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의 최종목표는 ‘독립’이다!
헬리콥터 부모들의 과하고, 비뚤어진 자식사랑
잘 떠나보내는 부모, 잘 떠나는 자녀가 건강하다
“어머니는 우리의 마음속에 얼을 주고, 아버지는 빛을 준다”(장 파울).
부모란 그런 존재다. 부모는 자녀를 위하여 낳을 때의 괴로움은 다 잊고, 밤낮으로 애쓰며,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다.
그런데 그 사랑이 조금 변질된 위험한 부모들이 있다. 자녀에게 과하고, 비뚤어진 사랑을 주는 부모들이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SKY 캐슬’에 나오는 인물들이 바로 그런 부모들이다. 자녀의 명문대 입학에 인생을 올인한 부모뿐이겠는가. 한 케이블 방송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는 딸의 회사생활까지 관리해주는 열혈 엄마가 등장했다. 드라마 소재이지 설마 현실에서 그런 부모들이 존재하겠느냐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드라마보다 더한 부모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진짜 있었던 그 부모들의 과하고 비뚤어진 가짜 사랑이야기를 소개한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부모란 그런 존재다. 부모는 자녀를 위하여 낳을 때의 괴로움은 다 잊고, 밤낮으로 애쓰며,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다.
그런데 그 사랑이 조금 변질된 위험한 부모들이 있다. 자녀에게 과하고, 비뚤어진 사랑을 주는 부모들이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SKY 캐슬’에 나오는 인물들이 바로 그런 부모들이다. 자녀의 명문대 입학에 인생을 올인한 부모뿐이겠는가. 한 케이블 방송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는 딸의 회사생활까지 관리해주는 열혈 엄마가 등장했다. 드라마 소재이지 설마 현실에서 그런 부모들이 존재하겠느냐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드라마보다 더한 부모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진짜 있었던 그 부모들의 과하고 비뚤어진 가짜 사랑이야기를 소개한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대학교수인 K씨는 얼마 전 황당한 일을 겪었다.
“강의실에 못 보던 중년 여성이 앉아 있더라고요. 어떻게 오셨냐고 물었더니 자녀 대신 출석하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제 말이 지어낸 이야기 같지요? 제가 직접 겪은 일이에요. 기가 막히더라고요.”
극성 엄마는 군대도 따라간다. 군대에 갓 입대한 아들이 걱정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다고 집에도 안 가고 훈련소 앞에 있는 모텔에서 생활하면서 아들이 퇴소할 때까지 하루 두 번씩 부대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하는 것은 과해도 너무 과하다.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J자매(27살)는 그 어린 애들에게까지 교육열을 쏟아 붓는 부모들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
“가끔 참 무책임하면서 극성맞은 부모님들이 계세요. 제가 일하는 어린이집은 6살까지 다니는데 그 어린 애들이 어린이집 끝나자마자 태권도, 발레, 수영 학원에 가더라고요. 5살이 넘도록 기저귀 떼 줄 생각조차 하지 않고 학원 보낼 생각만 하더라고요.”
자녀 곁을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빙빙 도는 부모들을 ‘헬리콥터 부모’라고 부른다. 자녀 양육과 교육에 극성스러울 정도로 관심을 쏟는 부모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헬리콥터 부모는 자녀의 안전이 걱정돼서 수학여행까지 따라가는 것은 기본이고, 성인이 된 대학생 자녀의 강의 과목을 대신 짜주거나 강의에 대리 출석하는 경우도 있다. 성적이 안 좋게 나오면 지도교수나 총장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점수를 올려달라고 항의도 한다. 자녀의 이성교재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자녀의 직업까지 부모가 대신 선택해준다.
L형제는 진로문제로 고민이 많다. 자신은 취업을 원하는데 부모님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중소기업 취업을 탐탁지 않아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면서 ‘안정적인 게 최고’라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부모들은 정작 중요한 걸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는 경험을 하지 못한 자녀는 사회화가 되지 않는다. 또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자녀들의 비전수립, 블루오션 발견, 미래세대 적응을 방해한다.
“강의실에 못 보던 중년 여성이 앉아 있더라고요. 어떻게 오셨냐고 물었더니 자녀 대신 출석하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제 말이 지어낸 이야기 같지요? 제가 직접 겪은 일이에요. 기가 막히더라고요.”
