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리라

이재훈 목사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살아있는 사람의 인격을 기초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종교지도자의 말이나 종교지도자에 의해 편집된 경전이 주는 교훈을 기초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중심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역사 속에 있었던 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예수님의 말씀만이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 자체가 진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다 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영성 신학자 리차드 포스터는 <훈련의 기쁨>이라는 책에서 피상성을 우리 시대의 저주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지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깊은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아는 깊이 있는 성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등록하고 정기적으로 예식에 참여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거나, 성경지식을 알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피상적인 생각입니다. 예배당에 예수교라는 간판만 붙이면 예수님이 함께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그분이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신지를 깊이 있게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합니다. 참된 하나님인 동시에 참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날마다 자라나야합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문제

예수님에 관한 피상적인 지식이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았고 예수님을 양육했던 육신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에게도 그런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 육신의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셨다는 것을 참되게 알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열두세가 되기까지 양육하면서 다른 자녀들과 동일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요셉과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오셨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자 예수가 말했습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49절)
예수님 말씀은 세 가지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에게 가르쳐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요셉과 마리아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피상적으로만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하신 말씀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이 되면 빠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기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간이 끝났다는 것은 유월절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유월절은 정월 첫째 달 14일 저녁입니다. 그 다음날부터는 누룩 없는 빵을 일주일 동안 먹는 무교절입니다. 그런데 절기가 붙어있고 무교절이 유월절의 연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월절은 무교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없어진 예수님

요셉과 마리아는 절기가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열두 살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13세는 율법의 아들로 성인이 되는 해였습니다. 예수님은 한두 해 전부터 유월절 절기에 참석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절기에 참석한 걸로 번역된 것을 볼 때 몇 해 전부터 유월절 절기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가족들이 함께 유월절 절기에 참석하고 나서 돌아가던 중에 예수님이 없어졌다는 것을 하루가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삼일이 지나서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율법학자들과 대화하고 계신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무관심한 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듭니다.
당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국가적인 일이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움직였습니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가족들뿐이었지만 길을 나서면서 친척들을 만나고, 가는 여정에 다른 마을에 사는 친족들도 만났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서 움직였습니다. 특히 친족끼리는 공동체를 이뤄서 노래를 부르며 성전으로 갔습니다. 한 가문 전체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올라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어딘가 있겠지’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성전 뜰 안에 계시는 예수님

그들은 하루 만에 예수님이 없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고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삼일을 헤맵니다. 하룻길을 가서 발견했는데 왜 삼일을 찾아 헤맸을까요. 주변을 탐색하면서 가다 보니 삼일이 걸린 것입니다. 그만큼 요셉과 마리아가 당황했습니다.
문제는 열두 살이면 분명 인지능력이 있기 때문에 부모에게 자신의 거취를 말할 수 있었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뜰에 있는 것을 보면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입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겠다고 요셉과 마리아에게 전하려고 했는데 기회를 얻지 못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자신은 예루살렘 성전에 남겠다고 전하지 않고 요셉과 마리아가 떠나도록 내버려 둔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후자의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고자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부모에게 깨우쳐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삼일 만에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은 성전 뜰에 계셨고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 선생님들과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동일한 인성을 가진 예수님

“3일이 지나서야 그들은 성전 뜰에서 예수를 찾게 됐습니다.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마다 그가 깨닫고 대답하는 것에 몹시 감탄했습니다”(46~47절).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율법학자들을 가르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처럼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말씀을 풀어주시면서 교훈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12세에 맞는 일을 하셨습니다. 보통 열두 살의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것이 질문입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을 잘 듣고 어른들에게 질문하면서 학습을 합니다. 예수님이 이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율법에 관한 지식이 완벽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인성을 가진 분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만 빼놓고 우리와 동일하게 사셨습니다. 그 한 가지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학습과정을 통해서 지식을 습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학습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한 순간의 기적을 통해 모든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율법학자에게 율법을 듣고 묻고 깨닫는 과정 속에 예수님은 틀림없이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가르치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곤고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회당에서도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랍비여 율법에 이렇게 되었는데 무슨 뜻입니까?’ 아마 예수님은 선생님이 모르는 것만 질문하는 학생이었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에게 자세히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듣는 태도에 감동하고, 몇 가지 질문에 대답 하는 것을 보고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비

