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죽기까지 충성했던…”흩뿌려진 성경책, 교회 세우다

 

■ 조선시대 회심사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요 12:24).

2014년은 한국에 선교사가 입국한지 130년 되는 해다. 1884년 알렌(H.N.Allen)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고 나서 복음의 문이 열렸고, 130년이 지난 오늘날의 한국은 전 세계 2만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로 성장했다.

한국이 지금에 이르는 선교강국이 되기까지는 복음을 지켜나가는데 목숨을 걸었던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의 희생이 있었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 처음 성경을 마주했던 시절을 더듬어본다. 공식적으로 선교 활동이 시작되기도 전에 성경을 접하고 성령님을 체험한 선조들의 이야기와 신앙을 굽히지 않았던 그들의 순교사건을 살펴보면 죽기까지 충성함으로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목숨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던 시대와 편안하고 달콤한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대조되며 오늘 우리가 제대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인지 자문하게 될 것이다.

/ 정지은 기자

 

 

 

 

젊은 청년 목사의 순교, 한국 선교 부흥의 초석 되다

 

 

한국 선교의 비전 꿈꾸던

한국 최초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

 

토마스 목사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 Thomas) 목사다. 1840년 9월 영국 웨일즈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목사는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아내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서 아내가 죽고, 그는 선교사직을 내려놓고 중국 해상세관에 통역으로 취직한다. 그곳에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윌리엄슨 목사를 만나 선교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불태운다. 그러던 중 토마스 목사는 우연히 한국에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산동성으로 피난 온 김자평 등 세 명의 청년을 만난다. 그들에게서 한국 박해 이야기를 들은 그는 한국선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1865년 9월, 그는 한문성경을 갖고 떠나 황해도 연안 창린도에 도착했다. 두 달여 동안을 그곳에 머물며 섬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고 전도를 한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다음으로 한국을 방문한건 일 년 후인 1866년. 때마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무역을 위해 한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통역관으로 동승했다.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만경대에 당도하자 평양 감영의 문정관이 그들에게 퇴각을 요청했다. 당시 한국은 외국과의 무역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요청을 무시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신부를 학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통상과 교역을 강요했다. 조선의 군민들은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포를 쏘았다. 무역선답지 않게 중무장을 하고 있던 제너럴 셔먼호도 소총과 대포로 응사했다. 이런 와중에 장마비로 불었던 대동강물의 수량이 줄어들자 제너럴 셔먼호는 강바닥에 좌초됐다. 배에 있는 선원들과 해변에 있던 조선 군민들 사이의 간헐적인 교전은 수일간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조선 군민 중 사상자가 발생했고, 평양감사 박규수는 화공으로 셔먼호를 불태웠다. 선원들이 강으로 뛰어들어 헤엄쳐 나오자 군민들은 그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벽지에 바른 성경 읽었더니…

 

박춘권

토마스 목사는 성경 몇 권을 품고 강으로 헤엄쳐 나왔다. 토마스 목사가 강변에 다다르자 박춘권이 칼로 그를 죽였다. 죽기 전 토마스 목사는 ‘예수!(Jesus Christ)’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있는 힘을 다해 성경책을 육지 쪽으로 던졌다. 자신을 죽이려는 박춘권에게도 한권 건냈으나 받지 않자 모래사장에 던졌다.

박춘권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자신이 의인을 죽였다는 가책으로 성경 하나를 챙겼다. 그 뒤 약 30년의 시간이 흐른 뒤 60대의 노인이 되었을 때 그는 성경을 정독한 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그는 평양에서 선교하고 있던 목사 마펫(한국명 마포삼열)에게 세례를 받았고,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안주교회 영수(領袖)가 되었다.

