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하나님

스가랴 3장 1~10절 이재훈 목사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양의 피로 하루 만에 온 세상의 죄를 씻는 대속제일이 올 것입니다. 마지막 날 천국의 안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이스라엘 역사에 포로 귀환 시대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심판받은 백성들을 다시 일으켜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살아있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한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영혼과 양심의 회복

 

스가랴서에 나오는 여덟 개의 환상 중에 지금가지 세 개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세 가지 환상들은 모두 회복과 격려의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신다’, ‘주변의 교만한 나라들의 뿔을 꺾으신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불성벽이 되어 주시고, 눈동자처럼 보호해 주신다’는 약속들이었습니다.  여러분, 회복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속에서 믿음이 솟아나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보다 의심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씀이 확신으로 다가오지 않고 나와는 거리가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느끼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약속의 말씀이 주어져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약속의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스가랴와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로 잡혀갔었습니다. 큰 실패를 경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패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격려하고 회복시키겠다는 환상을 보여주셨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의심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죄책감 때문입니다. 진정한 회복은 영의 회복과 거룩한 양심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물질적으로 번성하고, 주변 나라들이 무너지고, 외형이 회복되는 것이 진정한 회복이 아닙니다. 영혼과 양심의 회복이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진정한 회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재판 받는 대제사장 여호수아

 

스가랴가 본 네 번째 환상에는 여호수아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정복을 이끌었던 여호수아가 아니라 대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 대세사장은 혈통으로 이어집니다. 여호수아의 아버지는 여호사닥이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스라야였는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당할 당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아마 여호수아는 바벨론에서 출생해서 포로 귀환시대에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것을 내게 보여 주셨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이 여호수아의 오른쪽에 서서 여호수아를 고소하고 있었다”(1절).고소라는 단어가 쓰인 것으로 보아 재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말성경에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서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천사는 그냥 천사가 아닙니다. 개역개정에서 ‘여호와의 사자’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성자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재판의 권세를 가진  성자 하나님 앞에 여호수아가 서 있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대제사장

 

사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고소했습니다. ‘사탄’은 히브리어를 그대로 번역한 것인데 비난자 혹은 고소자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사탄을 가리켜 ‘하나님 앞에 밤낮 참소하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주 무기는 고소입니다. 사탄은 근거 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고소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근거 있는 것을 가지고 고소합니다. 사탄이 내세우는 근거는 바로 사람들의 죄와 허물입니다. 죄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허물없는 사람이 없고, 문제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때로는 사탄의 고소가 정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고소한 내용이 아닌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바라봐야합니다. 

사탄이 여호수아를 고소한 이유는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때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었다”(3절). 대제사장은 더러운 옷을 입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더럽다는 것은 단순히 먼지가 묻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물을 뒤집어 쓴 상태를 말합니다. 대제사장에게는 율법에 따라 정해진 옷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이 정한 예복을 입지 않고 오물을 뒤집어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 일입니다.

모세 시대에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을 했다가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지성소로 들어갈 때는 의복에 방울을 달고 발에 줄을 매고 들어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오랫동안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대제사장이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줄을 당겨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대제사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엄하게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대제사장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율법대로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의 직분 상 이 문제는 여호수아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인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습니다.

 

고소하는 근거와 동기         사탄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를 고소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일까요. 아닙니다. 사탄이 율법을 지키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잘 지키도록 본보기를 세우기 위한 것일까요. 사탄은 그렇게 선한 마음을 가질 리가 없습니다.

사탄이 고소한 근거는 율법이지만 동기는 율법의 의미와 매우 다릅니다. 사탄이 고소하는 이유는 저주하기 위해서입니다. 멸망시키고, 무너지게 하기 위해서 고소를 한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고소였습니다. 사람들은 고소 앞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고소는 내용보다 동기가 중요합니다. 누군가를 무너뜨리거나 저주하기 위해 고소를 한 것이라면 사탄적인 행동입니다. 고소의 동기가 누군가를 회복시키고, 일으키고, 살리기 위한  목적이어야만 하나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고소의 동기를 잘 구별해야합니다.

