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_ 기독교와 3·1운동
3·1운동의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다
일제의 폭정에 굴하지 않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3·1운동에 깃든 기독교 정신 … 부활, 순교, 비폭력 평화주의
오늘은 3·1절(삼일절)이다.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기는 뜻 깊은 날이다. 그런데 3·1절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젊은이들이 있다고 한다. 3·1절을 ‘삼점일’로 읽는 학생들도 있다고 한다. 역사교육을 등한시하는 현 교육정책이 낳은 안타까운 결과다.
삼일절은 1919년 3월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뒤 평화적인 시위를 벌인 날이다.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3·1운동의 중심에 기독교가 있다. 3·1운동에 있어서 기독교 선조들의 공헌이 그만큼 컸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기독교계 인사가 16명이나 된다. 불교계 2명, 천도교계 15명이다. 3·1운동의 역사와 의의, 기독교 선조들의 공헌을 살펴봤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삼일절 노래’의 첫 구절이다. 노래 가사처럼 3·1운동은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정오에 시작됐다.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이에 호응한 각계각층의 참여로 1년 가까이 지속된 대규모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총칭한다.
구한말 조선은 진퇴양난이었다. 왕실의 무능과 집권계층인 사대부의 부정부패에 농민과 하층민들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제국주의가 한창이던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한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폈다.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를 차단한 것이다. 이 시기 일본은 미국 페리 함대의 협박으로 쇄국을 포기하고 개항했다. 그리고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사회로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그렇게 근대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 메이지정부는 구미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조세를 개혁하고, 징병제를 실시했다.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력 강화에 주력했다. 국력이 강해진 일본은 1976년 2월 26일, 강화도에서 한일수호통상조약, 일명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의 강요로 맺게 된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로부터 30년도 되지 않아 조선은 일본에게 완전히 외교권을 빼앗기고 국권마저 강탈당하고 말았다. 그 사건이 바로 1905년 을사늑약이다.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한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통감부를 설치하고 식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했다. 사실상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탄조약이 공포함으로써 한국 식민지화를 완성했다. 이 사건이 경술국치(庚戌國恥)다.
3·1운동, 서막이 오르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가혹했다. 일제 군대와 경찰들은 악랄한 무단통치를 시작했다. 토자조사사업을 벌여 농토도 강탈했다. 한민족 말살정책을 펴기에 이르렀다. 이에 민중들의 저항과 독립의식은 날로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고종의 서거와 ‘2·8독립선언’은 3·1운동이 일어나는데 기폭제가 되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갑자기 서거했다. 일본은 이 사실을 하루 숨겼다가 다음날인 22일, 사인이 뇌일혈이라고 비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일제와 친일파에게 고종은 그야말로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고종 독살설이 유포되기 시작했고, 고종에 대한 애도는 일본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3월 3일 고종의 인산(因山, 임금의 장례를 뜻함)을 기해 전국에서 수많은 유림들과 유력인사들이 대거 상경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쿄에서 재일조선인유학생 600여 명이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투쟁 의지를 천명한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2·8독립선언이 귀국한 유학생들을 통해 빠르게 전파됐다. 그렇게 3·1운동의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었다.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없던 당시 사회에서 대규모 거사를 모의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천도교의 손병희,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계의 한용운을 중심으로 단일조직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각 학교, YMCA청년 대표들과 긴밀히 연락하며 거사를 도모했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일에도 만전을 기했다. 비밀 인쇄된 독립선언서 2만1000장이 서울, 평양, 임실, 용강, 해주, 원산, 의주 등지로 철도편으로 전달됐다. 그렇게 3월 1일 이른 아침부터 집집마다 독립선언서가 배달됐고, 곳곳에 격문이 붙었다.