극성 엄마는 군대도 따라간다. 군대에 갓 입대한 아들이 걱정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다고 집에도 안 가고 훈련소 앞에 있는 모텔에서 생활하면서 아들이 퇴소할 때까지 하루 두 번씩 부대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하는 것은 과해도 너무 과하다.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J자매(27살)는 그 어린 애들에게까지 교육열을 쏟아 붓는 부모들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
“가끔 참 무책임하면서 극성맞은 부모님들이 계세요. 제가 일하는 어린이집은 6살까지 다니는데 그 어린 애들이 어린이집 끝나자마자 태권도, 발레, 수영 학원에 가더라고요. 5살이 넘도록 기저귀 떼 줄 생각조차 하지 않고 학원 보낼 생각만 하더라고요.”
자녀 곁을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빙빙 도는 부모들을 ‘헬리콥터 부모’라고 부른다. 자녀 양육과 교육에 극성스러울 정도로 관심을 쏟는 부모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헬리콥터 부모는 자녀의 안전이 걱정돼서 수학여행까지 따라가는 것은 기본이고, 성인이 된 대학생 자녀의 강의 과목을 대신 짜주거나 강의에 대리 출석하는 경우도 있다. 성적이 안 좋게 나오면 지도교수나 총장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점수를 올려달라고 항의도 한다. 자녀의 이성교재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자녀의 직업까지 부모가 대신 선택해준다.
L형제는 진로문제로 고민이 많다. 자신은 취업을 원하는데 부모님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중소기업 취업을 탐탁지 않아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면서 ‘안정적인 게 최고’라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부모들은 정작 중요한 걸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는 경험을 하지 못한 자녀는 사회화가 되지 않는다. 또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자녀들의 비전수립, 블루오션 발견, 미래세대 적응을 방해한다.
동서고금 막론하는 삐뚤어진 자식사랑
자식을 향한 비뚤어진 사랑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극성 엄마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한다.
인도의 어느 부모는 자녀를 위해 목숨 걸고 부정행위를 했다. 일명 ‘벽 타는 부모’다. 지난 2015년 5층 건물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서로 경쟁하듯 벽을 타는 영상이 공개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들은 시험 보는 자녀에게 커닝페이퍼를 주려고 목숨 걸고 벽을 타고 올라간 부모들이다.
중국의 에이미 추아 교수(예일대 로스쿨)는 2011년 자신의 두 딸을 키운 경험을 바탕으로 자전적 교육 서적 <타이거맘 찬가(Battle Hymn of the Tiger Mother)>를 펴냈다. 추아 교수는 이 책에서 자녀를 키우면서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행위 리스트 10가지를 열거했다. 학예회 발표, 학예회 발표에 빠지는 것에 대한 불평하기, TV시청과 게임하기, 방과 후 활동 자기가 정하기, A미만 점수 받기, 모든 과목에서 1등이 못 되는 것, 피아노와 바이올린 이외 악기를 연주하는 것 등이다. 강압과 권위를 내세운 추아 교수의 교육법은 특히 둘째 딸에게 비극이 됐다. 둘째 딸이 가족여행지 한복판에서 “엄마가 싫어! 바이올린도 싫고 다 싫어! 엄마는 최악이고 이기적이고 날 위해서 한다는 핑계로 엄마를 위해 다 하는 거 아냐?”라고 절규했다.
자녀를 향한 비뚤어진 사랑은 교육 선진국 미국도 비켜가지 못한다. 지난 3월 미국에서 역대 최대 규모 명문대 입시비리 사건이 일어났다. 부유층 학부모가 자녀를 아이비리그 등 명문 대학에 입학시키는 조건으로 입시브로커에게 적게는 20만 달러(2억2600만원) 많게는 650만 달러(약 75억원)를 건넨 사건이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배우 펠리시티 허프만(‘위기의 주부들’ 출연)을 비롯해서 대형 로펌과 기업체 CEO 등 연예인과 금융가, 기업가, 법조인 등이 대거 연루돼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성경에도 문제 부모들이 나온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무엘서에 나오는 제사장 엘리이다. 엘리는 자신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으로 악행을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로서 막지도, 처벌하지도 않았다. 아들들의 악행을 소문으로 들었지만 방치했다. 나중에서야 아들들을 가르쳐보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아들들이 엘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과는 엘리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지엄한 분노와 심판이었다.
