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종교인의 반발
종교인의 반발
로마서 3:1~8
/ 이재훈 목사
/ 이재훈 목사
로마서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 첫 번째 진리는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종말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역사가 완전히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판의 저편에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종말이지만, 단절이 목적은 아닙니다. 연결이 목적입니다. 이 시간과 영원을 연결하고, 이 세상과 저세상을 연결합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하여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의를 받아들이게 하려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 심판에 굴복할 때 우리는 역사의 종말을 통과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세상으로 연결됩니다. 우리가 죄인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인간이 갑자기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합리화하고, 변명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하려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변명할 수 없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 죄인임을 철저히 깨닫지 않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저항합니다. 인간과 죄와의 관계를 깨닫지 못하면 끊임없이 철학과 사상을 주장하면서 타락과 부패를 자꾸 잊어버립니다. 죄를 포장하고, 변명하고, 하나님의 심판에 저항합니다. 사도 바울 이후 죄와 구원에 관해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신학자가 성 어거스틴과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합니다. 그들은 초대교회 신학자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세상에는 두 종류 죄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죄인이고, 또 하나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죄인입니다. 또 어거스틴은 죄와 관련해 인간을 4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타락 이전의 상태로 ‘죄를 지울 수 있는 상태’입니다. 아직 죄가 없지만,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는 상태입니다.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의지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상태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완전히 부패한 인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가 왜 필요한지, 인간은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반복해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상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을 따라 살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 길을 계속 걸어가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영화롭게 되는 상태에 도달합니다. 바로 그 상태가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죄와 어둠이 없고, 반역이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죄와 어둠과 눈물과 슬픔이 전혀 없고, 죄를 지을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없는 완전한 상태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네 가지 반발
로마서 1장 18절에서 3장 20절까지 말씀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의 상태와 그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얼마나 타락했는지, 스스로 의롭고 선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죄 가운데 나타났음을 깨닫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끊임없이 부정하려 합니다. 로마서 1장 18절에서 3장 20절에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헛된 우상으로 바꿔버린 사람들입니다. 둘째, 남보다 자신이 낫다고 생각하고 도덕적으로 의롭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고, 스스로 과신하며 종교적인 의를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을 통해서 죄인 된 인간의 모습을 모두 드러냅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사람 보기에 선하고, 죄인이라 불리지 않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종교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부류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유대인입니다. 오늘 본문은 자기 과신에 빠진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의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죄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종교인은 유대인을 일컫습니다.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종교적 의로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보여 준 대로 하나님이 주신 율법, 하나님이 주신 제도, 하나님이 주신 규례, 하나님이 주신 절기,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을 의롭게 하고, 자기 민족을 우상화하고, 민족주의에 빠지게 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사회에서는 복음의 길과 삶을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 카테고리로 집어넣지만,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믿는 복음의 진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와 복음의 도리를 구분하지 못하면 유대인들이 빠졌던 자기 의에 또 빠지게 됩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 울타리에 소속이 되어 있으면 하나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더 엄격한 진노와 심판을 보여주신 것처럼, 성경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아는 자들을 더 엄격하게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의를 갈망하기보다 공로를 쌓고, 업적을 쌓으면서 스스로 의롭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바로 그것이 유대인들이 보여 준 사고방식입니다. 기독교인이 이와 같은 종교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면 동일한 부류에 해당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파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종교화된 유대인의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종교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복음에 어떻게 저항하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어떻게 반발하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종교화 한 유대인들에게 전한 첫 번째 진리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에 유대인들이 어떻게 반발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바리새인 바울과 그리스도인 바울의 논쟁으로 해석해도 됩니다. 바울이 유대인, 종교인, 바리새인으로서 던지는 질문과 성령 안에서 거듭나 구원받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 그것을 방어하는 논쟁이 오늘 본문에 숨어 있습니다. 이 시대에 종교적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진리에 어떻게 변명하고 대항하는지도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지난주에 율법과 할례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잘 준수하고, 할례를 행한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참 유대인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연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울러 진정한 할례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 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이 반발했습니다. 바울도 그들의 반발을 예상했습니다. 그 첫 번째 반론이 오늘 본문 1~2절에 나옵니다.
