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_ 순교의 피 흐르는 오이타를 가다
저주의 땅에서 희망을 목도하다
다시 한 번 부흥을 노래 … 그 중심에 러브소나타가 있다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린 지난 27일, 일본 오이타에 도착했다. 23번째 러브소나타 집회가 규슈에 위치한 한적한 온천마을 오이타에서 열린다. 날씨 때문인지 내 마음도 왠지 모르게 추웠다. 아마도 오이타가 기독교 박해의 중심지라는 역사적 사실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한 것 같다. 오이타는 기독교 탄압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사람들 머릿속에 기독교는 곧 저주라고 각인되어 있다. 역대 러브소나타 집회가 열린 곳 중에서 교회가 가장 적은 곳이기도 하다. 암울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목도했다. 러브소나타를 섬기러 한국에서 온 524명의 온누리교회 성도들의 헌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때 일본 기독교 부흥의 진원지였던, 수많은 순교자가 나온 오이타 기독교 역사를 만났다.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파된 것은 1549년 8월 15일이다. 로마 가톨릭 예수회 소속 신부 프란치스코 자비에르 선교사가 일본에 기독교를 전했다. 가고시마에 상륙한 자비에르 신부는 2년 뒤 1551년 9월 중순 ‘분고’(오이타현의 옛지명)에 들어왔다. 당시 오이타는 ‘오토모 소린’이라는 21세의 젊은 영주가 다스리고 있었다. 외국 문물과 기독교에 굉장한 관심을 갖고 있던 소린이 자비에르를 초청했다. 자비에르는 오이타에 불과 2개월을 머물다 인도로 떠났다. 그가 일본에서 보낸 2개월 동안 젊은 영주 소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 오토모 소린 크리스천 다이묘(영주) 동상.
오토모 소린 영주와 기독교
소린은 이때부터 기독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을 보호하는데 앞장섰다.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토지를 주고,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왔다. 외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소린의 기독교 우호적인 치세는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우선 일본에 처음으로 종합병원이 세워졌고, 일본 최초로 외과 수술이 행해졌다. 당시는 먹을 것이 부족하던 때라 많은 아기들이 버려지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고아원을 세워 버려진 아이들을 키웠다. 그것이 일본 최초의 고아원이다. 당시 오이타는 복지와 구제, 봉사의 발양지였다.
소린은 미션스쿨(신학교), 수도원, 도서관도 세웠다. 포르투갈 선교사와 무역선의 출입을 적극 옹호해 일본에 난반 문화(포르투갈 혹은 서양 중세 문화를 일컫는 일본어)를 꽃피웠다. 오이타는 일본의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다. 당시 서양에서는 분고를 일본과 별개의 나라로 인식했고, 이곳을 ‘동양의 로마’라고 부를 정도였다. 오이타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라틴어로 된 성가가 불려지기도 했다. 성극이 처음 행해진 곳도 바로 오이타다. 서로 자신의 아이라고 우기는 두 어머니 일화를 다룬 솔로몬의 재판을 다른 성극이 행해졌다.
외국 문물의 유입에도 적극적이었다. 단호박과 젖소를 처음으로 수입해 키운 것도 소린이었고, 대포와 철포도 처음으로 일본에 들여왔다. 소린의 비호 아래 오이타 지역은 일본 내에서도 가장 기독교가 번성하게 되었다. 1587년 소린이 소천할 당시 일본 전체 크리스천이 3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데 오이타 지역에만 크리스천 인구가 5만 명 이상이었다. 일본 전체 크리스천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다. 이처럼 오이타는 일본 기독교 부흥의 발양지였다. 오이타를 제외하고는 일본 기독교 역사를 논할 수 없다.