엘리는 제사장으로서, 아버지로서 아들들을 훈계하고 잘못에서 돌이키도록 이끌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하나님보다 아들을 우선순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엘리의 잘못된 자식사랑으로 집안 대대로 슬픔이 임하고, 제사장 직분마저 빼앗겼다.
자식을 향한 비뚤어진 사랑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극성 엄마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한다.
인도의 어느 부모는 자녀를 위해 목숨 걸고 부정행위를 했다. 일명 ‘벽 타는 부모’다. 지난 2015년 5층 건물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서로 경쟁하듯 벽을 타는 영상이 공개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들은 시험 보는 자녀에게 커닝페이퍼를 주려고 목숨 걸고 벽을 타고 올라간 부모들이다.
중국의 에이미 추아 교수(예일대 로스쿨)는 2011년 자신의 두 딸을 키운 경험을 바탕으로 자전적 교육 서적 <타이거맘 찬가(Battle Hymn of the Tiger Mother)>를 펴냈다. 추아 교수는 이 책에서 자녀를 키우면서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행위 리스트 10가지를 열거했다. 학예회 발표, 학예회 발표에 빠지는 것에 대한 불평하기, TV시청과 게임하기, 방과 후 활동 자기가 정하기, A미만 점수 받기, 모든 과목에서 1등이 못 되는 것, 피아노와 바이올린 이외 악기를 연주하는 것 등이다. 강압과 권위를 내세운 추아 교수의 교육법은 특히 둘째 딸에게 비극이 됐다. 둘째 딸이 가족여행지 한복판에서 “엄마가 싫어! 바이올린도 싫고 다 싫어! 엄마는 최악이고 이기적이고 날 위해서 한다는 핑계로 엄마를 위해 다 하는 거 아냐?”라고 절규했다.
자녀를 향한 비뚤어진 사랑은 교육 선진국 미국도 비켜가지 못한다. 지난 3월 미국에서 역대 최대 규모 명문대 입시비리 사건이 일어났다. 부유층 학부모가 자녀를 아이비리그 등 명문 대학에 입학시키는 조건으로 입시브로커에게 적게는 20만 달러(2억2600만원) 많게는 650만 달러(약 75억원)를 건넨 사건이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배우 펠리시티 허프만(‘위기의 주부들’ 출연)을 비롯해서 대형 로펌과 기업체 CEO 등 연예인과 금융가, 기업가, 법조인 등이 대거 연루돼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성경에도 문제 부모들이 나온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무엘서에 나오는 제사장 엘리이다. 엘리는 자신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으로 악행을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로서 막지도, 처벌하지도 않았다. 아들들의 악행을 소문으로 들었지만 방치했다. 나중에서야 아들들을 가르쳐보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아들들이 엘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과는 엘리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지엄한 분노와 심판이었다.
엘리는 제사장으로서, 아버지로서 아들들을 훈계하고 잘못에서 돌이키도록 이끌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하나님보다 아들을 우선순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엘리의 잘못된 자식사랑으로 집안 대대로 슬픔이 임하고, 제사장 직분마저 빼앗겼다.
그 해답은 ‘성경적 부모’
부모들의 맹목적인 사랑과 지나친 간섭은 결코 바람직하거나 정상적이지 않다. 자녀교육의 최종목표는 독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까? 성경적인 부모가 그 해답이다. 성경적인 부모는 자녀에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먼저 가르친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
크리스천 부모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자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아는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부모가 배워야 하고, 자녀를 가르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 크리스천 부모들조차 그 역할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어 걱정된다. 차세대 교사 이민경 자매가 이런 말을 했다.
“시험기간에 교회 안 나오는 아이들을 보면 대개 두 부류에요. 부모님이 가지 말라고 하거나, 본인이 불안해서 안 나오는 경우에요.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이 부모님을 따라서 교회 오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같이 교회가자고 하면 시험기간에도 따라오더라고요. 결국 자녀의 신앙성장과 교육은 부모님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 같아요.”
