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7~16절이재훈 목사

 

 

신앙의 목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이 머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어 은사를 섬기기 위해 사용하십시오.사랑 가운데 진리를 행하고 말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결코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만  자녀가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삶 속에서 보이는 예수님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그 아들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롬 8:29~30).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만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도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말로만 듣는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보이는 예수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안디옥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고 지은 이름입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에 지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우리의 말로 전해듣는 예수님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보여지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세상이 내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평가는 혹독합니다. 그렇게 살 바에는 그리스도인이라 칭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 복음전파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내용과 삶이 달라서 생긴 장벽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달라 예수님이 나타나지 못합니다. 

 

보증과 모범이 되신 예수님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십니다. 어쩌면 이 모습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중요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우리의 보증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보증하신 분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의 모범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들이 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고 구원의 보증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보증이 되셨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모범이 되는 분이라는 것은  받아들입니다. 대부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예수님처럼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구원의 보증이 되신 것을 믿지만 예수님이 삶의 모범이 되신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가 되신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는 일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이끌어주시고, 공급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닮은 삶 살도록

 

머리와 지체는 생명으로 연결된 관계입니다. 생명의 관계는 연합된 관계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포도나무에 있습니다. 만약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예수님을 본받을 수 없지만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가 그분에게 붙어있는 지체가 되면 생명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때부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예수님의 영은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머리 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수님보다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연합된 관계에 있으면 예수님이 하셨던 일, 아니 더 큰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저서 <예수님처럼>에는 단 하루만 예수님이 당신이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생각했던 일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죄의 심판에서 우리를 면죄해 주신 구원의 보증으로써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격려하시고 공급해 주시는 분입니다.

 

서로를 성장시키는 ‘은사’ 

 

오늘 본문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받았습니다”.(7절)  “그리스도로부터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해 함께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맡은 분량대로 기능하는 가운데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가운데 스스로를 세워 갑니다”(16절).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쉬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들어갈 처소를 예비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날 수 있도록 은사와 은혜를 주고 계십니다.

은사는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은혜의 능력입니다. 은사는 소수 지도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서로가 서로를 세우고,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게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만약 우리 스스로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필요 없습니다. 성경에 ‘서로’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서로 용납하라’,  ‘서로 사랑하라’,  ‘서로 받으라’, ‘서로 섬기라’, ‘서로 이해하라’,  ‘서로 하나 되라’ 등 서로라는 단어가 많이 쓰였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원수도 필요합니다. 원수를 만났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은사의 목적 ‘섬김’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혼자 예수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필요 없어 보이는 사람의 은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에게까지 자라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영적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확인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은사의 목적이 섬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은사가 무엇인지 아무리 확인해 보려고 해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은사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열심히 섬기는 것입니다. 섬겨보면 은사가 확인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맡겨 진 일을 열심히 할 때 은사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은사를 섬기는 데 사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거둬 가실 수가 있습니다. 은사의 목적은 나를 유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은사를 통해서 내가 자라나고, 나의 은사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참된 직분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로, 어떤 사람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준비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는 것입니다”(11~12절)."

다섯 가지 직분이 나옵니다. 초대교회에 다섯 가지 직분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장로, 집사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직분을 공동체 안에서 직분으로 인정했습니다. 과거에는 존재했던 직분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직분도 있습니다. 사도와 예언자도 오늘날에는 사용하지 않는 직분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바울을 사도라고 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래서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라는 직분을 오늘날에는 쓰지 않습니다. 예언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이 직분을 쓰지 않게 된 이유는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와 예언자는 성경이 완성 되는 데 쓰임을 받은 직분이었습니다. 성경이 모두 완성된 이후에는 사도와 예언자의 직분이 종료되었습니다.  예언적 기능이 있기는 하지만 예언자라는 직분도 종료되었습니다. 

신사도 운동에서 사도와 예언자의 직분이 오늘날에도 존재해야한다는 주장이 중요한 이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명백하게 증명된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분을 더 이상 쓰지 않는 것처럼 사도와 예언자의 직분은 종료되었습니다.

목사와  장로, 집사 등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모든 직분의 근거는 은사입니다. 은사와 직분은 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은사와 상관없이 직분을 받는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또 은사를 받았는데도 행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직분은 은사를 통해 섬기라고 인정해주는 것이 직분입니다. 직분을 스스로의 명함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모든 직분은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또 누군가를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게 돕는 것에 자신의 은사를 사용해야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올바른 직분의 활용이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참된 직분입니다.

 

믿는 일과 아는 일

 

둘째,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아는 일이 하나가 되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지식에 하나가 돼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께서 충만하신 정도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람들의 속임수, 곧 거짓된 간계로 인한 술책에 넘어가 온갖 교훈의 풍조에 떠밀리고 휩쓸리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13~14절).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믿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그 열심에 함정이 있습니다. 열심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내용입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내용을 분명히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세상의 지식이 아닙니다. 예수님,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믿음은 헛된 것이 됩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에베소교회에는 이단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거짓된 교훈이 많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에베소교회를 책망할 때도 거짓교사들에게 휩쓸렸다고 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거짓 교사들에 의해서 많이 흔들렸습니다.

참되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신천지 같은 이단들이 주요 일간지에 광고를 냅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순모임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알기 위해서입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은 흔들립니다.

 

참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자라지 않으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구주로 참되게 고백하는 지식이 분명해야합니다. 모든 교회의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이것을 방해하는 모든 사역은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만남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순모임, 만남, 사역을 통해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기까지 500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지만, 사람일리가 없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사람이지 하나님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중에 인성을 더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정반대입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훌륭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실제로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이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람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잘못된 사상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들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잘못된 믿음 때문에 교회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일과 아는 일이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사랑 가운데 있는 진리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납니다.

“사랑가운데 진리를 말하며 범사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합니다”(15절).사랑가운데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진리를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가운데 진리를 말하고 행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존스토트 목사는 이 구절을 아주 재미있게 해석했습니다. ‘교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를 변호하고 지지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들에게는 사랑이 현저히 부족하다. 이단의 냄새가 낸다고 생각하면 그들의 코는 씰룩거리고 근육은 파르르 떨리며 눈에는 전쟁을 준비하는 등불이 번쩍 켜진다. 그들은 오로지 전투를 즐기는 것 같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그와 정반대의 실수를 저지른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형제사랑을 보여주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심지어 진리를 희생할 각오까지 한 것 같다. 이 두 가지 경향은 모두 균형을 잃어버린 비 성경적인 것이다. 진리는 사랑으로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딱딱하게 굳어지고 사랑은 진리로 강하게 하지 않으면 사랑은 너무 연약해진다.’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진리는 사랑으로 부드러워야하고 사랑은 진리로 강해진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 참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않으면 사랑이 되지 못합니다. 사랑이 쓰러지고 사랑이 약해집니다.

사랑을 사랑되게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진리가 잘 전달되고, 진리가 진리 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가운데서 진리를 말하고, 사랑가운데서 진리를 행해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은혜 아니면 진리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합니다. 진리가 없고, 옳고 그름의 분별이 없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은 사랑가운데 진리를 행하셨습니다. 진리가 진리 되기 위해서는 사랑가운데 있어야하고, 그 사랑 속에는 반드시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연습해야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충만까지 이르게 됩니다. 신앙의 목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고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계실 때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서로를 섬길 때 자라나게 합니다. 사랑가운데 진리를 행하고 말할 때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일러스트 윤종은 janehome@naver.com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