“그러면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무슨 혜택이 있고 할례에는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여러모로 많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1~2절).
바울의 말대로 유대인이 재정의되어야 하고, 할례도 재정의되어야 한다면 유대 사람에게 무슨 혜택과 가치가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해서 주신 모든 것이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나라와 민족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면제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맡았다는 것은 오히려 무거운 책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이 유대인들을 심판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억지 논리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약속을 주셨으니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로 반발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진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8절에서 3장 20절까지 말씀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의 상태와 그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얼마나 타락했는지, 스스로 의롭고 선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죄 가운데 나타났음을 깨닫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끊임없이 부정하려 합니다. 로마서 1장 18절에서 3장 20절에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헛된 우상으로 바꿔버린 사람들입니다. 둘째, 남보다 자신이 낫다고 생각하고 도덕적으로 의롭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고, 스스로 과신하며 종교적인 의를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을 통해서 죄인 된 인간의 모습을 모두 드러냅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사람 보기에 선하고, 죄인이라 불리지 않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종교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부류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유대인입니다. 오늘 본문은 자기 과신에 빠진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의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죄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종교인은 유대인을 일컫습니다.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종교적 의로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보여 준 대로 하나님이 주신 율법, 하나님이 주신 제도, 하나님이 주신 규례, 하나님이 주신 절기,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을 의롭게 하고, 자기 민족을 우상화하고, 민족주의에 빠지게 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사회에서는 복음의 길과 삶을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 카테고리로 집어넣지만,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믿는 복음의 진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와 복음의 도리를 구분하지 못하면 유대인들이 빠졌던 자기 의에 또 빠지게 됩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 울타리에 소속이 되어 있으면 하나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더 엄격한 진노와 심판을 보여주신 것처럼, 성경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아는 자들을 더 엄격하게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의를 갈망하기보다 공로를 쌓고, 업적을 쌓으면서 스스로 의롭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바로 그것이 유대인들이 보여 준 사고방식입니다. 기독교인이 이와 같은 종교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면 동일한 부류에 해당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파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종교화된 유대인의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종교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복음에 어떻게 저항하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어떻게 반발하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종교화 한 유대인들에게 전한 첫 번째 진리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에 유대인들이 어떻게 반발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바리새인 바울과 그리스도인 바울의 논쟁으로 해석해도 됩니다. 바울이 유대인, 종교인, 바리새인으로서 던지는 질문과 성령 안에서 거듭나 구원받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 그것을 방어하는 논쟁이 오늘 본문에 숨어 있습니다. 이 시대에 종교적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진리에 어떻게 변명하고 대항하는지도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지난주에 율법과 할례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잘 준수하고, 할례를 행한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참 유대인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연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울러 진정한 할례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 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이 반발했습니다. 바울도 그들의 반발을 예상했습니다. 그 첫 번째 반론이 오늘 본문 1~2절에 나옵니다.
“그러면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무슨 혜택이 있고 할례에는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여러모로 많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1~2절).
바울의 말대로 유대인이 재정의되어야 하고, 할례도 재정의되어야 한다면 유대 사람에게 무슨 혜택과 가치가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해서 주신 모든 것이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나라와 민족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면제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맡았다는 것은 오히려 무거운 책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이 유대인들을 심판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억지 논리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약속을 주셨으니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로 반발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진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실패는 하나님의 책임
“그런데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시키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 해도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기록되기를 ‘주께서 말씀하실 때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시고 판단받으실 때 이기려 하심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3~4절).