정말 자녀를 사랑한다면 미적분이나 외국어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자녀를 잘 떠나보내고, 자녀가 잘 떠나도록 안내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 부모이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
크리스천 부모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자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아는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부모가 배워야 하고, 자녀를 가르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 크리스천 부모들조차 그 역할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어 걱정된다. 차세대 교사 이민경 자매가 이런 말을 했다.
“시험기간에 교회 안 나오는 아이들을 보면 대개 두 부류에요. 부모님이 가지 말라고 하거나, 본인이 불안해서 안 나오는 경우에요.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이 부모님을 따라서 교회 오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같이 교회가자고 하면 시험기간에도 따라오더라고요. 결국 자녀의 신앙성장과 교육은 부모님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 같아요.”
정말 자녀를 사랑한다면 미적분이나 외국어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자녀를 잘 떠나보내고, 자녀가 잘 떠나도록 안내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 부모이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전문가 기고>
이 시대 부모들에게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날갯짓 할 수 있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실감나는 요즘을 살아내고 있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은 내 아이만 키워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온 마을을 없애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가르쳐 왔고, 그렇게 배운 세대들이 부모가 되어 그 자식들한테 해줄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을까 싶을 정도로 안타까운 사실들과 이야기들을 주변에서 심심찮게 듣곤 한다.
얼마 전 성황리에 방영된 드라마 ‘SKY 캐슬’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드라마가 현실인지 현실이 드라마인지 모르는 혼돈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다가 이리 되었을까? 언제부터 우리는 부모로서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리게 되었을까? 부모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그토록 받고, 교양서적을 끊임없이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오늘 필자는 한 아이의 사례를 중심으로 작게나마 그 해답을 찾아가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부모들이 힘을 내어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부모로서의 온전한 삶을 살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실감나는 요즘을 살아내고 있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은 내 아이만 키워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온 마을을 없애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가르쳐 왔고, 그렇게 배운 세대들이 부모가 되어 그 자식들한테 해줄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을까 싶을 정도로 안타까운 사실들과 이야기들을 주변에서 심심찮게 듣곤 한다.
얼마 전 성황리에 방영된 드라마 ‘SKY 캐슬’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드라마가 현실인지 현실이 드라마인지 모르는 혼돈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다가 이리 되었을까? 언제부터 우리는 부모로서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리게 되었을까? 부모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그토록 받고, 교양서적을 끊임없이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오늘 필자는 한 아이의 사례를 중심으로 작게나마 그 해답을 찾아가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부모들이 힘을 내어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부모로서의 온전한 삶을 살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안 괜찮은 아들과 아빠의 눈물
언젠가 상담실에 너무나도 잘생기고 똑똑하게 생긴 남학생이 방문했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학교 기관이 아니라 사설 상담소를 방문할 때처럼 엄마 손에 이끌려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상담을 받는 대상이던 그 청소년은 딱히 상담을 받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 소년의 엄마는 애가 닳은 표정으로 아이의 성적부터 생활태도 등을 나열했다. 소년은 그런 엄마의 말을 많이 들었는지 눈만 깜빡였다. 엄마가 상담실을 나가고 소년이 처음으로 내게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상담자인 내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그 소년은 자기가 어떻게 하면 영어성적을 올릴 수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과 학과는 어디인지, 자기가 어떻게 하면 부모님이 행복해 할지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마치 선생님에게 혼이 날까 두려워서 앞으로의 인생 계획을 말하는 소년의 모습에서 상담자인 나는 진정성을 느낄 수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 소년의 말을 끊고 내가 물었다.
“괜찮니?”
예상 못한 나의 물음에 약간 당황한 듯 보였지만 그 소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러면 안 된다는 듯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자신의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또 다시 설명했다.
그렇게 몇 번의 상담을 했다. 얼마 뒤 나는 소년에게 재차 물었다.
“괜찮니?”
쉬면 안 될 듯이 앞으로의 계획만을 향해 가던, 어른들이 원하는 방향과 세상을 너무나도 잘 안다는 듯 얘기하던 소년이 나의 두 번째 물음에 무너졌다. 안 괜찮단다. 자신은 안 괜찮다고, 힘들다고, 너무 힘든데 왜 아무도 자기에게 힘드냐고 물어봐주지 않느냐며 그 큰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성적에 대한 압박과 입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소년은 그로부터도 한참을 울었다.