율법학자들이 감탄하며 예수님과 대화했습니다. 누가복음을 통해 이 과정을 가르쳐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날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는 예수님이 사람이셨다는 것을 더욱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많았습니다. ‘가이언설’이라고 해서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처럼 잠시 십자가에서 고난 받았을 뿐이지 진짜 사람은 아니었다고 가르치는 이단도 있습니다. 당시는 예수님이 사람이었다고 믿기 어려워했던 시대였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왜 예수님이 사람이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했을까요. 기적이 일어났던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람이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이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지식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람이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시 사람들의 고민을 해보면 균형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인성을 가지고 성장한 동시에 하나님이셨던 그분의 신비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학자들과 대화하고 있는 예수님을 찾고 나서 나무라듯 이야기합니다.
“그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얘야, 왜 우리에게 이렇게 했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걱정하며 찾았는지 모른다’”(48절).
잃어버렸던 자녀를 찾았을 때 모든 부모가 하는 말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그들은 부모로서 열두 살 예수님을 나무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가 잊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전해준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도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며 키운 마리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육신의 아들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남아서 율법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하는 것을 철없는 행동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요셉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따끔하게 말씀합니다.
“그러자 예수가 말했습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49절).
이 말을 들은 요셉과 마리아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기대한 대답은 인간적인 대답이었습니다. 부모가 나무랄 때 자녀는 부모에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 대답을 부모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삼일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긴장하고 떨면서 찾았는데 왜 찾았냐고 하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다음 대답이 더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내가 마땅히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알지 못합니까?’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인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마땅히 가야할 길

여러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요셉과 마리아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여기서 세 가지를 지적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라는 말은 요셉과 마리아의 망각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지금 예수님을 당신들의 자녀로 찾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라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마리아는 천사가 전해준 소식을 마음에 품었지만 육신의 정이 앞서서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잊어버렸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양육하면서 자녀를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 이 아니라 자신의 꿈과 비전을 이루는 도구로 자녀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대한 종교 창시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이 한마디를 통해 예수님의 정체성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둘째,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줄 알지 못합니까?’ 여기서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나누고 계신 분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원문에 충실한 번역으로 읽으면 ‘내가 내 아버지의 안에 있어야 되는 줄 모르셨습니까?’입니다. 집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영어로 ‘In my fathers’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집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냐면 보통 ‘누구의’라는 소유격이 들어가면 당시에는 집을 의미했기 때문에 집이라는 단어를 넣은 것입니다. king james 번역에서는 ‘busines’로 번역했습니다. ‘내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어야 되는 줄 알지 못합니까?’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가능합니다. ‘아버지의 집’이라는 번역이 가능하고, ‘아버지의 일’이라는 번역도 가능합니다. 그것은 당시 성전은 아버지의 임재가 있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제사제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존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제도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무너뜨리지 않고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아래 나셨고, 율법을 배우셨고, 율법을 지키셨습니다. 그 누구도 지키지 못한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율법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으로 오셔서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기에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것입니다. 또 ‘내 아버지의 일’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것을 요셉과 마리아가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자식으로만 생각했지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에 나타난 아버지의 뜻과 일을 자신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학습과정을 통해서 분명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위기는 마땅히 알아야 될 것을 알지 못하거나 마땅히 행해야 될 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생깁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사명을 행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반드시, 마땅히 해야 된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반드시 하겠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마땅히 당신께서 할 일을 미루거나 피하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일을 이루기 위해서 마땅히 그 길을 걸어가는 인생이 되어야합니다.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

“그러고 나서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지혜와 키가 점점 더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51~52절).
예수님은 다시 나사렛으로 부모님과 함께 돌아와 목수 일을 했고 육신의 아버지의 집에 거했습니다. 이 놀라운 균형을 보십시오. 참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육신의 부모와 관계도 조화를 이뤘습니다.
예수님은 네 가지 영역에서 성장을 이뤘습니다. 첫째, 지혜가 자랐다는 정신적인 성장입니다. 둘째, 키가 자랐다는 것은 육체적 성장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다는 영적 성장입니다. 넷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사회적 성장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처럼 네 가지 영역에서 온전한 성장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지만 사람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죄가 없으신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훌륭한 종교 지도자로 알고 있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집에서 아버지의 일을 행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더욱 분명히 알고 체험하는 삶을 사십시오. 예수님은 참된 하나님인 동시에 참된 사람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일러스트 박정일
예수님을 분명히 알고 체험하는 삶을 사십시오.
예수님은 참된 하나님인 동시에 참된 사람입니다.

작성자  김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