두 번째 반발은 결국 유대인들의 실패는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약속과 율법을 주시고, 여러 제도도 주셨는데 유대인들이 결국 믿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실패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공격하는 반발입니다. 신앙생활이 종교 생활이 되면 이렇게 됩니다. 가인이 그 문제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면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아야 하는데, 받지 않으신 하나님께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믿지 않는 이들의 문제도 동일합니다. 엄청난 기적과 표적을 보여 줬음에도 받아들이지 않고, 불신하는 것은 하나님 신실하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전적인 타락이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그토록 친밀하고, 전지전능한 표적과 기사와 약속과 메시아를 주셨음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실패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보여줍니다. 홍해의 기적을 보고, 광야를 지날 때도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습에서 모든 인간 안에 있는 뿌리 깊은 불신앙이 드러납니다.
두 번째 반발은 결국 유대인들의 실패는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약속과 율법을 주시고, 여러 제도도 주셨는데 유대인들이 결국 믿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실패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공격하는 반발입니다. 신앙생활이 종교 생활이 되면 이렇게 됩니다. 가인이 그 문제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면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아야 하는데, 받지 않으신 하나님께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믿지 않는 이들의 문제도 동일합니다. 엄청난 기적과 표적을 보여 줬음에도 받아들이지 않고, 불신하는 것은 하나님 신실하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전적인 타락이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그토록 친밀하고, 전지전능한 표적과 기사와 약속과 메시아를 주셨음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실패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보여줍니다. 홍해의 기적을 보고, 광야를 지날 때도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습에서 모든 인간 안에 있는 뿌리 깊은 불신앙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공격
세 번째 반발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의함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내가 사람들이 말하는 논리대로 말해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신다고 해서 불의하시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5~6절).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타락하고, 불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는데 왜 불의를 심판하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냈는데 자신들을 심판하면 하나님이 불의하신 거라고 주장합니다. “가룟 유다가 왜 배신자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다면, 누군가 배신해야 했다면, 친구의 배신이 구약에 약속되었다면 그 말씀이 성취된 통로가 가룟 유다인데 왜 그를 정죄하느냐?”는 논리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친구에 의해 배신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다면 누군가 배신해야 하고, 누군가 못 박아야 하고, 누군가 사형을 판결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속제물이 되는 데 쓰임 받은 사람들을 왜 정죄하느냐는 논리와 똑같습니다. 또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했다”는 말씀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있으면 은혜를 더 받기 위해서 죄를 더 많이 지어야겠다”고 왜곡해서 이용하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논리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진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논리가 종교 안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의함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내가 사람들이 말하는 논리대로 말해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신다고 해서 불의하시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5~6절).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타락하고, 불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는데 왜 불의를 심판하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냈는데 자신들을 심판하면 하나님이 불의하신 거라고 주장합니다. “가룟 유다가 왜 배신자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다면, 누군가 배신해야 했다면, 친구의 배신이 구약에 약속되었다면 그 말씀이 성취된 통로가 가룟 유다인데 왜 그를 정죄하느냐?”는 논리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친구에 의해 배신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다면 누군가 배신해야 하고, 누군가 못 박아야 하고, 누군가 사형을 판결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속제물이 되는 데 쓰임 받은 사람들을 왜 정죄하느냐는 논리와 똑같습니다. 또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했다”는 말씀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있으면 은혜를 더 받기 위해서 죄를 더 많이 지어야겠다”고 왜곡해서 이용하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논리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진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논리가 종교 안에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도전
네 번째 반발은 유대인들의 불충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믿지 않고, 하나님께 충성되지 않음으로 도리어 많은 이방인이 열심을 내서 하나님께로 나오게 되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불충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나타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느냐는 식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도전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반박할 것입니다. ‘내 거짓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더욱 풍성해져서 그분에게 영광이 됐다면 왜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심판을 받느냐?’ 그리고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렇게 말한다고 비방하니]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7~8절).
