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독교, 그 찬란한 역사를 만나다_천안
하늘 아래 평안한 곳, 천안에 전해진 기독교
매봉교회와 유관순 열사… 3.1운동에 앞장서다
“예로부터 이르기를, 백성은 순박하고 재물은 넉넉하여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며 곡식농사에 힘쓴다.”
하늘 아래 가장 평안한 곳, 천안(天安). 조선시대부터 한양에서 경상도와 전라도로 내려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삼남요로(三南要路) 천안삼거리가 유명한 이유다. 선비 박현수와 기생 능소와의 사랑 이야기가 서린 낭만도 있는 곳이다.
이밖에도 유명한 것이 많다. 기차, 휴게소 간식의 대명사가 된 천안호두과자, 담백한 맛이 일품인 병천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우내 3.1만세운동’의 주역인 유관순 열사로 유명한 곳이다. 독립운동의 대명사가 된 유관순 열사의 생가와 그녀가 어린 시절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외우던 매봉교회를 다녀왔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여기는 천안역. 따뜻한 봄기운이 스멀거린다. 오늘의 목적지는 호서지방 최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열사의 생가와 그녀가 어릴 때 다녔던 매봉교회다.
천안역에서 자동차로 약 20여 분을 달려가니 한적한 전원풍경이 들어왔다. 이곳은 병천면이다. 병천 아우내시장을 지나 표지판을 따라 가면 ‘유관순 열사 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은 유관순 열사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기념관과 동상, 기념비, 추모각, 봉화대, 초혼묘 등이 조성되어 있다. 기념관 안에 들어가면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기록표, 재판기록문 등의 전시물과 재판과정 모습, 서대문형무소 벽관체험,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영상 등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기념관 바로 옆에 위치한 아우내실내체육관을 지나 큰길을 따라 1km쯤 더 가면 유관순 열사 생가와 매봉교회가 나온다. 유관순 열사는 이곳 용두리(옛지명 지령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매봉교회는 그녀가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던 곳이다.
매봉교회와 3.1운동
천안에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을 ‘매봉교회의 독립운동’으로 보는 시각이 있을 정도로, 매봉교회는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매봉교회의 첫 이름은 ‘지령리 야소교당(耶蘇敎堂)’이다. 미감리교 선교사인 스웨어러(Wilbur C. Swearer, 한국명 서원보)는 1899년 3월 경기도 이천에서 한 남자와 가족에게 세례를 주었다. 바로 그가 이천 덕들교회의 박해숙이다. 그의 전도활동으로 1901년경 목천과 진천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천안읍(1915년)보다 먼저 복음이 전래되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나귀를 타고 전도여행을 다녔는데, 목천은 서울, 여주, 진천을 거쳐 충청도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충청도의 선교거점인 공주보다 먼저 이곳에 복음이 들어왔다.
지령리교회는 점점 부흥해갔다. 지령리교회는 나라사랑 정신이 투철했다. 그렇기에 일제의 모진 핍박을 받아야만 했다. 우선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을 도왔다는 이유로 교인 몇 명이 사살되었다. 1907년 8월 ‘대지령야소교당’의 이름으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는데, 그때 동참한 교인이 무려 82명에 달했다. 일제는 교회가 방해가 되자 그해 11월, 목천 사자골교회 신자 3명을 총살하고, 지령리교회를 불태웠다. 항일적인 성향을 지닌 지령리교회에 대한 일본군의 보복이었다. 이는 일본인이 불태운 한국 최초의 교회로 기록되었다.
교회당은 불타 없어졌지만 지령리교회의 정신은 계승됐다. 1908년 케이블(Elmer M. Cable, 한국명 기이부) 선교사에 의해 전도된 유빈기가 고향으로 돌아와 불타 없어진 교회를 다시 세웠다. 이때 유관순의 숙부인 유중무를 비롯한 지령리교인들도 교회 재건에 동참했다.
지령리교회는 항일성향만 강했던 것이 아니었다. 국운이 완전히 기운 1910년. 모든 백성이 갈 길을 잃고 방황할 때 교회는 ‘진명학교’를 세웠다. 미신타파, 농촌계몽, 한글보급, 문맹퇴치,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민족의 방향성을 설정하는데도 힘썼다.
그리고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호서지방에서 일어난 제일 큰 민족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이끈 사람들도 지령리교인들이었다. 이 운동에 전교인이 참여했다.
당시 천안지방 감리사였던 윌리엄 선교사는 “천안 병천시장에서 장날을 기해 모든 사람이 시위운동을 하였는데…(중략) 그 중에 제일 비참한 것은 한 교우의 가족이 당한 일이다. 주인 부부는 참살을 당했고, 그의 자제는 여러 달 동안 감옥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고생을 당하였고, 그의 여식은 3년 징역 선고를 받았고, 그의 어린 자식 2명도 아주 비참하여 볼 수 없다. 그러나 신자들이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여기에 나온 일가가 바로 유관순 열사다.
만세운동 후 교회는 집회금지령이 내려졌고, 1932년 4월 18일 끝내 문을 닫고 만다. 해방이 될 때까지 예배를 드리지 못했던 교회는, 1967년 유관순의 모교인 이화여고의 도움으로 ‘매봉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현재 매봉교회 건물은 1998년 기독교대한감리회 남부연회에서 모금해 재건축되었다.
매봉교회 옆에 유관순 열사의 생가를 복원한 생가지(生家地)가 있다. 정부가 열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1년 복원 정비한 것이다. 조그마한 방3칸에 마루, 부엌이 전부인 ‘ㄱ’자형 초가다. 이곳에서 유관순 열사는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교회는 유관순의 놀이터이자 배움터였다. 이곳에서 찬송가를 배우고, 어른들이 성경 읽는 것을 보고 한글을 깨우쳤으며 성구들을 곧잘 외웠다.
유관순의 총명함을 알아본 앨리스 햄몬드 샤프 부인이 그녀의 이화학당 유학을 도왔다. 그리고 이화학당 재학당시 일어난 3.1운동. 유관순은 고향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전하며, 지역 유지들에게 동참할 것을 적극 촉구했다. 태극기도 직접 만들었고, 먼 길을 마다않고 사람 모으기에 힘썼다. 그 모습을 생가에 인형을 만들어 재현해 놓았다. 아쉽게도 유리벽으로 되어 있어 방 안으로 들어가진 못하지만, 당시 유관순과 그의 가족들이 어떻게 3.1운동을 준비했는지 체험할 수 있다.
이날은 마침 초등학생 열댓 명이 견학을 하고 있었다. 마루에 앉아 선생님의 열띤 설명을 듣고 있었다. 또랑또랑한 눈으로 선생님의 설명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중했다. 손에는 작은 태극기도 들려있었다. 아이들은 100여 년 전 이곳에서 거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피부로 와 닿을까. 아이들이 외딴 곳에 위치한 이곳까지 왔다는 것만으로 산교육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
매봉교회 지하에 전시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매봉교회의 연보,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니 꼭 관람하도록 하자.
기념관에서 매봉교회로 가는 중간쯤에 대로변 양쪽으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유관순의 부모인 유중권과 이소제, 숙부 유중무의 묘임을 알리는 안내판이다. 못보고 지나칠 수 있으니 지나치지 말고 꼭 묵념하고 가자. * 주소 :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2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