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주일강단]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요한복음 20:24~29 
/ 이재훈 목사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바에 의해서만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인 것 같지만, 인간이 경험하는 세상의 신비에 대해 믿음을 가지지 않고 자신의 경험에만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가 잠든 것처럼 쉽고 조용하게 믿음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많은 의심과의 싸움을 통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고, 믿음을 가진 이후에도 많은 의심과 싸우기도 합니다. 그 중요한 이유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것만 확실하다고 믿는 인간 안에 있는 뿌리 깊은 의심의 습성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볼 때 그들보다 낮은 차원의 존재들이 있습니다. 어떤 생물과 동물 등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저차원의 존재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차원, 우리가 모두 깨달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인간보다 높은 차원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신비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원래 과학의 발견은 그 신비를 탐구하며 발전한 것입니다. 별의 신비, 하늘의 신비를 탐구하며 천문학이 발전했습니다. 땅의 신비를 탐구하며 지질학 같은 여러 학문이 발전했습니다.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며 생물학이 발전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어느덧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확신할 수 있는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아직 과학이 발견하지 못한 엄청난 우주의 신비, 인간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는 경외심을 가지면서,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믿음을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과학과 이성도 무시하고,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가 기준이 되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생물학적 과학으로 두 개의 염색체밖에 없는 인간의 성을 자신이 느끼는 대로 규정하자는 것이 사회적 성(social gender)입니다. 과학도, 이성도, 심지어 인간의 경험도 모두 무시해 버리고 자신의 느낌이 곧 기준이 되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그들의 이념은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같습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생각’은 이성, 회의, 의심, 합리적 판단 등 모든 것을 검증해야 인간이 진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실 문제지만, 지금은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가 이념이 된 것 같습니다, 내가 느끼는 것이 곧 기준이 되고, 내가 느낄 수 있는 것만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뿌리 깊은 의심과 불신의 습성 때문입니다. 
 
‘도마’의 의심과 불신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의심과 불신의 습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 도마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막달라 마리아 같이 가장 깊은 사랑으로 섬겼던 제자에게도 나타나셨지만, 깊은 불신과 의심 속에 있는 제자도 찾아 주셨습니다. ‘도마’라는 제자가 어떤 제자인지를 보여주는 두 개의 본문이 <요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에게 가시려고 할 때 제자들이 만류했습니다. 이미 베다니에는 예수님을 해치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곤란에 빠뜨릴까를 생각하고, 죽음에 넘길까를 궁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만류할 때 도마가 나섰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모두를 놀라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각오했다면 우리도 각오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앞뒤를 가리지 않는 말입니다. 예수님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예수님이 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말씀하셨는지를 모두 깨닫지 못해도 “예수님이 죽음을 각오하셨다면 우리도 죽어야 하는 것 아닌가?”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또 한 본문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제 나는 떠날 것이고, 보혜사 성령이 오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 중에 어디론가 떠나신다고 하니까 도마가 질문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 길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도마는 지금 예수님이 이 세상 어디론가 가는 것이고, 거기로 가는 길을 모른다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답변하신 말씀이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종합하면 도마는 충성스럽지만,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만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상상력이 부족하고, 우직하지만 답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충격적인 일을 경험할 때 소화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그 어떤 제자들보다 어려웠을 거라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고, 그 이후 제자들이 함께 모였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은 잠시 볼일을 보러 간 것이 아닙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혼자 소화해 보려고 어딘가에 틀어박혀서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애쓰는 도마의 모습을 충분히 연상할 수 있습니다.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없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도마의 캐릭터가 만들어 낸 딜레마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8일이 지난 후에 다시 나타나신 것은 도마를 만나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도마와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았다”고 증언했지만, 오늘 본문처럼 “내 눈으로 직접 그분을 보고, 내 손가락으로 그분의 못 자국에 넣어보고 내 손으로 그 창에 찔린 허리를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실 이 말은 “나에게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면 내가 믿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못 믿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무례한 말입니까? 몸에 큰 흉터가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흉터가 진짜인지 한 번 만져보겠다고 하면 얼마나 무례합니까?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내 손으로 창에 찔린 허리를 만져봐야만 믿을 수 있습니까? “내가 직접 예수님을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봐야 믿습니까? 창 자국에 손을 넣어봐야 합니까? 자신의 손으로 만져봐야겠다는 것은 “못 믿겠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매우 무례한 말입니다. 그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도마였기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 죽음을 해석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스타일의 사람들은 꼭 혼자 일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확실하게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 사람들을 만나려하지 않습니다. 의심이 생기면 일단 순예배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의심이 해결될 때까지 안 나오는 것입니다. 엉뚱한 책을 읽고, 엉뚱한 해결책을 가지고 가다가 이단이나 사이비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만 확실하다고 믿는 ‘도마주의’에 빠지면 충격적인 사건이나 고난을 받을 때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라는 의심과 질문을 떠올리면서 공동체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그때 믿음의 더 큰 위기가 옵니다. 그리고 주일예배에 나오지 않게 됩니다. 그 주일에 꼭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그 자리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의심의 늪에 빠집니다. 
 