3월 1일 정오 종로 인사동에 위치한 태화관(음식점)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늦게 도착했거나 중국으로 피신한 4명을 제외한 29명이 모였다.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만세 시위는 서울을 시작으로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서울, 평양, 진남포, 의주, 선천, 원산에서 폭발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는 222개 부(府), 군(郡)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났고, 중국 동부, 만주, 러시아 연해주, 미국, 일본 등 이역만리의 재외동포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짧은 시간 안에 한반도는 물론 해외 각지로 3·1운동 소식이 전파된 데에는 인쇄된 독립선언서 전파가 큰 역할을 했다. 시위에 참여했거나 목격했던 사람들의 입소문, 고종의 인산을 보기 위해 상경했다 귀향한 사람들이나 서울 유학생들의 귀향 보고 등도 시위 확산과 지속에 일조했다. 오산, 숭실, 신성, 양실학교 등 종교계 학교를 비롯한 200여 학교의 동맹휴학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3·1운동은 일제의 강제진압과 무자비한 탄압으로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하지만 3·1운동 정신은 이후 여러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에 계승됐다. 4월 11일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채택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3·1운동에 기초해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무려 26년 동안 독립투쟁과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체가 되었다.
교회는 고난 받는 민족의 이웃
3·1운동의 중심에 기독교가 있다. 3·1운동에는 기독교정신이 발현되어 있다.
1884년 알렌 선교사가 처음 조선에 발을 내딛은 이후,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병원과 학교를 세웠다. 교육선교와 의료선교에 앞장섰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숭실학당, 부산진일신여학교, 정신여학당, 계성학당, 신명여학교, 광림학교, 시원여학교 등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집중했다. 선교사들은 조선에 복음이 들어오고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약 30여 년 동안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특히 당시 소외된 어린 여학생들에게 신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반상의 차별도 없앴다. 복음과 더불어 교육으로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헌신과 열정은 3·1운동 전후 나타난 다양한 사건들 속에서 확인됐다.
3·1만세 운동의 배후에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교회가 있었다는 증거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성들이 만세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교회 여전도회 조직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의 열기가 확산되어 갔다. 유관순 열사가 대표적인 예다. 3·1운동의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은 교회와 학생들의 주도하에 일어났다.
독립선언서의 공약을 봐도 기독교정신이 깃들어 있다.
첫째, 부활정신이 나타나 있다. “남녀노소 없이 음울한 고소에서 활발히 기래하야 만휘군상으로 더불어 흔쾌한 부활을 성수하게 되도다.”
만세운동을 탄압하는 일제의 칼날과 총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 것, 모진 고문 앞에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죽음 저편의 부활의 세계를 보았기에, 죽음을 초월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렇게 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둘째, 순교자적 정신이 깃들어 있다. 순교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기독교는 순교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종교다. 순교의 역사가 곧 기독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칼을 앞세운 일본 군경 앞에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맞설 수 있었던 용기는 순교자적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셋째, 3·1운동은 비폭력 평화주의 운동이었다.
“오직 자유의 정신을 나타낼 것이며, 남을 배척하는 감정으로 그릇되게 달려 나가지 말라”,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든지 밝고 정당하게 하라.”
일본의 침략에 항거해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한 목적으로 일어났지만 철저히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일반적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주요 수단은 무장봉기를 해 적군에 물리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3·1운동은 폭력을 동원한 무장봉기가 아니었다. 일제의 살인적인 진압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3·1운동의 방법이었다. 이는 강포와 무력을 멀리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기독교정신의 발현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들에게 잡히실 때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도 있었지만(마 26:53),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비폭력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다.
교회가 정착한지 불과 30여 년. 기독교는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3·1운동 직후 기독교는 교회폐쇄, 성도 수 감소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탄압받는 민중들의 지도자로, 그들의 아픔을 나누는 이웃으로 십자가 정신을 발휘했다. 교회는 고난 받는 민족의 이웃이었다.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기독교가 중심이 된 3·1운동이 끝난 후 교회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 대표적 사건이 제암리학살사건이다. 3·1만세 시위가 일어나고 얼마 뒤 발안장날에 경기도 화성시(당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무력으로 진압하던 일본 육군은 4월15일 제암리교회 30여명의 성인 남자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 학살했다. 일본 학자들은 “조선에 주둔한지 얼마 안 되어 현지 상황에 익숙하지 못한 일부 군인이 한 ‘우발적인’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명단을 파악해 교회로 소집시킨 점과 주변 지역의 천도교 지도자까지 파악해 살해했다. 철저히 계획된 만행이었다.
