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충북지역과 청주를 사랑한 이방인들

밀러 선교사 기념비대한민국 기독교, 그 찬란한 역사를 만나다

 

밀러 선교사와 로건 부인을 회상하다

 

 

1906년 충북지역에 대홍수가 닥쳤다. 200여 명의 주민들이 청주 탑동 언덕으로 피신했다. 당시 충북지역 선교를 위해 몸 바쳤던 프레드릭 밀러(F. S. Miller, 민노아) 선교사는 일신여고 관사와 부속건물 일부를 제공했다. 자신의 집을 개방해 주민들에게 먹을 것을 건네고, 위로했다. 그러는 동시에 복음도 전했다. 그 모습에 지켜본 주민들이 감격했다. 그렇게 청주지역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 이야기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는 1866년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태어났다. 피츠버그대학과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892년 11월 15일, 아내 안나 밀러(Anna R. Miller)와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았다.

밀러 선교사는 한국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1893년에는 서울 예수교학당(경신학당)의 책임자가 되면서 학교이름을 민노아학당으로 바꿨다. 선교와 교육에 힘썼던 그는 안창호 같은 훌륭한 인물을 길러내기도 했다. 1895년 세워진 연동교회의 기초를 다지는 역할도 했다. 충북 땅에 처음으로 조직교회가 생긴 것은 밀러 선교사와 김흥경에 의해 1904년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가 세워지면서부터였다.

밀러 선교사는 가족들을 잃는 고통도 겪었다. 1898년 밀러 부부의 첫 번째 아들 프레드 밀러(Fred S. Miller)가 출생한지 8개월 만에 사망하고, 둘째 아들 프랭크 밀러(Frank Miller)도 1902년 3월 7일 출생한지 하루 만에 사망했다. 아내 안나 밀러는 이듬해 1903년 6월 17일 3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혼자가 된 밀러 선교사는 제3대 정동여학당장 도티(Doty Susan A.)와 재혼했지만 1931년 두 번째 사별을 한다. 이후 딘(Dean M. Lillian)과 재혼했다.

 

44년 동안 흘린 땀과 눈물

 

밀러 선교사는 1906년부터 카긴(E. Kagin) 선교사와 함께 탑동 야산을 당시 26원에 사들였다. 그리고 나무를 베고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 외국 선교사들은 선교와 의료, 교육활동, 거주를 위해 건물을 지었다. 밀러 선교사도 건물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청주 탑동 일신여고 안에 있는 최초의 서양식건물 청주탑동양관(충북유형문화재 133호)이다.

탑동양관은 충북지역 대홍수 때 주민들의 피난처로 제공됐다. 그는 1930년까지 25년 동안 5만여 평의 땅에 붉은 벽돌과 함께 기와를 얹어 동서양이 혼합된 건물들을 차례차례 지었다.

밀러는 청주지역에서만 44년 동안 선교활동을 했다. 청주제일교회를 시작으로 청남학교, 청신여학교, 청서학교, 청북학교 등 여섯 개 학교를 세워 근대교육도 실시했다. 1902년에는 장로회, 감리회의 연합찬송가 제정을 위한 ‘통합공의회 찬송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05년에는 찬송가 307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를 작곡했다.

1911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경기, 충청 노회장으로 활동했다. 1937년 10월 6일 71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그는 충청지역 선교와 교육, 서양문화 보급에 온 힘을 다했다. 그의 묘비는 일신여고 양관 앞에 세워졌다. 기념비는 1984년 9월 14일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충북노회에서 세웠다.

서울에서 140km 떨어진 충북 청주시 상당구 탑동 185-1번지에 일신여고가 있다. 청주 스테이션 유적지 중 하나다.

일신여고 입구에 들어서 본관을 지나 왼편에 있는 학교 안내도를 따라 걷다보면 포사이드기념관, 민노아기념관, 노두의 기념관, 던컨기념관, 로위기념관 등을 만날 수 있다. 밀러가 포사이드(H. M. Forsyth)의 기부금으로 1906년 완공한 건물이 바로 포사이드기념관(충북유형문화재 133-4호)이다. 학교 중앙 언덕에 자리 잡은 이 건물은 탑동양관 같이 동서양이 혼합된 건물양식을 갖췄다. 기념관 앞에는 세 개의 묘비와 한 개의 기념비가 서 있다.

세 묘비는 밀러와 퍼디(Jason G. Purdy, 부례선) 선교사와 솔타우(T. S. Soltau, 소열도) 선교사의 아들 데오도라의 무덤이다. 학교 별관 가까이 자리 잡은 던컨기념관도 던컨(J. P. Duncan) 부인이 보낸 기부금으로 지어졌다. 로위기념관은 1910년 캔자스 주 매클렁(J. S. McClung)의 지원으로 건축됐다. 선교사 주택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청주에는 20세기 초 복음이 전해졌다. 경기도 이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박해숙이라는 사람이 순회 전도를 했고, 북감리회 스웨어러(Wilbur C. Swearer, 서원보) 선교사가 청주를 방문했다. 본격적인 청주 선교는 밀러 선교사가 주도했다. 그와 한국인 김흥경을 따르던 청주 지역유지들과 청년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고 한다. 밀러 선교사와 김흥경의 땀과 노력으로 지금의 청주지역 교회들이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간 부인과 청주제일교회

 

일신여고에서 1.5km 거리에 청주제일교회가 있다. 청주 시가지의 좁은 골목 한가운데서 교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1904년 남문 밖 한 초가집에서 시작된 교회는 한옥기와집, 목조예배당 등으로 재건축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51년 증축된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일신여고 양관은 인민군들이 쳐들어오면서 야전병원으로, 청주제일교회는 인민군 사무실로 이용됐다. 이때 청주제일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공산당에게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지금도 교회 외벽에 총탄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청주제일교회 마당에는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 비석으로 알려진 ‘로간부인긔렴비’가 있다. 1919년 사망한 로간(J. V. Logan) 부인을 기념하며 1921년 건립된 것이다.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별칭을 가진 로간 부인은 1909년 3월, 53세의 늦은 나이로 한국에 온 선교사다. 남편과 사별한 지 일 년 만이었다.

이 무렵 선교사들은 대부분 정규선교사로 임명되어 재정 지원을 받고 활동했다. 하지만 로간 부인은 미국 선교부로부터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자비량 선교사로서 그녀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간 부인은 조선 선교를 향한 굳센 믿음으로 10년 동안 청주지역 여성 선교를 전담했다. 탑동에 있던 그녀의 집 방문 앞에는 짚신이 적게는 열 켤레, 많게는 40여 켤레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로간 부인은 그 정도로 마음이 따뜻한 선교사였던 것이다.

그녀는 집에서도 매주 15시간 씩 여러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이때 참여한 여성들의 숫자가 5~6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로간 부인이 살던 청주시 상당구 탑동 185-1번지에 있는 집은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3-5호로 지정되어 ‘로위(Lowe)기념관’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로간 부인은 한국말을 잘하고 충북지역과 청주를 사랑한 이방인이었다. 그녀는 청주지역 여성교육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자 여성의 근대화 의식 형성에 크게 기여한 선교사였다.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작성자  정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