그 소년은 누가 봐도 아니 객관적으로 봐도 상위권에 속해 있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SKY대학을 가고도 남을 성적을 갖고 있었지만 행복해하지 않았다. 아니, 행복하면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지난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진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 소년이 상담실에 온 이유는 어쩌면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서 본인의 성적과 가장 잘 맞는 학과를 선택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소년이 내게 울면서 한 말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나 안 괜찮아요. 힘들어요. 너무 힘들어서 위로 받고 싶어요.”
그 위로를 엄마, 아빠에게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 소년의 아빠 이야기를 해 보겠다. 그는 시골 작은 마을의 형제 많은 집에서 태어났다. 장남도, 막내도 아닌 가운데 몇 번째 자녀로 태어난 그는 공부가 그렇게 하고 싶었단다. 그런데 공부는 큰형과 작은형 몫이지, 자기 몫이 아니었다. 그래서 밤마다 몰래 소설책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처럼 사전을 씹어 먹어가면서 공부했다. 그렇게 SKY 대학에 들어갔다. 학연, 지연, 혈연도 없이 혈혈단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온 그는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죽어라고 공부했다. 거칠고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시간을 쪼개가면서 공부했고, 취업했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면서 다짐했다. 내 자식만큼은 절대로, 절대로 힘들게 공부시키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가장 좋은 환경에서 가장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었는데 아이가 너무 연약하고, 실수가 잦은 게 탐탁지 않았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위로해 주고 싶은데 위로해 주면 나자빠질까봐 못해주겠더란다. 그러면서 그 아빠 역시 눈물을 흘렸다. 자기도 너무 힘들다고.
상담자인 내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그 소년은 자기가 어떻게 하면 영어성적을 올릴 수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과 학과는 어디인지, 자기가 어떻게 하면 부모님이 행복해 할지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마치 선생님에게 혼이 날까 두려워서 앞으로의 인생 계획을 말하는 소년의 모습에서 상담자인 나는 진정성을 느낄 수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 소년의 말을 끊고 내가 물었다.
“괜찮니?”
예상 못한 나의 물음에 약간 당황한 듯 보였지만 그 소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러면 안 된다는 듯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자신의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또 다시 설명했다.
그렇게 몇 번의 상담을 했다. 얼마 뒤 나는 소년에게 재차 물었다.
“괜찮니?”
쉬면 안 될 듯이 앞으로의 계획만을 향해 가던, 어른들이 원하는 방향과 세상을 너무나도 잘 안다는 듯 얘기하던 소년이 나의 두 번째 물음에 무너졌다. 안 괜찮단다. 자신은 안 괜찮다고, 힘들다고, 너무 힘든데 왜 아무도 자기에게 힘드냐고 물어봐주지 않느냐며 그 큰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성적에 대한 압박과 입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소년은 그로부터도 한참을 울었다.
그 소년은 누가 봐도 아니 객관적으로 봐도 상위권에 속해 있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SKY대학을 가고도 남을 성적을 갖고 있었지만 행복해하지 않았다. 아니, 행복하면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지난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진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 소년이 상담실에 온 이유는 어쩌면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서 본인의 성적과 가장 잘 맞는 학과를 선택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소년이 내게 울면서 한 말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나 안 괜찮아요. 힘들어요. 너무 힘들어서 위로 받고 싶어요.”
그 위로를 엄마, 아빠에게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 소년의 아빠 이야기를 해 보겠다. 그는 시골 작은 마을의 형제 많은 집에서 태어났다. 장남도, 막내도 아닌 가운데 몇 번째 자녀로 태어난 그는 공부가 그렇게 하고 싶었단다. 그런데 공부는 큰형과 작은형 몫이지, 자기 몫이 아니었다. 그래서 밤마다 몰래 소설책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처럼 사전을 씹어 먹어가면서 공부했다. 그렇게 SKY 대학에 들어갔다. 학연, 지연, 혈연도 없이 혈혈단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온 그는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죽어라고 공부했다. 거칠고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시간을 쪼개가면서 공부했고, 취업했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면서 다짐했다. 내 자식만큼은 절대로, 절대로 힘들게 공부시키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가장 좋은 환경에서 가장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었는데 아이가 너무 연약하고, 실수가 잦은 게 탐탁지 않았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위로해 주고 싶은데 위로해 주면 나자빠질까봐 못해주겠더란다. 그러면서 그 아빠 역시 눈물을 흘렸다. 자기도 너무 힘들다고.