기독교가 입은 피해는 이뿐만이 아니다. 총독부가 1919년 5월에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전부 파괴된 교회당 수가 17동, 일부 파괴된 것이 24동, 그 외 교회당의 손해가 41동이었다. 1919년 6월 30일 투옥된 사람의 수도 기독교인이 2,190명으로 유교나 불교, 천도교인을 합한 1,556명보다 훨씬 많았다. 당시 조선의 전 인구가 1700만 명이었는데 기독교인의 수는 2%도 채 되지 않는 3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1년 동안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수감된 자는 약 9000여 명, 이 중 기독교인이 22.4%로 가장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선조들은 멈추지 않았다.
3·1운동의 얼, 유관순 열사
유관순. 신사임당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여성이 아닐까 싶다. 올해는 유관순 열사의 순국 95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는 유관순 열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단순히 어린 소녀의 몸으로 독립을 외쳤다는 것? 그녀는 단순히 만세운동의 주역뿐만아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갈망한 실천가 중 하나였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생가 옆에 매봉교회가 있다. 매봉교회는 천안지역 3·1운동 당시 중심역할을 한 지령리교회의 전통을 계승하는 교회다. 지령리에 기독교가 전파되자 온 마을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유관순 집안도 아버지를 제외하고 예수를 믿었다. 지령리교회는 독립운동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천안 만세운동의 주도자였던 조인원과 유중무(숙부), 유우석(오빠)도 지령리교인이었다.
그녀는 공주 영명학교를 1년 정도 다니다 1915년 이화학당으로 편입했다.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던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은 누구보다 솔선수범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학업에 임했다. 일요일에는 담 하나 사이에 있는 정동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1919년 3월 1일 만세 시위가 시작됐다. 이화학당의 학생들도 같이 참여하려고 했으나 당시 프라이 이화학당 교장은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교문을 막았다. 유관순과 이화학생들은 학교 담을 넘어 시위에 동참했다.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3월 10일 휴교령이 내려졌다. 유관순은 고향으로 내려와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을 주변에 알리고 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아우내 장날인 4월 1일을 기해 거사를 시작하기로 계획했다. 이날은 음력으로 3월 1일이어서 서울에서 시작한 3·1독립운동의 뜻을 살리기에 좋은 날이었다.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의 시위운동을 위해 수십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연락하며 시위운동을 조직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4월 1일 당일, 아우내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에 놀란 일본군은 총칼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이날 시위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가 현장에서 일본군에 의해 죽고, 유관순과 오빠 유우석, 유중무는 체포됐다.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제1심 공판에서 유관순은 7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받은 형량이 최고 3년이었던 것을 볼 때, 유관순이 시위운동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고, 일본 검사와 판사에 굴하지 않고 얼마나 당당하게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에 항소한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1921년 1월 2일 출옥 판정)을 확정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그러나 체포될 당시 입은 부상과 갖은 고문과 열악한 형무소 생활에 출옥을 몇 달 앞둔 1920년 9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사망하고 만다. 만 17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이다. 꽃다운 소녀였다. 그러나 일제에 분연히 일어나 항거한 용기와 모진 고문과 부당한 판결 앞에서도 의연했던 그녀는 그 어느 성인보다 위대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가치를 우리는 가슴에 기억해야 한다.
3·1정신을 기억하자
약 10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은 일제의 폭압에 항거해 비폭력 평화주의 운동인 3·1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3·1운동에 관해 너무 모르고 있다. 오히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광복절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8·15해방만큼 3·1운동은 중요하다. 3·1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이후 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3·1정신’이라는 말은 있으나 8·15정신이라는 말은 없는 것처럼, 3·1운동이 우리 민족에게 끼친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3·1운동은 단순히 역사책 속의 한 줄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희생 덕에 지금 우리는 평화와 풍요 속에 살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3·1운동 때 외쳐진 ‘자유’를 먹고 산다. 3·1운동은 우리 현대사의 기본을 만들고 기반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3·1운동 정신을 되새기고 계승해야 하는 이유다.
*기미독립선언서 공약 삼 장
一. 오늘 우리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한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나타낼 것이며, 남을 배척하는 감정으로 그릇되게 달려 나가지 말라.
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뜻을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一.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든지 밝고 정당하게 하라.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