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사관학교> '좋은 언어의 중요성'
장경철 교수(서울여대 기독교학과)
‘좋은 언어의 중요성’
몇 가지 원리를 통해 우리의 나쁜 습관을 제하고 좋은 습관을 접하는 계기를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원리는 이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운동을, 우리의 정신은 미소를, 우리의 영혼은 사랑한다는 한마디를!”. 그 중 세 번째 원리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사랑한다는 한마디가 필요합니다. 그만큼 언어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씨앗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씨앗은 말씀입니다. 말씀 곧,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언어는 ‘정신의 양식’
언어는 어떤 힘을 갖고 있을까요. 첫 번째는 인간정신의 양식 역할을 합니다. 음식을 못 먹으면 영양실조에 걸리듯, 좋은 언어를 섭취하지 못하면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자존감이 건강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인간관계에서 부작용이 많이 생깁니다. 기독교는 창조론적인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사건이나 특정한 환경이 나쁘다고 보지 않습니다. 우린 부작용이 문제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부작용이 왜 생길까요. 열등감이 있으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열등감은 무엇일까요. 겉모양을 알기 위해서는 사람은 거울을 통해 확인하고, 자신의 가치를 알기 위해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그림을 자아상이라고 하는데 낮은 자아상에 대한 문제를 열등감이라고 합니다. 열등감의 부작용은 해석의 오보를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알아서 상처받는 일이 종종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열등감이 있으면 사실이나 언급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받아들이는 저항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이것이 부작용입니다. 현재나 미래의 가능성을 인정받는 언어로 섭취 받지 못함으로 자존감 수위가 지속적으로 낮아집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식생활 습관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좋은 언어는 건성으로 받아들이고 좋지 않은 언어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말을 건넨 의도와는 다르게 스스로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우리는 나쁜 말을 이기는 좋은 언어를 더 많이 섭취해야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저의 열등감은 다양했습니다. 신통찮은 책을 읽을 때는 열등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괜찮은 책을 읽으면 열등감이 생겼습니다. ‘저자는 첫 번째 문장을 쓰고 두 번째 문장이 어떻게 생각났을까?’ 이런 것들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이것을 내 노트에 옮겨 적고 읽고 또 읽으면 이런 사고구조가 나에게도 생길까’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 생각이 적중했습니다.
지금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0이라고 생각하고 오늘부터 들리는 것 가운데 괜찮은 것들을 자신의 언어의 창고에 쌓아둬 보십시오. 저는 이것을 남의 말을 나에게 옮긴다고 해서 ‘유통업’이라고 표현합니다. 저는 이 유통업을 하면서 열등감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유통업은 창고와 진열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 언어의 창고에 좋은 언어로 재고로 장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좋은 언어를 내어놓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학교에서는 잘 깨달았는가를 확인하기위해 시험을 치듯이 인생을 제대로 이해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소원이 바뀌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서는 내 언어의 창고에 좋은 단어를 차곡차곡 재고에 쌓아두는 것이 제 소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내 귀에 들리는 말들은 절대로 그냥 나가지 않는다는 전략을 취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해답도 유통에 있습니다. 인생은 내게 우연히 찾아오는 것들을 내게 오래 머물 수 있도록 만드는 기술을 습득하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들은 좋은 말들이 간직되지 않고 나중에 사라져버리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듣고 남에게 옮기지 않은 것은 다 사라집니다. 내가 무엇을 잊었는지조차 깨끗이 잊으면서 사라집니다. 반대로 건성으로 들었어도 남에게 옮기면 남습니다. “형식을 간직하고 내용을 교체하자”는 것이 저의 전략입니다.