같은 맥락의 논리입니다. 나의 거짓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더 풍성해졌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면, 왜 내가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는 논리입니다. “유대인들의 죄가 하나님 영광에 기여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면 내 악이 하나님께 귀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악을 심판하십니까?”라는 논리로 대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룟 유다나 본디오 빌라도를 비롯해 예수님의 죽음에 도구가 된 사람들의 죄와 악이 도구가 되었다고 해서 그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악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지만, 그 악 자체가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네 가지 해괴망측한 논리를 반반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혜로운 것은 되도록 ‘유대인’이라는 단어를 배제합니다. 유대인들의 반발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반발은 유대인들의 불충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믿지 않고, 하나님께 충성되지 않음으로 도리어 많은 이방인이 열심을 내서 하나님께로 나오게 되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불충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나타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느냐는 식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도전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반박할 것입니다. ‘내 거짓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더욱 풍성해져서 그분에게 영광이 됐다면 왜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심판을 받느냐?’ 그리고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렇게 말한다고 비방하니]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7~8절).
같은 맥락의 논리입니다. 나의 거짓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더 풍성해졌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면, 왜 내가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는 논리입니다. “유대인들의 죄가 하나님 영광에 기여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면 내 악이 하나님께 귀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악을 심판하십니까?”라는 논리로 대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룟 유다나 본디오 빌라도를 비롯해 예수님의 죽음에 도구가 된 사람들의 죄와 악이 도구가 되었다고 해서 그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악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지만, 그 악 자체가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네 가지 해괴망측한 논리를 반반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혜로운 것은 되도록 ‘유대인’이라는 단어를 배제합니다. 유대인들의 반발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심판을 왜 내가 받아야 하는가?’라는 유대인들의 반발에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8절).
사도 바울은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논리로 “왜 내가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했다면, 죄가 은혜를 더하는데 쓰임 받았다면, 왜 내가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라는 말이 안 되는 논리로 하나님의 심판에 저항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에게 이것을 적용하면 “나는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받은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예수님을 믿어 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빚을 진 것처럼 신앙생활을 합니다. 자신이 교회에 나와 줬고, 예수님을 믿어줬고, 신앙생활을 해 줬다고 생각합니다. 봉사도, 헌신도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해줬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틀렸습니다. 심판받아 마땅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처절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베풀어 주신 모든 것을 스스로 포장하는 것은 종교적인 생각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졌던 사고방식입니다.
여러분, “나는 심판 받아 마땅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말씀에 반발하는 마음이 있다면 종교성입니다. 종교적인 생활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복음 안에서 믿음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 마음과 사고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쌓아왔던 종교적인 울타리가 어쩌면 우리 교회 안에,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 우리의 생활 속에 종교라는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나는 심판 받아 마땅합니다”라는 첫 번째 진리조차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인간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값없이 주시는 그 은혜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선명하게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8절).
사도 바울은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논리로 “왜 내가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했다면, 죄가 은혜를 더하는데 쓰임 받았다면, 왜 내가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라는 말이 안 되는 논리로 하나님의 심판에 저항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에게 이것을 적용하면 “나는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받은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예수님을 믿어 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빚을 진 것처럼 신앙생활을 합니다. 자신이 교회에 나와 줬고, 예수님을 믿어줬고, 신앙생활을 해 줬다고 생각합니다. 봉사도, 헌신도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해줬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틀렸습니다. 심판받아 마땅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처절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베풀어 주신 모든 것을 스스로 포장하는 것은 종교적인 생각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졌던 사고방식입니다.
여러분, “나는 심판 받아 마땅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말씀에 반발하는 마음이 있다면 종교성입니다. 종교적인 생활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복음 안에서 믿음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 마음과 사고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쌓아왔던 종교적인 울타리가 어쩌면 우리 교회 안에,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 우리의 생활 속에 종교라는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나는 심판 받아 마땅합니다”라는 첫 번째 진리조차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인간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값없이 주시는 그 은혜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선명하게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마땅치 않다고 반발하는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죄성을 깊이 깨닫고, 십자가 앞에 나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하나님의 심판이 마땅치 않다고 반발하는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죄성을 깊이 깨닫고, 십자가 앞에 나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