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주일강단 / 새 계명

지난 주 말씀은 ‘빛 가운데로 행하면 진정한 삶이 있다’ ‘죄라는 것은 사귐을 방해하는데 죄를 해결하면 사귐이 이루어지게 된다’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진정한 사귐은 행동을 수반한다’ ‘믿음과 행동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하는 것이다’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절, 2절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죄와 멀리 하면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라도, 대단한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죄를 씻는 주님의 보혈 1절, 2절 말씀에서 예수님의 두 가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변호사(대언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천국 법정에 서게 됩니다. 판사는 하나님이요, 검사는 사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변호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지은 우리를 위해 “내가 십자가 위에서 이 사람의 죄를 위해서 피를 흘렸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 내가 피를 흘리면 내 피 때문에 나를 믿는 자는 용서해주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변호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하십니다. 둘째, 화목제이신 예수님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짐승을 데리고 와서 짐승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사람의 죄가 이 짐승에게 다 전가되었다고 말하고 짐승을 죽입니다. 화목제, 번제, 속죄제는 짐승의 피를 제단에 드리고 짐승의 몸을 다 토막 내서 태워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짐승의 피와 타는 모습과 냄새를 보고 그 짐승을 드린 사람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구약의 죄를 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만약 이대로 계속 해야 한다면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수없이 짐승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피흘림이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씻기 위해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야 하지만, 예수님은 단 한번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그 피를 믿으면 담대하게 하나님이 계신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보면 죽음의 사자가 애굽을 덮칩니다. 모세가 바로를 찾아가 “내 백성을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하지만 바로는 이를 거절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피,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등 9가지 재앙을 내렸는데도 바로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재앙은 짐승의 첫 새끼를 다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애굽을 덮칠 때 하나님의 목적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기에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그 집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출 12:7, 13)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양의 피를 바른 집의 사람은 다 살리셨습니다. 남자도 살고 여자도 살았습니다. 그러나 피를 바르지 않은 집의 장자는 모두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그것입니다. 동일하게 죄를 범하고 동일하게 엉뚱하게 살아가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피가 있기에 그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서 죽지 않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탄의 속임수 두 가지를 주의하십시오. 첫째, 사탄에게 속지 마십시오. 사탄은 ‘네가 죄를 지으면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을꺼야’ ‘네가 예수님을 믿지만 죄를 지었으니 지옥에 가야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성경은 당신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죄를 지어도 예수님의 피 때문에 지옥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둘째, 사탄은 예수님 믿고 난 이후에도 죄 짓는 것을 다 용서받으니 아무렇게 마음대로 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 믿고 난 이후에는 ‘내 죄가 다 용서받으니 마음대로 살아야지’라는 마음이 절대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 피로 내 죄가 모두 용서받았으니 앞으로 거룩하게 살아야지’라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내 부모는 내가 말썽을 부려도 화를 안내는구나. 내 마음대로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자녀가 있습니까. 부모의 사랑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앞에 거룩하고 성결하게 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 구원받는다면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은혜를 더하려고 더 많은 죄를 짓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서 사도요한은 ‘너희가 짓는 죄는 다 용서를 받지만 죄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사귐을 깨뜨리니 죄를 짓지 말고 거룩하게 살라’고 합니다.  두 가지를 분명하게 하십시오. 당신의 모든 죄는 십자가에서 용서되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사귐을 깨뜨리고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게 하니 죄를 짓지 말고 거룩하게 사십시오.  참된 믿음 = 참된 행동 그렇다면 죄 짓지 않고 사는 모습은 어떤 모습이며 사귐을 깨뜨리지 않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3절에서 6절까지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이 구절에는 죄를 짓지 않고 사는 다섯 가지 모습이 나옵니다. ‘그의 계명을 지킨다’ ‘저를 안다’ ‘그의 말씀을 지킨다’ ‘그의 안에 거한다’ ‘그의 행하시는 대로 행한다’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섯 가지가 다 같은 내용입니다.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지식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구원은 믿음이나 십자가의 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지식이나  신령한 지식으로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영지주의자들은 신령한 지식이 중요한 것이지 올바르게 사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대로 살아도 신령한 지식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가르침에 대해 사도요한은 ‘믿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이고 행하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안에 거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체험에 의해 예수님 안에 내가 거하는 것,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뭔가 신령한 위치에 가서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거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요한은 ‘그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올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증거입니다. 