석공들이 우스키성 돌에 새겨진 십자가
1563년 소린이 우스키 지역에 성을 축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성을 만들 때 사용한 돌을 다루는 석공들이 모두 크리스천이었다고 한다. 석공들은 돌에 십자가와 △(성모), θ(하나님), H(예수회를 의미하는 IHS의 H) 등을 새겨 자신들의 신앙을 나타냈다. 직접 우스키성에 가 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본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곽이었다. 당시 석공들이 새겨놓은 표식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우스키그리스도교회 마츠나가 목사가 안내해 주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찾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의 흐름에 흔적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잡초와 이끼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석공들이 새겨놓은 표식을 보면서 마음이 숙연해졌다. 돌에 문양을 새김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이름 없는 석공들에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기독교 부흥지에서 처참한 박해 현장으로
크리스천 20~30만 명이 순교 당하다
번영할 것만 같던 오이타의 기독교는 소린 영주가 소천한 1587년 이후 급변했다. 소린은 자신이 죽은 후 오이타가 기독교 박해의 현장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바테렌(선교사란 뜻) 추방령’을 내렸다. 선진 외국 문물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기독교 박해는 도쿠가와 막부 때 정점을 찍었다. 1614년 전국에 ‘기리시탄(크리스천의 일본한자식 발음) 금지령’을 발포하고 대대적인 크리스천 박해가 시작됐다. 당시 일본에 약 60만 명의 크리스천이 있었는데 그중 20~30만 명이 이때 순교를 당했다. 엄청난 숫자다. 기독교가 번성했던 오이타는 역설적으로 가장 극심한 박해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오이타 시내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떨어진 곳에 ‘기리시탄 순교기념공원’이 있다. 이곳에서 14세 소녀부터 84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 명의 크리스천들이 목이 잘려 처형당했다.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제대로 된 무덤도 만들어 주지 않았다. 처참하게 버려졌다. 크리스천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한 이후 이곳은 저주받은 곳이 됐다. 불길한 땅이 되어 버렸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그곳을 1960년 당시 오이타 시장 우에다 다모츠(크리스천)가 공원으로 조성해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기 시작했다. 1970년에는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순교기념공원에도 가보았다. 공원 맞은편에 ‘성예수회영광찬미교회’가 있다. 순교기념교회를 세우기 위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오이타로 온 시노 미츠코 목사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순교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었다. 온누리교회 성도들이 그곳을 방문해 기도했다.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의 넋을 위로했다. 러브소나타 집회를 통해 오이타 땅에 다시 한 번 부흥이 일어나기를 뜨겁게 기도했다.
러브소나타 오이타 집회 당일. 이틀 전 온 비로 스산했던 공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해졌다. 따뜻한 날씨로 바뀌었다. 순교의 피가 흐르는 오이타를 축복하기 위해 한국에서 달려온 524명의 표정이 화창한 날씨보다 더 밝았다.
러브소나타가 열린 그란시어터 행사장은 그야말로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아침부터 이어진 중보기도가 한몫했다. 중보기도팀은 오전 10시부터 집회가 끝나는 9시까지 릴레이 중보기도로 힘을 보탰다. 뜨거운 중보기도와 온누리교회 성도들의 헌신, 그리고 오이타 성도들의 열망이 더해져 101명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역대 러브소나타가 개최된 곳 중에서 교계 상황이 가장 좋지 않았던 곳에서 이룬 쾌거다. 러브소나타 오이타를 통해 다시 한 번 일본 기독교의 부흥을 노래했다. 그 중심에 러브소나타가 있었다.
오이타에서 만난 사람들
순교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성예수회영광찬미교회는 순교기념공원 맞은편에 위치해 있는 아담한 교회다. 이 교회는 시노 미츠코 목사가 1987년에 세운 교회다. 그녀는 1985년 처음 오이타에 왔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오이타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전도했다. ‘순교기념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시노 목사는 교토에서 태어났다. 대학과 신학교까지 모두 교토에서 나왔다. 그야말로 교토 토박이다. 그녀가 아는 사람도, 성도도 없는 오이타에 와서 교회를 개척할 당시만 해도 교회 근처가 산이었다. 황량한 밭과 쓰레기장뿐이었다. 뱀이 많이 나올 정도로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곳 일대는 기독교 박해 당시, 기리시탄들의 목을 잘라 처형하던 처형장이었다. 처형당한 크리스천이 귀신이 되어 떠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황량한 곳에서 시노 목사는 1987년 목사관을 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주변이 변하기 시작했다. 일대 땅을 개간하며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시노 목사는 황야에 길을 만들고, 사막에 강을 내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흉흉한 소문이 돌고, 저주받은 곳이라고 모두들 기피하던 곳에 1993년 9월 지금의 교회당을 세웠다.
시노 목사는 교회를 만들 때 순교지의 흙과 돌, 나무 등을 모아와 제단을 쌓았다. 순교당한 크리스천들을 매장한 절에서 흙을 퍼왔다. 예루살렘에도 가서 기념될만한 것들을 공수해왔다. 나사로 무덤가나 예언자 스가랴의 무덤가 주변 흙도 가져와 제단 밑에 묻었다. 늘 순교자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지금의 영광찬미교회가 세워졌다. 순교자의, 순교자를 위한, 순교자에 의한 교회를 세웠다.
“영광찬미교회뿐만 아니라 순교의 피가 흐르는 오이타의 교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열정을 닮은 교회들입니다.”
/시노 미츠코 목사(성예수회영광찬미교회)
오이타의 67번째 교회이야기
오이타현에는 67개의 교회가 있다. 러브소나타 오이타 집회를 준비하기 시작한 1년 6개월 전에는 교회가 66개였다. 나가이와 목사가 시무하는 오이타이즈미교회는 러브소나타 준비와 함께 주변 교회로부터 정식 교회로 인정받게 되었다. 오이타의 67번째 교회다.
