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말씀 해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
맛있는 말씀 해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은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집약해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하지만 이 위대한 구절이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들에 의해 잘못 이해되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잘못 적용되어 많은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문자적으로 볼 때 이 구절의 하나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만큼 이 세상(사람을 포함한 피조세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만 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번 하나님께 구원받은 후에는 성도들이 어떤 죄를 지어도 전혀 상관없다는 식의 영지주의적 해석으로 몰아가려는 경우도 있다. 이 위대한 말씀의 의미는 그게 아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키워드인 ‘세상’이라는 단어를 세밀하게 이해해야 한다. 세상과 사랑의 상관관계를 서로 문맥 안에서 살펴봐야 정확한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 성경에서 ‘세상’이란 말이 사용될 때는 긍정적인 의미(요 1:10)와 부정적인 의미(요 15:18~19) 두 가지 뜻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 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완전한 상태이지만,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은 하나님께 구원을 받아야 하는 모습을 반영한다. 서로 상반된 뜻을 가진 단어가 성경에서 ‘세상(헬라어, 코스모스/코스몬)’이라는 말로 혼용되다 보니, 앞뒤 문맥에 따라 용어의 의미를 해석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해석학적 원리를 무시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고, 왜곡하게 만든다. 예컨대, 서구의 크리스천들은 무조건 사랑의 하나님만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사랑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을 한국 교회가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경외함이 결핍된 사랑의 강조는 오히려 죄와 심판의 하나님을 간과하거나 거룩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매우 조심해야 한다. 간혹 끔찍한 죄를 짓고도 전혀 죄의식이 없거나 무감각해져 버리고도 사랑 타령만 읊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국의 크리스천은 오랜 가부장적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보다 종말론적이며 심판의 하나님만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거룩과 공의의 종말론적인 심판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두려운 하나님만 느끼게 해서 정작 성경의 핵심주제인 사랑의 하나님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세상의 두 가지 태도는 십자가 안에서 균형을 이루며 해석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은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실 만큼의 상당한 대가가 지불되었다는 의미다. 내가 내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의미까지 사랑의 개념에 포함시켜야 제대로 그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무조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어버리는 사랑이 아니다.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몸소 답이 안 보이는 절망적인 세상을 향해 손 내 미시고, 먼저 찾아오셔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 되어주셨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엄청난 죗값을 지불하셨다. 이로써 하나님도 만족하시고, 심판받아야 할 우리와의 관계도 화목하게 된 것이다.
성경 66권에 나타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동시에 거룩과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이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성품이 양립할 수 없지만, 창조주 하나님에게 그러한 성품이 모순되거나 갈등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다. 사랑이면서 심판의 하나님에게는 정말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 김상수 목사(대전온누리교회)
<요한복음> 3장 16절은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집약해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하지만 이 위대한 구절이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들에 의해 잘못 이해되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잘못 적용되어 많은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문자적으로 볼 때 이 구절의 하나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만큼 이 세상(사람을 포함한 피조세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만 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번 하나님께 구원받은 후에는 성도들이 어떤 죄를 지어도 전혀 상관없다는 식의 영지주의적 해석으로 몰아가려는 경우도 있다. 이 위대한 말씀의 의미는 그게 아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키워드인 ‘세상’이라는 단어를 세밀하게 이해해야 한다. 세상과 사랑의 상관관계를 서로 문맥 안에서 살펴봐야 정확한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 성경에서 ‘세상’이란 말이 사용될 때는 긍정적인 의미(요 1:10)와 부정적인 의미(요 15:18~19) 두 가지 뜻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 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완전한 상태이지만,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은 하나님께 구원을 받아야 하는 모습을 반영한다. 서로 상반된 뜻을 가진 단어가 성경에서 ‘세상(헬라어, 코스모스/코스몬)’이라는 말로 혼용되다 보니, 앞뒤 문맥에 따라 용어의 의미를 해석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해석학적 원리를 무시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고, 왜곡하게 만든다. 예컨대, 서구의 크리스천들은 무조건 사랑의 하나님만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사랑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을 한국 교회가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경외함이 결핍된 사랑의 강조는 오히려 죄와 심판의 하나님을 간과하거나 거룩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매우 조심해야 한다. 간혹 끔찍한 죄를 짓고도 전혀 죄의식이 없거나 무감각해져 버리고도 사랑 타령만 읊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국의 크리스천은 오랜 가부장적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보다 종말론적이며 심판의 하나님만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거룩과 공의의 종말론적인 심판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두려운 하나님만 느끼게 해서 정작 성경의 핵심주제인 사랑의 하나님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세상의 두 가지 태도는 십자가 안에서 균형을 이루며 해석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은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실 만큼의 상당한 대가가 지불되었다는 의미다. 내가 내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의미까지 사랑의 개념에 포함시켜야 제대로 그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무조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어버리는 사랑이 아니다.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몸소 답이 안 보이는 절망적인 세상을 향해 손 내 미시고, 먼저 찾아오셔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 되어주셨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엄청난 죗값을 지불하셨다. 이로써 하나님도 만족하시고, 심판받아야 할 우리와의 관계도 화목하게 된 것이다.
성경 66권에 나타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동시에 거룩과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이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성품이 양립할 수 없지만, 창조주 하나님에게 그러한 성품이 모순되거나 갈등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다. 사랑이면서 심판의 하나님에게는 정말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 김상수 목사(대전온누리교회)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