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독교, 그 찬란한 역사를 만나다_진주
보수적인 진주에 기독교가 전파되기까지
진주교회, 광림학교, 배돈병원을 가다
서부 경남의 중심도시 진주(晉州).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 중하나인 촉석루가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과 왜장을 안고 남강에 뛰어든 기생 논개로 유명한 곳이다. 퇴계 이황과 당대 쌍벽을 이룬 유학자 남명 조식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1925년 도청이 부산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진주는 경남의 중심지였다. 그래서일까. 진주는 그 어느 지역보다 계급의식이 강하고 보수적인 곳이다. 민족의식과 배일(排日)사상 또한 강한 곳이다. 기독교와 같은 외래 종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복음의 생명력보다 강하고 질기지 않았다. 호주 선교사들의 헌신과 숭고한 희생으로 진주 지역에도 기독교가 전파됐다. 호주 선교사들의 선교 정신이 깃든 곳, 진주를 다녀왔다.
충절과 기개가 서린 진주
서울에서 자동차로 3시간 30분. 진주로 가는 대전통영고속도로는 막힘없었다. 옛노래 ‘진주라 천리길’이란 말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생긴 덕분에 옛말이 되어버렸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진주성이다. 행주대첩, 한산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의 현장이다.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인 촉석루가 진주성 안에 위치해 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년여의 전쟁준비를 마치고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을 공격했다. 이것이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왜군의 공세는 파죽지세였다. 조선수군과 의병의 활약도 만만치 않았다. 왜군은 의병운동의 본거지를 소탕하고 전라도 지역을 공격하기 위한 거점으로 삼고자 진주를 공격했다. 10월 5일 진주성을 침공한 2만 여명의 왜군에 맞서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은 3천8백여 명의 군사로 6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끝에 왜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가 바로 임진왜란 3대 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안타깝게도 김시민 장군은 이 전투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았고, 결국 39세를 일기로 순절하고 만다.
이듬해 6월 왜군은 10만 병력을 이끌고 다시 진주성을 침공했다. 제2차 진주성 전투다. 군, 관, 민을 합쳐 7만5천에 불과한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 몰살당하고 만다. 왜장들은 촉석루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주연(酒宴)을 벌였는데, 이 연회에 기생 논개가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촉석루 아래 의암(義巖)으로 유인해 함께 남강에 몸을 던졌다. 진주인들의 충절과 기개가 서린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촉석루에서 바라본 진주 경치는 정말 아름다웠다. 400여 년 전, 이곳에서 처절한 전투가 일어났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의암으로 내려가 봤다. 조그맣고 평범한 바위다. 적장을 껴안고 뛰어내리기 전 논개는 남강을 바라보며 어떤 상념에 젖었을까. 충절의 장소에서 잠시 묵념해본다.
호주 선교사들의 눈물겨운 헌신
진주성을 뒤로 하고 중앙유등시장을 지나 진주교회로 향했다. 진주교회는 진주 지역 최초의 기독교회다. 호주선교회 커렐(Dr. Hugh Currell, 한국명 거열휴) 선교사가 1905년 설립했다. 그는 호주선교부 최초 의료선교사로 1902년 5월 19일 부산에 도착해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다 부산 대신, 서양 의사가 전혀 없었던 진주 근무를 자원했다. 조수였던 박성애 부부와 함께 1905년 10월 20일 진주로 이주했다. 초가집 일부를 예배처소로 정하고 예배드리기 시작했는데, 그곳이 바로 진주 최초의 기독교회인 진주교회의 시작이다.
진주는 경남 제일의 양반도시이자 배일사상이 강했던 곳이다. 그런 곳인 만큼 선교가 녹록치 않았다. 커렐 선교사 부부는 의료, 교육 사업을 통해 선교를 시작했다. 교회 주변에 학교와 병원을 설립했다.
거주하던 집의 작은 방을 시약소로 열었다. 이 시약소는 1913년 호주선교회의 후원으로 배돈병원(培敦病院)으로 발전했다. 경남지역 최초 서양식 근대병원이다. 1939년 배돈병원 진료기록에 의하면 연간 외래환자가 17,620명이나 됐다고 한다. 당시 진주의 인구가 약 47,200여 명이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돈병원을 찾았는지 알 수 있다.
커렐 선교사는 교육 사업에도 공을 기울였다. 1906년 남녀학교를 시작하게 되는데, 시원여학교와 광림학교다. 그는 서양식 근대교육과 여성교육에 힘썼다.
진주는 계급의식이 강하고 보수적인 곳이다. 이런 곳에서 혁명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양반과 백정이 같은 공간에서 예배드리게 된 사건이다. 1909년 5월 9일 라이얼(D. M. Lyall) 목사가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차별 없이 평등하다”며 15명의 백정 신도들을 양반과 합석시켰다. 이에 반발한 일반인들은 교회를 떠나버렸다. 라이얼 목사, 스콜스(Nelle R. Scholes)와 켈리(Marry Jane Kelly) 선교사의 끈질긴 설득에 극적으로 화해했다. 같은 해 8월 1일부터 양반과 백정의 합석예배가 드려졌다. 이 사건은 신분차별을 없애는데 앞장선 형평사운동의 배경이 된다.
호주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성장한 진주교회와 광림학교, 배돈병원은 진주 지역 3.1만세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3월 18일 진주교회에서 알리는 정오 종소리에 맞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진주교회 성도와 광림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적극 참여했다.
일제의 기도교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다.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에 호주 선교회는 신사참배 반대 방침을 정했다. 일제는 호주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시원여학교를 강제 폐교해 버렸다(1939년). 호주 의사와 간호사들이 떠난 배돈병원도 결국 문을 닫았다.
해방 후 배돈병원은 일제에 의해 징용 갔다 돌아온 귀환동포들의 수용소가 됐다. 극빈자 수용시설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다 한국전쟁 때 미군의 집중폭격으로 배돈병원은 완전히 사라졌다. 인민군이 배돈병원에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했던 게 화근이었다. 미군이 교회와 병원은 폭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오판이었다. 폭격으로 초토화된 병원은 결국 복구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진주교회에서 오른쪽으로 100m 정도 가면 조그만 공원이 나온다. 마침 할머니 몇 분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 공원 한켠에 이곳이 배돈병원과 광림학교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스쳐 지나갈 뻔했다. 생경 맞게 세워진 표지판만이 이곳이 진주 선교 부흥의 진원지였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교만하고 사치함은 제2의 고린도성이라… 사망의 길로 밀려가는 것을 어찌 다 형언하리오.”
커렐 선교사가 처음 진주로 왔을 때 묘사한 상황이다. 당시 진주가 얼마나 영적으로 참담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선조들의 기개와 충절이 서린 곳, 그러나 타락한 고린도성과 다름없던 곳 진주. 이곳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교육과 의료선교에 매진한 호주 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에나 진주길’ 걷기 여행
진주시를 여행하는 특별한 코스가 있다. 바로 ‘에나 진주길’ 코스다. ‘에나’는 진주 사투리로 ‘참’, ‘진짜’라는 뜻이다. 진주성을 출발해 진주유등시장, 진주교회, 비봉산과 선학산을 거쳐 남강을 거슬러 다시 진주성으로 되돌아오는 순환형 걷기 여행길이다. 총 15km로, 소요시간 5시간이다. 재래시장의 소박하고 활력있는 모습, 진주의 자연환경, 기독교 유적 등 진흙 속에서 진주(珍珠)를 찾는 색다른 진주 여행길이다.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