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특집 온누리 선교 30주년_“나는 건축전문 선교사 박일구입니다”

 

지구촌에 교회, 학교, 병원 세우고, 재난 현장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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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적 교회는 떠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온누리교회 성도라면 누구나 한번쯤 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온누리교회는 선교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답게 현재까지 72개국에 1,785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30년 동안 해마다 약 60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셈이다.
본지는 4주 동안 연재한 온누리 선교 30주년 특집의 마지막은 선교사 이야기로 장식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취재과정이 쉽지 않았다. 선교사들의 면면이 탁월하고, 누구하나 귀감이 되지 않는 선교사가 없어 인터뷰 할 선교사를 섭외하는데 애를 먹었다. 찾고 또 찾던 중에 특이한 이력을 가진 선교사가 한명 있었다. 서빙고 온누리교회를 직접 지은 건축기술자 출신 선교사가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박일구 선교사다. 그는 평신도 출신 선교사 1호격이다.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지난 23일, 여기는 상도동에 위치한 TIM하우스다. 두란노해외선교회(TIM) 파송 선교사들의 숙소다. 이곳에서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 박일구 선교사를 만났다. 초로의 신사는 선한 웃음이 인상적이었다.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정겨움을 더했다. 눈을 반짝이며 선교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은 흡사 소년이 재미난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처럼 개구지다.
그는 건축, 전기 기술자로 전 세계를 누볐다.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우고, 교회도 세웠다. 재난 현장에서 복구 활동도 했다.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받은 은혜가 참 많아보였다.

 

돈이냐, 예수님이냐

 

박일구 선교사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리를 듣고 배를 타려고 준비 중이었다. 배를 타고 5대양 6대주를 누벼야겠다고 꿈을 꿨다. 그런데 군대 미필자라는 낙인이 발목을 잡았다.
해병대를 다녀 온 그는 배를 타는 꿈을 접었다. 전기기술자로 건설회사에 들어가 새로운 삶을 살았다. 당시 중동에 건설 붐이 한창이었다. 박일구 선교사도 중동에서 6년을 일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로 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귀가 안 들리고 아팠다. 왜 아픈지 이유를 모르니 더 답답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박일구 선교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2%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아프니까 무시하던 교회를 제 발로 찾아가게 되더군요. 아픈 곳을 치료해주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기도했죠. 그런데 신기하게 기도하고 나니까 귀가 들리더라고요. 그때부터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왔더니 그가 다니던 회사가 온누리교회 건축 공사를 따냈다. 당시 온누리교회는 가건물에서 예배를 드리던 시절이었다. 회사에서는 교회를 건축하는 공사이니만큼 크리스천 직원을 보내야 할 것 같다며 그를 서빙고 온누리교회 건축공사 현장으로 보냈다. 그렇게 온누리교회를 자기 손으로 짓게 되었다.
“87년 3월이었어요. 그때는 가건물에서 예배드릴 때였는데 온누리교회 건축공사를 하면서 저도 온누리교회에 등록했어요.”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건축하는데 참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했다. 공사현장에서 아무리 힘들게 일해도 지치지 않았다. 콧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모습을 하용조 목사가 보고 교회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근데 봉급이 제가 회사에서 받는 돈의 반밖에 안되더라고요. 돈을 잡을 것인가, 예수를 잡을 것인가를 두고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결국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라는 축복을 받은 것 같아요.”
너털웃음으로 그때를 회상하는 박 선교사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때의 선택을 추호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그는 건축 전문 선교사로서 세계 곳곳에 교회, 학교, 병원을 세웠다. 89년 아프리카 감비아를 시작으로 이스라엘, 스리랑카, 모잠비크, 중국, 몽골, 아이티, 르완다 등지에서 건축전문 선교사로서 사역했다. 그는 전기는 기본, 배관과 용접도 가능한 전천후 기술자였다. 전문 인력이 부족한 선교지에 그야말로 안성맞춤 일꾼이었다. 각처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용병으로 활약했다.
“참 하나님의 꿈과 내 꿈은 달라요. 나는 배타고 5대양 6대주를 누비겠다는 꿈을 꿨는데, 하나님은 선교사로서 5대양 6대주를 누비게 해주셨어요.”
감비아에 청소년유스센터를 세우러 갔을 때 박 선교사는 결혼한 지 5개월밖에 되지 않은 신혼이었다. 아내의 뱃속에는 3개월 된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내가 출산하기 10일 전에야 한국에 돌아왔다. 맡은 일을 끝내야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에게 첫 선교지 감비아는 각별했다. 애착이 남달랐다.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곳,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감비아를 나오면서 다짐하고 헌신했다.
“하나님, 이 땅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에게 감비아는 선교사로서의 고향이었다. 뿌리와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갓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리는 그곳에 갈 수 없었다. 아이가 크고, 선교사로서 조금 더 준비를 해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1997년 감비아로 가기 위해 기도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감비아가 아닌 이스라엘에서 2년을 있어야 했고, 스리랑카에서 13년 동안 사역해야 했다. 스리랑카에서 사역하는 틈틈이 그를 필요로 하는 중국, 몽골, 르완다, 아이티까지 날아갔다. 모잠비크에서는 2년 동안 온누리상업고등학교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학교사역에 대한 비전이 있었다. 모잠비크에서는 온누리상업고등학교를, 스리랑카에서는 온누리국제학교를 섬겼다. 특히 스리랑카 현지인 목회자들의 자녀 11명을 데려와 무려 8년을 키웠다. 이른바 트리홈 사역이었다. 매주 토요일에는 ‘Spark for Jesus’라는 동아리를 3년 동안 운영했다. 성경도 가르치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게임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모임이었다. 르완다에서 보건소를 지을 때는 그곳 아이들의 티 없는 모습에 반하고 말았다. 박 선교사가 그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알사탕을 주고, 껴안아주고, 기도해주고, 부족한 솜씨지만 이발해주는 것 정도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나는 행복한 선교사입니다”

 

박 선교사의 선교 열전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10월 중에 감비아를 방문할 예정이다. 드디어 감비아에 간다. 그곳에 유치원을 세울 계획이다. 설레는 만남도 기대하고 있다. 또 다른 ‘일구’를 만날 기대에 부풀어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녀의 이름을 존경하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짓는다. 박 선교사가 감비아에서 사역할 때 친하게 지내던 현지인이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박 선교사의 이름을 따서 짓고 싶다고 했다.
“감비아의 일구가 얼마나 멋진 청년이 되었는지 어서 보고 싶어요.”
그는 선교사로서 보기 드물게 2013년 장로장립을 받았다. “장로님이라고 부를까요, 선교사님이라고 부를까요?”라고 묻자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선교사라고 불러 주세요. 나는 행복한 선교사입니다.”

작성자  김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