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행전> 둘쨋날 메시지 - 다음 세대를 위한 기도(이찬수 목사)
다음 세대를 위한 기도
에베소서 4장 17~20절

이찬수 목사(분당우리교회 담임)
우리가 알고 있는 곳들 중 떼제공동체와 클리닉수도원이 있습니다. 떼제공동체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있지만 겉모습은 초라하고 소박합니다. 그에 반해 클리닉수도원은 겉모습이 화려합니다. 그런데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보면 클리닉수도원이 관광지로 전락해버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수도원은 교회와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고 초기에는 목적대로 잘 운영이 되었습니다. 사회에 공헌도 많이 했고, 개혁적 성향의 인물들과 추기경, 교황 등이 배출된 전통있고 역사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쩌다 관광지로 전락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유는 없었습니다. 명성과 부가 따라오면 권력이 뒤따라오니 이런 것들이 시간이 지나니 수도원의 세속화를 가져왔고, 그 세속화가 클리닉수도원을 몰락시킨 것입니다. 클리닉수도원을 통해 얻은 소중한 메시지는 모든 변화와 개혁, 회개 운동은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만 떼면 ‘한국교회가 죽었어’, ‘한국교회 목사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몰라’하고 말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존재 자체가 클리닉 수도원처럼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나오는 다윗을 보십시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다윗은 모든 여성들이 격분한 일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죄를 짓고 나서 오랫동안 회개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기 전까지 일 년 동안은 회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것은 모든 회개는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체질적으로 그게 힘듭니다. 우리 안에 묻어둔 죄는 누군가가 지적하지 않으면 절대로 회개하지 않는 존재가 나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방치하고 묻어둡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양과 소가 많은 부자와 가난한 이웃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 말을 듣고 다윗은 불같이 화를 내며 나단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는데 이런 일을 한 그 사람은 죽어야 마땅할 것이다”(삼하 12:5).
그 다음 6절이 재미있습니다.
“인정머리도 없이 그런 천하의 나쁜 짓을 했으니 그 새끼 양을 네 배로 갚아 주어야 한다‘”(6절).
이 두 구절에서 본 현실은 어떠합니까. 그냥 4배로 갚아주면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에 대해 격분하며 그런 사람은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는 묻어두고 자신의 양심에 대해서도 무뎌져 있습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기에 대해서는 깜깜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살인을 분별하는 분별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더욱 격분했고 하나님의 공의를 바랐습니다. 우리는 무지하고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자기 자신에 대한 사리는 분별하지 못하면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분별을 잘합니다.
모두가 한국교회에 대해 격분합니다. 그것이 혹시 내가 다윗처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보다도 수천만 배 더 큰 죄를 지은 자신은 모르고 타인에 대해 격분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자신에 대해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한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셨습니까.
“‘너희가 심판받지 않으려거든 심판하지 말라. 너희가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며 너희가 저울질하는 그 저울질로 너희가 저울질당할 것이다. 어째서 너는 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1~3).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내 눈에 들보가 생깁니다. 사물을 보는 정확한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자기 기준으로 다윗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강퍅함이 우리 안에 없습니까?
우리가 공의라고 말하면서 교회를 보는 부정적인 시각이 생긴다면 우리 자신이 다윗처럼 스스로에 대해 무뎌져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의 무뎌짐, 왜곡된 시선으로 비판하고 재단하는 시선이 교정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교회의 하나 됨, 세대 간의 하나 됨에 대해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민망한 편지 하나를 읽어드립니다. 저희 교회 대학생 자매가 저한테 보낸 이메일의 내용입니다.
“요즘 문화가 얼마나 많이 타락했는지 아실 것입니다. 저는 여중, 여고에만 있다가 처음 대학에 와서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음담패설, 술 등 그것은 제가 피하면 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수도권도 그러지만 지방에는 동거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사귄지 얼마 안 되어 성관계를 갖고 임신을 하고 낙태를 합니다. 특히 1학년 때는 남자들이 군대가기 전에 여자와 성관계를 맺고 가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서울에 있는 키스방과 안마방 여자 아이들도 여대생들인 것은 아시죠? 명품백, 쇼핑 등 사치를 위한 이유라고 합니다. 저는 그런 상황 속에서 엄청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그러합니다. 대체적으로 그러했습니다. 세상 친구들은 너무나 심각합니다. 성관계가 이벤트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 내에 친구, 선배들도 그러한 것입니다.”(중략)
내용이 더 많이 있지만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메일은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내용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의 편지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통계자료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한 설문조사에 보면 ‘남녀가 결혼하지 않더라도 함께 살 수 있다’에 동의하는 비율이 40.5%이고 20대는 50%가 넘습니다. 한 대학 신문사 통계에 따르면 전체 재학생의 35% 이상이 동거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대학생들의 동거 문화가 방치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당우리교회 중등부에서도 한 해에 낙태한 아이가 6명입니다. 이는 교역자에게 털어놓고 고민을 상담한 경우이고, 드러나지 않은 애들은 더 많을지 모릅니다. 지금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와 있는데 우리의 기도는 막막합니다. 이런 근본적인 뿌리에 대한 회개와 각성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다른 부분에 대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감각 없는 사람들이 돼 자신을 방탕에 내준 채 정욕으로 갖가지 더러운 일을 행했습니다”(엡 4:19).