부모 먼저 위로받고,
‘우리, 함께, 다같이’ 해보자!
상담실에 앉아 사례를 접하다 보면 사연만 다를 뿐이지 사람은 누구나 감정과 정서를 받아주는데 민감하지 못한 세상을 살고 있음을 느낀다. 아비로 살아온 내가 감정과 정서를 받아주는데 익숙한 삶을 살아오지 못했기에 자기 자식에게 그렇게 사실적이고 혹독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다 자식을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합리화해야 겨우 내 머리가 편안해지니까. 가슴이 복잡한 일을 하기보다는 머리가 편안해지는 일을 선택해 버리고 만다.
성경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엡 6:4)”는 말씀이 나온다. 기독교인이라면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이다. 부모라면 자기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게 하려고 이 설교를 듣고 또 듣고 가슴에 새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자녀를 노엽게 하고 있다. 필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찾고 싶다. 위로를 할 줄 모르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공동체성이 무너진 세계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부모인 나 역시 위로받아본 경험이 없고,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강하게 버티며 살아가는 방법을 겨우 배워왔는데 어떻게 자식을 위로할 줄 알겠는가? ‘우리, 함께, 다같이’라는 공동체성이 무너진 삶 속에서 각개전투처럼 개별적인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자녀의 편안한 자세를 받아줄 수 있겠는가?
필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부모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부모인 내가 먼저 위로받아야 한다고. 부모인 내가 먼저 ‘우리, 함께, 다같이’를 외쳐야 한다고. 가식이 아닌 진정성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부모라는 정말 크고 아늑한 울타리 안에서 숨을 쉴 수 있고, 마음껏 날갯짓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먼저 위로받고,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다. 내가 먼저 ‘우리 함께 다같이’ 하자고 외치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안전한 세상을 넘겨주고 싶다.
/ 채선기 소장(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 한국다움상담연구소)
‘우리, 함께, 다같이’ 해보자!
상담실에 앉아 사례를 접하다 보면 사연만 다를 뿐이지 사람은 누구나 감정과 정서를 받아주는데 민감하지 못한 세상을 살고 있음을 느낀다. 아비로 살아온 내가 감정과 정서를 받아주는데 익숙한 삶을 살아오지 못했기에 자기 자식에게 그렇게 사실적이고 혹독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다 자식을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합리화해야 겨우 내 머리가 편안해지니까. 가슴이 복잡한 일을 하기보다는 머리가 편안해지는 일을 선택해 버리고 만다.
성경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엡 6:4)”는 말씀이 나온다. 기독교인이라면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이다. 부모라면 자기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게 하려고 이 설교를 듣고 또 듣고 가슴에 새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자녀를 노엽게 하고 있다. 필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찾고 싶다. 위로를 할 줄 모르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공동체성이 무너진 세계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부모인 나 역시 위로받아본 경험이 없고,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강하게 버티며 살아가는 방법을 겨우 배워왔는데 어떻게 자식을 위로할 줄 알겠는가? ‘우리, 함께, 다같이’라는 공동체성이 무너진 삶 속에서 각개전투처럼 개별적인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자녀의 편안한 자세를 받아줄 수 있겠는가?
필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부모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부모인 내가 먼저 위로받아야 한다고. 부모인 내가 먼저 ‘우리, 함께, 다같이’를 외쳐야 한다고. 가식이 아닌 진정성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부모라는 정말 크고 아늑한 울타리 안에서 숨을 쉴 수 있고, 마음껏 날갯짓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먼저 위로받고,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다. 내가 먼저 ‘우리 함께 다같이’ 하자고 외치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안전한 세상을 넘겨주고 싶다.
/ 채선기 소장(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 한국다움상담연구소)
<발문>
“부모 먼저 위로받고,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다.
부모가 먼저 ‘우리 함께 다같이’ 하자고 외치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안전한 세상을 넘겨주고 싶다.”
“부모 먼저 위로받고,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다.
부모가 먼저 ‘우리 함께 다같이’ 하자고 외치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안전한 세상을 넘겨주고 싶다.”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