그 혼잡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군중 속에 열두 살 소년 최치량이 있었다. 그는 토마스 목사가 뿌린 성경 세 권을 주워 들고 있다가 한권을 박영식에게 주었다. 박영식은 그 성경을 한 장씩 뜯고 집에 벽지로 발랐다. 후에 박영식의 집터에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됐고 나중에 평양대부흥의 근원지였던 장대현교회가 됐다.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는 박영식의 집에 들렀다가 벽에 발라진 성경을 읽고 감동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후에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성경 번역에 큰 공헌을 했다. 1893년부터 곳곳에 교회를 세운 마포삼열 선교사에 따르면 자신이 평양 일대에 교회를 세울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 중 많은 수가 토마스 목사가 던진 성경을 읽고 교회를 찾은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성경 들고 있던 열두 살 최치량,

장로 되어 교회도

 

 

토마스 목사가 뿌린 성경을 들고 있던 열두 살 소년 최치량은 1854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관업을 하던 박영식 밑에서 여관 종업원 일을 했다. 여관 벽은 성경 말씀으로 도배되어 있었는데 투숙객들을 통해 그 여관이 깨끗하고 좋은 글씨로 뒤덮여있다는 소문이 돌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마펫 선교사는 조사 한석진의 안내를 통해 이 여관을 방문했다. 여관방에 들어간 한석진과 마펫 선교사는 깜짝 놀랐다. 이때 여관주인이 성경이 들어오게 된 배경을 설명하자 그들은 고개를 끄덕하며 하나님 섭리에 놀랐다고 한다.

이후 한석진 조사는 최치량의 회심에 큰 도움을 준다. 이렇게 해서 전재숙, 박정국 등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들은 평양 선교에 힘을 보태게 된다. 최치량과 한석진은 여관에서 가까운 홍종대의 소유지인 초가집을 매입해 예배를 드렸는데 이는 널다리예배당이 되었으며, 후에 장대현으로 이사하면서 장대현교회라 불리게 됐다. 최치량은 장대현교회의 초대장로가 됐다.

 

 

첫 세례자 노춘경, 목숨 건 세례

 

 

일명 노도사로 불리던 노춘경은 반기독교적 문헌을 읽다가 기독교에 관한 교리를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기독교는 서양의 종교이므로 이를 알기 위해 서양인과 사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의료선교사였던 알렌의 어학선생을 필두로 헤론, 스크랜튼의 어학선생을 맡으며 기독교를 접했다. 알렌 선교사의 방에서 한문으로 쓰여진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발견해 몰래 들고 나가 정독하기도 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는 한문 사복음서와 중국어 성경주석, <성당수위>, <심령의 구원> 등의 전도서적과 <야소교교리이지>라는 소책자를 얻어 탐독했다.

1886년 7월 그는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에서 세례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됐다. 당시는 선교사들이 정식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지 못해 서양 선교사들의 걱정이 컸다. 노춘경은 ‘최악의 경우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 다음은 1886년 7월 24일 아펜젤러 선교사가 쓴 일기 중 한 부분이다.

“우리로서는 그 의식이 대단히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게 될 매우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 분께서 그를 지키시리라고 확신한다.”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 순교의 자리, 교회 세워지다

 

토마스 기념교회 1932

1. 토마스 기념교회

1866년 9월 2일, 27세 나이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기념해 설립된 교회다. 한국교회는 1927년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토마스 목사가 묻혀 있는 쑥섬에서 1천여 명의 교인이 모인 가운데 추모예배를 드렸다. 1932년에는 토마스 목사의 이름 첫 스펠링 ‘T’자 모형으로 기념예배당이 건립됐다.

 

장대현교회

2. 장대현교회

1893년 6월 평양에 지어졌다. 1894년 학습받은 신자가 22명, 세례받은 신자가 7명이었다. 1905년에는 길선주, 박치록 등이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이는 1907년에 있었던 한국 기독교 영적 대부흥의 계기가 됐다. 어느 날 형사가 장대현교회에 가면 범인을 잡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가 길선주 장로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소래교회

3. 한국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

소래교회는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해 들여와 전도한 한국 최초의 권서인(서적행상인) 서상륜과 소래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한 서경조 형제가 중심이 돼 설립한 교회다. 소래교회가 세워진 것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의 일이었다.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으나 총신대 양지캠퍼스를 방문하면 복원된 소래교회를 볼 수 있다.

 

 

 

 

 

■ 기독교 역사, 더 알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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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02-2226-0850

작성자  정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