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까지 대한민국을 사랑한 그녀-전라도 선교의 어머니 유화례(1893-1995)
신앙의 선배를 만나다
1893년 12월 21일 뉴욕 쿠퍼스타운에서 출생한 유화례(플로렌스 루트, Florence E. Root) 선교사는 죽기까지 대한민국을 사랑한 미국 사람이었다. 그녀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 땅을 밟았다. 식민지 시절, 고통당하던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했다. 한 줌의 빛을 준 선교사였다.
모두 떠났지만 그녀는 남았다
“네 평생 이와 같은 생활만 하고 싶으냐? 너는 남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말 너의 욕심 속에 빠지려느냐.”
대학 졸업 후 비서 일을 하고 있던 유화례 선교사는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선교사의 길로 들어섰다.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가 떠올랐다. 그렇게 1926년 12월 18일 그녀는 부르심을 따라 미국 남장로회 파송으로 한국행 배에 올랐다. 그가 처음 도착한 곳은 전라남도 광주의 ‘수피아학교’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한국어를 공부하고, 한국어로 설교를 하면서 조금씩 한국생활에 적응해나갔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건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에 심한 간섭을 했다. 가장 대표적인 만행이 신사참배 강요였다. 당시 수피아학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신사참배는 없다”며 거부해 폐교 위기에 처했다. 유화례 선교사도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학생들을 끝까지 지키려했지만 결국 폐교됐다.
1940년 미국영사관에서 갑자기 모든 선교사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70~80명의 선교사들이 모두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지만 유화례 선교사는 남았다. 그녀는 도저히 한국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국에 남아 각 지방을 돌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1941년에는 순천 애양원에 머물며 나병환자들을 돌보았다. 이후 그녀는 일제에 의해 스파이로 몰리기도 하고, 감방에 갇히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떠나지 않고 남아 함께 피난생활도
1945년 8월 15일, 라디오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본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캐롤라이나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던 유화례 선교사도 그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 가서 나를 기다리는 농촌의 아낙들에게, 할머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겠다.”
1947년 10월 31일 전남 광주로 돌아온 유화례 선교사는 이듬 해 제8대 수피아 교장으로 선임됐지만 1년 뒤 사표를 내고 농민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전주 선교사회 강당에 모인 선교사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전쟁이 발발했다. 생각에 잠긴 유화례 선교사는 한국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하고 광주로 갔다. 그는 북한군을 피해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산속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결박당하고, 두 달 동안 동굴생활도 했다. 하지만 한국인들을 위한 교육사업과 전도사역, 교도소사역, 고아원사역 등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했다. 그렇게 부산, 광주, 목포, 마산, 나주, 강진 등을 돌며 정년 70세가 될 때까지 성경을 가르쳤다. 한국인들에게 모두 퍼주는 삶을 몸소 보여주었다.
유화례 선교사는 광주 양림동의 조그만 양옥에서 노후를 보냈다고 한다. 그녀의 방에는 항상 태극기와 애국가가 붙어 있었고, 죽는 날까지 한국을 위해 기도하며 살았다.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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