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신앙의 선배를 만나다 – 두들겨 맞고, 생매장 당하면서도…

이도종 목사

 

독립운동가, 교회개척가 이도종 목사(1891-1948)

 

이도종 목사는 조봉호 순국지사와 함께 상해 임시정부에서 ‘군자금 모금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다. 전국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낮은 지역인 제주도에서 사역한 최초의 목사이기도 하다. 이도종 목사는 제주도 최초의 선교사인 이기풍 목사보다 먼저 제주도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제주도 중문교회, 남원교회, 고산교회, 도모교회 등에서 사역했다. 16년 동안 10개 교회를 세우고 전도에 힘쓴 개척자였다.

 

교회 세우는 일에 목숨 걸다

 

이도종 목사는 1891년 제주 애월읍 금성리 706번지에서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8년 이기풍 목사를 만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됐다. 그렇게 가족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제주도는 ‘이재수의 난’으로 인해 서양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때였다.

이도종 목사는 이기풍 목사의 소개로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전남노회에서 안수 받고, 제주도 출신 첫 목회자가 됐다. 그는 서귀포교회와 중문교회 등 여러 교회에서 시무하며 복음 전파에 전심을 다했다. 1937년 남원교회에서 시무하던 당시에는 제6대 제주노회장에 선출되었다. 또 후세교육의 절실함을 깨닫고 만주까지 가서 기금을 모아 제주3도 2동 905번지(현 YMCA 자리)에 제주성경학원을 세웠다.

그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부터 해방 이후까지 와해된 제주노회와 교회를 복구하기 위해 애썼다. 제주출신 목회자 강문호, 조남수와 함께 전역을 돌며 흩어진 교인과 교회를 수습했다. 그리고 화순교회의 목사로 사역하면서 순교할 때까지 교회를 세우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948년 제주에서 4.3사건이 발생했다. 7년 7개월 동안 무장대와 토벌대가 무력충돌 했다. 3만 명의 제주도민들이 사망하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제주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이다. 학살의 주범 서북청년단(1946년 북한 출신 청년들이 월남해 조직했던 극우 반공단체) 구성원의 85%가 기독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도종 목사는 4.3사건 직후 6월,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 고산에서 인성교회(현 대정교회)로 오다가 무장대에게 붙잡혔다. 혐의는 ‘양놈의 사상을 전파하는 예수쟁이’, ‘미 제국주의의 스파이’였다. 십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두들겨 맞고, 구덩이에 던져졌다. 그는 생매장 당하는 상황에서도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다. 당시 그의 나이 55세였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한 대정교회에는 이도종 목사의 유해와 순교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대정교회 성도들은 이도종 목사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대리석처럼 구멍이 없는 산방산 돌을 직접 캐다 글을 새기고, 비석을 세웠다.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작성자  정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