적 태도의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불가해한 사랑의 신비로 이끌려가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다만 침묵하고 경배하며 무릎을 꿇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불가해한 사랑 속에서 우리의 불가해한 고통이 변화합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라는 사탄의 질문에 대한 욥의 대답은 이렇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니이다”(욥 1:21).
하용조 목사는 아니 욥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은 욥처럼 하나님이 당신에게 복을 주실 때뿐만 아니라 거두어 가실 때에도 과연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는가?”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친구가 고난에 빠졌을 때 그럴싸한 이론적 해석에 빠져 친구를 더 힘들게 하는 사람인가? 먼저 그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람인가?”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친구가 고난에 빠졌을 때 그럴싸한 이론적 해석에 빠져 친구를 더 힘들게 하는 사람인가? 먼저 그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람인가?”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