‘방임’이라는 단어는 권력과 권세를 넘겨준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빼앗겨버렸다는 것입니다. ‘방탕에 방임하여’라는 표현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변질되고 타락해서 하나님의 영적인 순결을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되찾아오지 않고서는 영적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알아야 할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성적인 타락은 영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적 타락과 변질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충성하던 다윗이 여자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은 간혹 그 여인이 다 보이는 곳에서 목욕을 했다고 다윗을 유혹했다고 탓합니다. 그런데 여자의 잘못입니까? 영적으로 보면 그건 옳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11장 2절 말씀에 보면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다윗은 왕궁에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 왕궁을 거닐었는데 설마 그 왕궁이 아파트 101동에 있다가 102동 여자를 본 것처럼 가까웠겠습니까? 적어도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있지 않겠습니까. 저 멀리 어떤 여자가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이 윤곽적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윤곽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다윗이 ‘심히 아름다워보이는지라’라고 묘사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내면세계의 문제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자녀들을 보십시오. 저는 딸 둘에 아들 하나를 가진 아버지입니다. 이 아이들을 볼 때 제가 이 세 아이가 분가할 때까지 영육 간에 안전하게 보호할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청소년 사역을 10년이나 한 목사인데도 말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입니까. 이런 맥락에서 오늘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회개가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다음 말씀을 보면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책망합니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짓을 했느냐? 네가 헷 사람 우리아를 칼로 쓰러뜨리고 그 아내를 네 것으로 만들지 않았느냐? 너는 그를 암몬 사람의 칼에 맞아서 죽게 했다. 그러니 그 칼이 네 집에서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네가 나를 업신여기거나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네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삼하 12:9~10).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범한 성적인 죄를 윤리적 문제가 아닌 영적문제로 보십니다. 우리가 성적인 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회복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가정의 문제, 부모의 기도에 있어 영적회복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와서 해야할 것은 학교에 가 있고 유학 가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성적 문제와 관련해서 의도를 가지고 성적 타락을 부추기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와 ‘그들’이라는 표현이 17~23절 말씀에 계속해서 대조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씀에서 두 부류를 구분짓고 있습니다. 이 구조 속에서 ‘그들’로 통칭되는 악한 세력이 ‘너희’로 구분되는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엄청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에서 예수님은 어떤 기도를 하십니까?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서 기도할 것에 대해 간단하게 두 가지 대안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 우리 자녀들이 어두운 세력에 영적으로 맞설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후원해야 합니다. 바깥에서 우리 아이들을 무너지게 만드는 세력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기성세대인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를 회복해야 합니다. 영적자녀들의 모든 문제는 기성세대의 타락에서 시작합니다. 경외라는 단어는 ‘공경함으로 두려워함’을 뜻합니다.
창세기 39장 9절을 보십시오.
“이 집에서 저보다 큰 사람이 없습니다. 내 주인께서 제게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라고는 마님밖에 없는데 그것은 마님은 주인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렇게 악한 짓을 저질러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
요셉은 ‘당신의 남편’이 다 허락했어도 당신은 안 된다는 말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하고 말했습니다. 결론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요셉이 그 남편만 상대했으면 죄를 지어도 상관없었을 것입니다. 무지한 남편만 속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아까 읽어드린 이메일을 보낸 자매가 저한테 부탁한 것도 ‘승리한 어른들의 간증을 좀 들려주십시오’였습니다. 참 부끄러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세상 속에서 힘겹게 싸워나가는 이 젊은 자매가 부추기는 그 세력이 힘겨워서 승리한 어른들의 간증을 들려달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영적으로 순결할 수 있는 것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돌아보니 지금 목회자들의 치명적인 범죄행위는 다음 세대 앞에 떳떳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118편 17절에 나오는 다윗의 시를 보십시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선포할 것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나이가 지긋해졌을 때,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쓴 시입니다. 가정을 깨뜨리고 음모를 꾸며 남편을 죽이는 죄를 지었지만 다윗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회복하여 여호와가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두 가지의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은퇴하는 날, 젊은이들에게 ‘내가 죽지 d않고 살아서 끝까지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소원은 ‘내가 이땅을 하직하는 날, 내 세 아이에게 ’비록 네 아버지가 부족했지만 죽지 않고 살아서 이 땅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냈다는 것이 기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의 이 소원이 오늘 이곳이 모인 모든 자매님들의 소원이 되길 바랍니다.
/ 정리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