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회, 암흑의 시대를 지나 세계 선교를 꿈꾼다
‘선교사의 무덤’이라고 불렸던 영적 불모지 일본 땅에 새로운 부흥의 바람이 일고 있다. 150년 전 요코하마 항을 통해 일본 땅에 미국 선교사들의 선한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한국교회도 20세기 초 유학생 및 재일교포 선교를 시작으로 현재 1,200여 명의 한인 선교사들이 다양한 사역을 통해 일본 선교에 힘써 왔지만 가시적인 효과는 더디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 150주년을 맞은 일본은 이제 복음화 1%를 넘어서서 세계 선교를 꿈꾸고 있다. 온누리교회는 전략적 일본 선교를 위해 2년 전부터 문화전도집회 ‘러브소나타’를 11회에 걸쳐 진행해 왔다. 또한 CGNTV를 통한 방송선교 사역을 통해 일본의 크리스천들을 일으켰다. 또한 잠자는 일본 목회자들을 깨워 연합의 물꼬를 텄다. 수차례의 대형 전도집회 등을 통해 일본 교회가 자신감을 얻어 이번 ‘일본 기독교 선교 150주년 기념대회’를 자체적으로 준비하고 진행했다. / 임재금 기자 ljg14@onnuri.org ■ 일본 선교의 발자취 … 일본 기독교 선교 150주년 기념 영상 요약 자비엘 선교사에서 오늘까지1549년 8월 15일 스페인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엘이 2명의 일본인과 함께 가고시마에 상륙했다. 그리스도 교회가 일본에 전파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1587년 천하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리스도교 금지령을 발포했다. 당시 선교사 국내 퇴거를 명령한다.1597년 2월 5일 교토신자명부에 따라 2명의 외국인 선교사를 포함해 26명을 나가사키 니시자카 언덕에서 처형한다. 이후 270년간 기독교는 암흑시대로 들어간다.1837년 카나가와현에 나타난 배를 영국군함으로 착각하고 공격한 모리슨호 사건이 발발했다. 이 배에는 최초의 일본어 성경인 요한복음을 출판한 큐추라와 그 동역자 오토키치 일본인 표류민이 타고 있었다. 1846년 류큐왕국의 영국 해군 류큐전도대에서 벧델하임이 파견되었다. 그는 8년간 전도했지만 박해가 심해져 미국행을 결심, 홍콩, 유럽에서 류큐어 성경을 출판했다.1858년에는 하리스에 의해 일미 통상조약이 맺어져 쇄국체제가 붕괴됐다. 이에 따라 요코하마, 나가사키, 고베 등의 5개 항을 열었고, 거류지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어 일본 개신교 전도의 막을 열었다. 일본 선교의 시작1859년 미국성공회 선교사 리긴즈, 윌리암즈 나가사키항에 입국했다. 그는 동경 츠키치 외국인 거류지에 사립 릿쿄학원을 설립했는데 이 학교는 후에 릿쿄대학이 된다.헤본식 로마자의 창시자로 유명한 미국 장로교회의 헤본은 1859년 쿠라라 부인과 함께 방일한다. 그는 카나가와의 쵸부츠지에 정착해 의료뿐 아니라 성경번역에 매진한다. 1862년 프랑스 파리외국선교회의 바르테르미 지랄 사제는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주지 안에 성당을 건설하고 일본어로 설교를 시작했지만, 막부에서는 일본인의 성당 출입을 엄격히 규제했다. 그러나 크리스천에 대한 대 탄압은 다른 나라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고 그 비난을 이기지 못한 메이지 정부는 1873년 드디어 크리스천 금지 코우사츠(현판)를 제거함으로써 그리스도 선교를 묵인했다. 사실상 그리스도교의 부활이었다. 그리고 선교사 바라부처에 의해 오시카와 마사요시를 비롯한 9명이 세례를 받고, 일본 최초의 개신교회 일본기독공회가 설립되었다. 이 공회는 후에 요코하마해안교회가 된다. 자유민권운동 시대1872년 전국에 미션스쿨이 설립되었다. 1889년 미국 YMCA의 책임자 워셔드가 방일, 제1회 하기학교에 참가해 이것이 학생 YMCA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1903년 YWCA가 설립된다. 1910년 에딘바라에서 열린 세계선교회의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이라고 불리는 교회공동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일환으로 전국 공동전도가 실시되었다. 또한 국제선교협의회의의 권유로 일본 그리스도교연맹이 결성되었다. 군국주의와 그리스도교1931년 만주사변 이후 군부가 급속히 세력을 뻗어감으로 일본은 우경화 되어 갔다. 당시 일본 그리스도교연맹은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았지만 일본 국제연맹 탈퇴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었다. 신사참배를 인정하며 조선교회에도 권하면서 군국주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1939년 종교단체법의 제정에 의해 군국주의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된다. 그리스도교를 향한 군부의 압력은 더욱 격렬해져서 외국인 선교사와 교사를 추방하게 된다. 전후의 발자취1945년 11월 미국 개신교에서 시찰단 4명이 일본을 방문한다. 그들은 피해 상황을 시찰한 후 귀국해 즉시 구제를 요청했다. 전후 교회에 보내준 물자 중에서 특히 환영 받은 것은 성경이었다. 일본성서협회는 현대어역을 개정하기로 하고 1955년 구어역 일본어성서를 완성한다. 1948년에는 일본 그리스도교협의회 NCC가, 1968년에는 일본복음동맹 JEA가 설립되어 가맹된 초교파, 모든 단체가 협력해 선교사역에 매진했다. 1959년 11월 3일 선교 100주년 기념대회가 동경체육관에서 개최되었다. 행사장에는 8,000명이 모여 과거 100년의 감사와 앞으로의 결의를 다짐했다. 1967년 일본 그리스도 교단은 제2차 세계전쟁에 대해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아시아의 사람들에게 사죄했다.1987년에 일본 최초의 신공동역성서가 완성되었다. 개신교 중에서도 복음파, 성령파를 중심으로 많은 교회 그룹이 일어나 상호 간의 연계, 여러 외국과의 제휴 관계를 맺으면서 여러 가지 전도사역이 이어졌다. 일본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거치며 전개되어 왔다. 앞으로도 아시아를 시작으로 열방 중의 교회와 신도들과 함께 교류와 연대를 갖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토대로 일본의 부흥, 세계 선교를 사명으로 나아갈 것이다.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