십자가의 상처와 흔적
 
예수님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함께 있다”고 하신 말씀을 그냥 주신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 각자 믿음의 의심이나 연약함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많은 확신이 주어지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홀로 기도하는 것보다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게 더 빠른 확신과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도마는 혼자 외롭게 십자가의 충격을 소화해 보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내가 직접 손가락을 넣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말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고, 문이 닫혀 있었지만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들어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도마를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가 한 말 그대로 하셨습니다. “도마야, 네 손가락을 내 못 자국에 넣어보고, 네 손을 내 창에 찔린 자국에 넣어보라.” 도마가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을까요? 예수님이 없는 자리에서 제자들과 함께 했던 말을 예수님이 도마에게 직접하고 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사실 그 말은 “내 손가락을 넣어봐야 믿겠다”는 말이 아니라 믿을 수 없다는 표현인데, 예수님이 그 표현 그대로 도마에게 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신 곳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단절된 곳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대화를 들으시고,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우리의 행동을 보시고, 우리가 남모르게 한 말을 모두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실 때 “너 그렇게 말했는데 나에게 해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분이십니다.  
도마가 “손을 넣어보고, 만져보겠다”고 하는 그 발상 이면에 있는 뿌리 깊은 의심의 문제를 예수님이 제거해 주셨습니다. 문이 닫혔어도 들어오실 수 있고, 돌문이 막고 있어도 나오실 수 있는 몸으로 부활하셨지만 그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부활이 온전하게 되지 않아서 상처가 남은 것이 아닙니다. 도마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아셨기에 그 상처와 흔적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천상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도 그 상처와 흔적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도마를 위해서만 상처와 흔적을 남겨 두셨다가 다시 온전케 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흔적을 영원히 그 몸에 간직하시고 남겨 두셨습니다. 그 흔적으로 인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본고로 믿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예수님이 “내가 말한 대로 한 번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 창 자국을 만져보라”라고 하셨을 때 도마가 어떻게 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그 순간 도마는 모든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용서하실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주시는 분이 되심으로 우리의 주님,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주님이시며 또한 하나님이심이 증거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믿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마처럼 손가락을 넣어보고 만져봐야 믿겠다는 체험을 먼저 요구하지 말고, 믿음으로 체험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C.S.루이스의 <기적>이라는 책이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장 논리적이고 정확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친구 이야기를 합니다. 그 친구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은 당연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환상을 본 것입니다. 환상을 보기 전에는 영혼이 불멸하니까 귀신이 존재할 수 없다며 믿지 않았는데 환상을 본 것입니다. 영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환상이었습니다. 그 환상을 본 이후에도 그 친구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여 졌다면 무엇인가 믿어야 할 텐데 전혀 믿음에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체험이 믿음에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사 속에 얼마나 많은 체험과 기적과 표적이 있었습니까? 표적이 부족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으려는 불신의 죄악 때문에 어떠한 체험과 기적과 표적이 있어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은 어떤 증거도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이미 우리에게 충분한 증거요, 성경이 충분한 증거요, 교회 역사 속에 나타난 성도들의 변화가 충분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고로 믿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증거가 없어도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증거가 있고, 그 중심을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거가 있고, 그분을 믿고 따랐던 믿음의 선배들의 삶의 증거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 증거 외에 또 다른 증거가 있어야만 믿겠다고 요구하면 안 됩니다.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거로 만족하는 믿음이 있을 때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 “체험이 있어야 믿겠습니다”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기도실에 가서 “하나님, 제가 중고등부 회장인데 예수님을 만나야 나도 예수님을 봤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른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라고 말하는 간증을 듣고 내게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체험이 없으니 예수님을 만나야겠습니다”라고 점심시간에 점심도 안 먹고 기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그냥 배만 고팠습니다. 예수님이 안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런 일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1년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살아계심이 말씀 가운데 믿어졌을 때 더 큰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신비한 체험이 있어야 믿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속는 것입니다. 더 큰 체험만 추구하다가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증거 그 자체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늪에 빠져버립니다. 
 
보지 못했으나 사랑하고, 
보지 못했으나 기쁨으로 즐거워하고
 
“그러나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29절). 
여러분, 참된 축복의 삶을 누리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경의 증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거,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증거로 만족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눈에 아무런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이미 충분한 증거가 있기에 믿음으로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체험이 따르고, 신비로운 역사가 따라오고, 더 큰 확신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 모든 삶의 원리가 동일합니다. 과학자들이 어떤 원리를 발견할 때 가설을 세우고 실험합니다. 실험을 시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 없는 가설을 왜 세웁니까? 무엇인가를 믿기 때문에 실험하고 투자하는 것입니다. 아닐 수도 있고 정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험 이전에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체험한 것만 믿겠다고 하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신앙의 내용을 구성하는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것도 “나는 믿습니다”라고 말하지 “나는 압니다. 이해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도 우리가 모두 깨달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체험하는 것이지, 내가 모두 이해해야만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에 대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들과 말씀을 믿음으로 응답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주신 말씀에서 세 종류 사람을 나눴습니다. ‘보고도 믿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증거가 있음에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봐야 믿는 자’가 있습니다. 도마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의 복을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으나 사랑합니다. 지금도 여러분은 그분을 보지 못하지만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합니다. 이는 여러분이 믿음의 결과로 영혼의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벧전 1:8~9). 
그들은 보지 못했으나 사랑하고, 보지 못했으나 기쁨으로 즐거워합니다. 베드로가 자신들이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합니다. 나는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생활했고,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있는데도 예수님을 부인한 적이 있었는데 당신들은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기뻐하고, 고난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이 있다”고 하신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베드로가 고백한 대로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가 되어 보지 않고도 믿는 복을 누림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