‘그릇’ 역할을 하는 언어
언어가 왜 힘이 있을까요. 두 번째 이유는 언어는 모든 존재와 관계와 체험의 그릇역할을 하기 떄문입니다. 형식 즉 그릇은 굉장한 혜택이 있습니다. 형식은 내용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합니다. 형식이 없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상대방이 많이 줬다고 하는데 하나도 받지 못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봅시다. 이 괴리는 받는 사람의 그릇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늘에서 비가 엄청나게 많이 내려도 양동이가 뒤집어 있으며 한 방울도 들어오지 않는 것이고, 작으면 그 그릇만큼만 들어옵니다. 즉 언어는 상대방이 내게 영향을 끼친 그릇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체험을 하고 아무리 엄청난 혜택을 준다할지라도 언어 가운데 담아내지 않는다면 이것들은 시간에 의해 소멸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들에 대해 이름을 다 기억하고 그 이름을 통해 이것을 보존(시간과 시간 사이의 간격의 메우는 것)과 전달(공간과 공간 사이를 메우는 것)의 간격을 메워보십시오. 좋은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언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칭찬을 잘하려면 스스로 무언가를 잘 했을 때 흐뭇함의 정서가 있듯이 그 흐뭇함의 정서를 느낀 사람은 무엇인가를 잘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냥 지나가지 않고 칭찬을 하게 됩니다. 내가 언어를 알고 담아두는 것을 통해서 관계와 사업에 순기능을 하게 만드는 언어가 좋은 언어입니다. 좋은 언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칭찬’과 ‘인정’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칭찬은 상대방이 잘하는 것을 잘했다고 말하는 것, 상대방 안에 있는 좋은 점을 좋다고 하는 것, 상대방에게 있는 것을 있다고 언급하는 것 이 세 가지의 정의가 있습니다. 칭찬과 인정의 언어는 좋은 언어입니다. 이 좋은 언어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조작적이지 않습니다.
좋은 언어를 사용하는 추천하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신앙적인 언어를 일상적이고 충격적인 사례를 통해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사람이 자신의 머리카락 수는 능히 헤아릴지언정 자신의 염려의 숫자는 결코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 염려의 숫자가 이렇게 많고 다양하다면 우리 기도의 숫자도 역시 많고 다양해져야 합니다. 마치 연금술사들이 모래에서 금을 캐어내듯이 모든 신앙인들은 염려 가운데서 기도를 캐내어 연금술사들이 되어야합니다”라고 합니다.
앞으로의 목회는 옳은 목회보다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목회도 한가지의 방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의 속성은 보고 또 보고 싶게 만들고, 듣고 또 듣고 싶게 만듭니다. 스펄전은 이런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입니다. 신학교는 다녔지만 신앙이 어떻게 짜임새 있게 연결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곤경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추천합니다. 순전한 기독교를 뼈 속에 심을 정도로 읽고 또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그리움은 말을 하려해도 말을 할 수 없고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말을 하려해도 말을 할 수 없는 까닭은 단 한번도 충만하게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 대상을 향한 그리움인 까닭이다.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까닭은 우리의 삶속에서 끊임없이 은연중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그리움인 까닭이다. 마치 연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들리면 어쩔 수 없이 티를 내는 것처럼….”⌜영광의 무게⌟ 책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영생이라든지 기쁨이라던지 충만이라던지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주는 상품 같은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안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분수에 물보라 같은 것들이다. 촉촉해지길 원한다면 물 가까이 가야한다. 따뜻해지길 원한다면 불 가까이에 가야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이 어찌 시들어서 메말라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과 연합한 생명이 어찌 영생을 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순전한 기독교⌟ 책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시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나의 사람으로 나를 사랑했을 때 참 많이 노력해야 했습니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내가 나의 사랑으로 나의 남편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울어야 했습니다.
남편을 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내가 나의 사랑으로 나의 아이들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화를 내야 했습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내가 나의 사랑으로 동료들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참아야했습니다.
그들을 사랑해야한다는 윤리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람으로 사랑하다보니 사랑하는 일이 쉬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일이 기쁨이 됩니다.
사랑하는 일 그 자체가 감사가 됩니다.
/ 정리 조은실 기자 ces@onnuri.org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