사람이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살았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구원받는 사람은 올바르게 살고 싶은 열정이 있고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윤리적인 삶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증거이며, 열매입니다. 구원 받은 자의 삶 저는 여러분의 삶이 아름답기를 축원합니다. 예절바른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른생활 사나이, 바른생활 아가씨가 되기를 바랍니다. 쓰레기를 분리해서 버리고, 교통법규를 어기면 벌금을 내십시오. 이런 것이 다 중요합니다. 그렇게 지켰다고 구원받고 지키지 못했다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고, 새치기 하지 않고 사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은 참된 도덕적 행동을 요구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진정한 행동과 통합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포도나무에서는 포도가, 무화과나무에서는 무화과가 열립니다. 참되고 선한 열매가 맺히면 그 사람은 진짜 믿는 사람이고, 10년, 20년 믿는다고 하지만 선한 열매가 하나도 맺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가짜입니다. 믿음과 행동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올바른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매일 짜증내고 불평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불평이 떠나길 축원합니다. 사는 모습이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표정도 천국 표정으로 바뀌기를 바랍니다.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한번 두 번 죄를 지으면 영혼도 구겨지고 인상도 구겨집니다. 죄를 자백하면 펴집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보고 ‘저 사람 진짜 믿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사과나무에서는 포도가 맺히지 않습니다. 포도나무에서는 포도가 맺힙니다. 어떤 사람은 보함직도 먹음직도 한데 애처롭게도 열매가 정말 작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거봉같이 큰 열매가 맺힙니다. 사도요한이 요한일서를 쓴 목적은 구원받은 자에게 구원받은 삶이 나타나게 되어있는데, 그 삶이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확실한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인데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들을 실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새 계명의 핵심 ‘사랑하라’ 7절부터 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사도요한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쓴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지만 이것은 갑자기 돌출되어 나온 계명이 아니라 구약성경 창세기부터 계속해서 말씀하신 계명입니다. 옛 계명이지만 예수님께서 압축해서 주셨으므로 새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계명의 핵심은 ‘사랑하라’입니다. 10절과 11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와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입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이고,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거하는 자입니다. 더 발전시켜서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인데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자인데 그는 눈이 멀어져서 갈 길도 찾지 못합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은 자의 열매는 행함으로 나타나는데 행함 가운데 가장 핵심은 사랑이다’라는 것입니다. 보는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형제자매를 사랑하십시오. 식구를 사랑하십시오. 식구를 사랑하지 않고 인류를 사랑한다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주님은 ‘너희 가족을 먼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자의 증거 가족을 미치도록 사랑하십시오. 가족을 볼 때 노래가 나오게 해 주십시오. 내 자녀를 볼 때, 내 부모를 볼 때, 내 아내와 내 남편을 볼 때 노래가 나오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할렐루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 형제, 친구, 동역자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열매입니다. 그것이 빛 가운데 있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과 사귀는 증거입니다. 아름다운 삶은 구원의 증거입니다. 순식구를 사랑하고, 동역자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십시오. 가족을 봐도 무덤덤하면 회개하십시오. 집을 들어갈 때 환호성 치십시오.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표현방법과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MBC 전파견문록이라는 프로그램은 아이가 설명하는 것을 맞추는 프로그램입니다. ‘총은 총인데 총이 안 나오고 바람이 나와요.’ 이것이 무엇일까요? 답은 ‘헤어드라이어’입니다. ‘이것은 위와 아래가 바뀌면 큰일 나요.’ 답은 ‘인어공주’입니다. 똑같은 단어를 설명하는데 어른과 아이가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미워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니지만 표현법이 다르고 이해방법이 다르기에 사랑하는 방법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상대방이 솔직하고 정직하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권면하고 칭찬하려고 애쓰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표현법과 삶의 스타일을 이해하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이것을 뒤틀리게 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공동체는 서로 이해하고 감싸주고 응원하고 박수쳐줍니다.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또 한 가지 비밀이 10절, 11절에 있습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게 되어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리낌은 걸림돌입니다. 형제를 열심히 사랑하다보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걸림돌이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열심히 사랑하게 되면 나와 다른 사람과의 걸림돌이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거하여 걸림돌이 생기게 되어 어두움 가운데 헤매게 됩니다. 갈 곳을 알지 못하고 눈이 멀게 됩니다. 형제를 미워하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미움은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사랑은 판단력을 밝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옳은 결정을 할 수 있지만, 미움과 죄악과 시기 가운데 있으면 그릇된 결정을 하게 됩니다. 실제적인 삶은 영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은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편에게 아내와 즐겁게 지내서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싸우면 기도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형제를 미워하면 하나님과의 사귐이 막힙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막힌 돌들이 뽑히면서 영적인 판단력이 밝아질 것입니다. 반대로 미워하게 되면 영적인 판단력이 흐려지고 결정하는 것마다 엉뚱한 것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구원의 증거이며 빛 가운데의 새 계명입니다. 예수님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랑의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믿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삶이 있게 하옵소서. 사랑의 삶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