나가이와 목사는 일본의 유명한 크리스천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호소카와 가라샤 부인>을 읽고 크리스천이 되었다.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책이었다. 혼란한 전국시대, 전쟁터에 남편을 보낸 호소카와 부인이 남편 걱정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크리스천이 한 명 있었다. 그 크리스천은 매일 불안에 떠는 호소카와 부인를 위로했다. 호소카와 부인은 언제나 근심 걱정 없어 보이는 크리스천에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평안할 수 있는지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 크리스천이 대답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이 있으니까…”
그 글귀가 나가이와 목사의 눈에 들어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가이와 목사는 인생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어둡고 힘든 인생살이지만 하나님으로 인해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는 책에 나온 대로 하나님을 믿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무려 37년 전 일이다. 뒤늦게 신앙에 불이 붙은 그녀는 성경 읽는 것도, 교회 다니는 것도 너무 즐거웠다. 무엇보다 전도하는 기쁨이 컸다.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그녀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로 넘쳐났다. 3명으로 시작한 성경공부가 어느새 40명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전도하는 즐거움에 빠진 그녀는 8년 전 신학교에 입학했다. 전도의 꿈을 품고 들어간 신학교에서 목사로서의 소명을 깨닫고 6년 전 목사가 되었다. 그녀가 목사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세례를 준 이가 바로 그녀의 남편이다. 남편은 교회와 전도에 열심인 아내를 존중해 주는 착한 남편이었다.
그녀는 자녀들과 시부모, 친정부모, 친척들, 친구들까지 전도에 성공했을 정도로 전도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쉽지 않았다. 그런 남편이 그녀에게 처음으로 세례받은 성도가 됐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소천했다. 하나님이 그녀의 손을 통해 남편을 구원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성도가 거의 무료로 기증한 집을 예배처소로 삼은 나가이와 목사는 일본 기독교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고 한다. 교단과 교파의 벽이 너무 높아 교류는커녕, 정식 교회로 인정해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러브소나타 집회를 준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러브소나타 오이타 집회를 준비하면서 주변 교회들과 교류의 물꼬가 트인 것이다. 오이타의 67번째 교회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나가이와 목사는 러브소나타를 통해 자신의 교회가 주변 교회와 상생하게 된 것처럼, 오이타의 교회들이 서로 협력해 부흥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혼자 하면 힘들지만 함께 하면 하나도 힘들지 않잖아요. 오이타 교회들이 연합하면 예전의 영광을 재현할 거라고 믿습니다. 이곳이 다시 한 번 복음의 발신지가 될 것입니다.”
/나가이와 히로미 목사(오이타이즈미교회)
온누리교회에서 배운 영성 고향에 전수하다
오이타에서 낯이 익은 반가운 이를 만났다. 주인공은 이노우에 마키 목사다. 그는 햇수로 11년 가까이 온누리교회에서 사역했다. 선교사 훈련과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노우에 목사가 처음 온누리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4년이다. 오사카 온누리교회에서 전도사로서 열심히 섬겼다. 2006년 한국에 오게 되었다. 한국으로 온 목적은 단 하나였다. 선교사 훈련을 받기 위해서였다. 1년 정도 선교사 훈련을 받고 선교하러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선교하러가기까지 무려 5년 반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선교사 훈련뿐만 아니라 신대원에도 진학해 목사 안수도 받았다. 서빙고 온누리교회 일본어예배를 섬겼다. 2011년 12월,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북경 온누리교회로 파송되었다. 중국에 있는 일본인들을 섬기게 되었다.
북경에서 3년 동안 있었다. 힘들긴 했어도 평소 꿈이자 비전이었던 선교사가 되었기에 행복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비자 문제로 2014년 12월 일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자신의 고향이자, 아버지의 교회가 있는 오이타에서 사역하고 있다. 오이타에서 러브소나타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발 벗고 나서서 도왔다. 온누리교회를 잘 알고, 한국어도 가능하고, 한국에 대해서도 잘 알기 때문에 오이타 실행위원회와 한국 온누리교회 사이에서 중간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노우에 목사는 아직도 선교사의 비전을 품고 있다. 하나님이 분명 이유가 있어서 자신을 오이타로 돌아오게 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나님이 언젠가 자신을 어딘가로 보내실 때까지, 그는 일본 교회와 한국 교회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싶다고 했다. 겸손히 섬기겠다고 다짐했다.
“러브소나타 오이타 행사는 끝났지만, 오이타의 교회들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힘을 모아 일본 선교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작성자 김미림 기자 mirim@onnuri.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