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질문 있습니다]내 욕망에 묻지 말고, 예수님께 물으라!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내 욕망에 묻지 말고, 예수님께 물으라!
“여자 친구와 사귀고 있는데 데이트할 때마다 스킨십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고민이 됩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여자 친구와 더 진한 스킨십을 하고 싶어집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혼전순결을 지켜야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의식이 개방적인 요즘, 많은 미혼 청년들이 성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간다. 그 고민이 좋은 결론에 도달하면 좋겠는데 청년들이 많은 부분을 합리화하며 사랑이라는 명목 아래 타협점을 찾으려는 것 같다. 미혼 기독청년 52%가 이미 성관계를 경험했다는 조사가 있을 정도로 크리스천의 성 윤리도 자유롭게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청년들의 선택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 묻는다면 그 누구도 떳떳하게 답하지 못할 것이다. 왜 떳떳하지 못할까? 자기합리화하며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이야기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옳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게 만드는 선택이라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답을 알 것이다.
이성 친구와 사귈 때 어디까지가 스킨십의 범위냐고 묻는 청년들에게 내가 항상 하는 대답이 있다. 지금 두 사람이 고민하는 그 순간까지가 혹은 바로 그 전 단계가 가장 건강한 스킨십의 범위라고 말한다.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거리낌이 있다는 의미이고, 목사에게 그 답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여기까지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마음이 들 가능성이 커서 그렇게 대답해주는 것이다. 많은 청년이 연애를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배우고, 주변 커플들을 통해 배운다. 그 정보들에 비해서 성경 말씀과 교회가 이야기하는 연애의 기준은 너무 보수적이고, 구시대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요한일서 4장의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고백처럼 모든 사랑의 원조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을 통해 배우는 것이 가장 건강하고 온전하다. 자신의 본성이나 미디어를 따르는 사랑의 결말은 생각처럼 아름답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대의 고정관념을 넘어 말씀을 따르는 사랑을 할 때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을 사랑의 모습으로 말씀하신다. 성적인 관계는 부부라는 약속 아래에서 아름다운 축복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성적 관계는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을 남기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꾸만 기준을 밖에서 찾으려 하면 안 된다. 말씀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자꾸 세상과 타협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려 하는가? 하나님과 말씀 앞에서 당당할 수 있도록 스킨십의 자리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What would Jesus do)?”를 외치고, 내 감정이 원하는 욕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택을 할 수 있는 크리스천 청년들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그래서 나는 신앙 안에서 만나는 커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
“만남을 시작하기 전에 두 사람 함께 앉아 가장 이성적일 때 스킨십의 기준을 정하라.”
뒤늦게 감정의 지배를 받은 후에는 스킨십의 범위를 정하는데 너무 관대해지기 때문이다. 만남의 초기부터 두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건강하고 부끄럽지 않은 스킨십 범위를 함께 정하고, 그 범위를 넘어서려고 한다면 누가 되었든 단호하게 약속을 상기시키며 절제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라고 권면하고 싶다. 서로가 사랑하기 때문에 더 깊은 스킨십으로 나가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약속 가운데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관계가 하나님 안에서 진짜 사랑하는 관계임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이미 실수했다고 큰 죄책감에 빠져 살아가지는 않아야 한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하나님은 “다시는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용서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과거의 실수에 매여 죄책감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다. 옳지 않은 선택을 회개하고, 반복해서 그 죄에 매이지 않도록 기도하며,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어디까지가 연인 간 스킨십의 마지노선인가?”라는 질문을 내 욕망에 묻지 말고 예수님께 물으면 답은 언제나 명쾌할 것이다.
/ 최성민 목사(SNS청년부)
이성 친구와 사귈 때 어디까지가 스킨십의 범위냐고 묻는 청년들에게 내가 항상 하는 대답이 있다. 지금 두 사람이 고민하는 그 순간까지가 혹은 바로 그 전 단계가 가장 건강한 스킨십의 범위라고 말한다.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거리낌이 있다는 의미이고, 목사에게 그 답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여기까지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마음이 들 가능성이 커서 그렇게 대답해주는 것이다. 많은 청년이 연애를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배우고, 주변 커플들을 통해 배운다. 그 정보들에 비해서 성경 말씀과 교회가 이야기하는 연애의 기준은 너무 보수적이고, 구시대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요한일서 4장의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고백처럼 모든 사랑의 원조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을 통해 배우는 것이 가장 건강하고 온전하다. 자신의 본성이나 미디어를 따르는 사랑의 결말은 생각처럼 아름답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대의 고정관념을 넘어 말씀을 따르는 사랑을 할 때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을 사랑의 모습으로 말씀하신다. 성적인 관계는 부부라는 약속 아래에서 아름다운 축복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성적 관계는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을 남기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꾸만 기준을 밖에서 찾으려 하면 안 된다. 말씀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자꾸 세상과 타협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려 하는가? 하나님과 말씀 앞에서 당당할 수 있도록 스킨십의 자리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What would Jesus do)?”를 외치고, 내 감정이 원하는 욕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택을 할 수 있는 크리스천 청년들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그래서 나는 신앙 안에서 만나는 커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
“만남을 시작하기 전에 두 사람 함께 앉아 가장 이성적일 때 스킨십의 기준을 정하라.”
뒤늦게 감정의 지배를 받은 후에는 스킨십의 범위를 정하는데 너무 관대해지기 때문이다. 만남의 초기부터 두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건강하고 부끄럽지 않은 스킨십 범위를 함께 정하고, 그 범위를 넘어서려고 한다면 누가 되었든 단호하게 약속을 상기시키며 절제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라고 권면하고 싶다. 서로가 사랑하기 때문에 더 깊은 스킨십으로 나가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약속 가운데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관계가 하나님 안에서 진짜 사랑하는 관계임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이미 실수했다고 큰 죄책감에 빠져 살아가지는 않아야 한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하나님은 “다시는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용서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과거의 실수에 매여 죄책감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다. 옳지 않은 선택을 회개하고, 반복해서 그 죄에 매이지 않도록 기도하며,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어디까지가 연인 간 스킨십의 마지노선인가?”라는 질문을 내 욕망에 묻지 말고 예수님께 물으면 답은 언제나 명쾌할 것이다.
/ 최성민 목사(SNS청년부)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