 

뜻밖의 판결 내리신 하나님

 

사탄의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일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당시 백성들은 사탄의 고소가 옳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했지만 제사장들마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는 것은 그 민족의 영적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사탄의 고소에 대해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허물이 드러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탄의 고소는 정당합니다. 분명 여호수아가 잘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고소의 동기입니다.

 

만약 한국교회가 모두 문을 닫게 하는 것이 고소의 동기라면 그것은 사탄의 고소입니다. 반대로 한국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해,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노력하려는 지적과 고소는 필요합니다. 고소의 근거도 중요하지만 동기가 더 중요합니다.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었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 당연히 죽어야 했습니다. 사탄이 고소하게 된 동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수아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고소당한 내용이 거짓이라면 대항을 하겠지만 잘못한 것이 사실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고 그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뜻밖의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죄와 허물 넘어서는 은혜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나 여호와가 너를 꾸짖는다!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여호와가 너를 꾸짖는다! 이 사람은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토막이 아니냐?’”(2절). 놀라운 판결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는 무죄를 선고하고, 여호수아를 고소한 사탄을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사탄이 고소한 내용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탄의 고소는 정당했습니다. 사탄은 율법을 근거로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사탄을 책망하셨을까요. 세 가지 이유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꾸짖지 않고 사탄을 꾸짖은 이유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의롭다는 뜻도 아닙니다. 또 사탄의 주장에 근거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의롭다고 인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정죄하겠습니까? 죽었을 뿐 아니라 살리심을 받으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롬 8:33~34). 하나님은 죄와 허물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죄와 허물이 하나님의 선택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그의 후손들, 모세와 그의 백성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와 허물은 하나님의 선택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탄이 결코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사탄은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고소의 동기가 회복이 아니라 넘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고, 구원이 아니라 심판을 위해 고소하는 사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간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보다 앞선 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발과 선택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선택하신 이후에 죄와 허물을 다루십니다. 죄와 허물을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에도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탄의 고소로 인해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야합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이들을 구원하십니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토막’이라는 표현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잘 웅변하고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가 여섯 살 때 그가 살던 목사관에 불이 나 천장이 무너지는 사고를 겪었는데 이웃주민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 이후 그는 ‘나는 불에서 꺼낸 그슬 나무토막’이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이 간증이 주는 메시지는 주인에 의해서 구출되었다는 것입니다. 불속에 떨어진 나무가 타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건져냈다는 것은 무엇인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속에서 없어질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벌하셨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심판이 있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에 타서 없어지지 않도록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까지 하나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심판으로 끝내기를 원합니다. 사탄의 역사는 저주입니다. 분열과 다툼으로 상처만 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심판과 더불어 구원을 행하십니다. 새로운 일을 행하십니다.

 

그슬림을 씻어주시는 하나님 역사를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해서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또 후손들이 노아시대에 완전히 타락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셨습니다. 이때도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살려주셨고 그의 가족들을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고 타락하자 이번에는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새로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또 타락해서 죄를 범했고 그 죄로 인해 바벨론이 멸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포로에서 귀환시키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멸망으로 끝나지 않고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슬림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사탄은 그슬린 나무를 보고 고소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슬린 나무는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를 깨끗하게 만드셔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면  그슬린 나무라도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에 그슬린 나무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었을 때 우리의 영혼에는 불에 그슬린 상처가 있습니다. 사탄은 그슬림을 부각시켜 우리가 포기하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그슬림을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원한 이들을 정결하게 회복시킵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탄의 고소를 막아주시는 것에서만 그친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자녀에게 슨 문제가 있는데 자신의 자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방어만 하는 부모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하나님은 백성들의 죄와 허물에 대한 사탄의 고소를 막는 동시에 해결책을 제시해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서 있는 천사들에게 명령하셨다. ‘여호수아의 저 더러운 옷을 벗기라.’ 그리고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자, 내가 네 죄를 없애 버렸다. 이제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힐 것이다’”(4절).구약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어떻게 회복시켜주십니까. 단순히 죄를 덮어주시는 해결이 아닙니다.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선택하신 이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온전하게 해서 다시는 사탄이 고소할 이유가 없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받은 십자가의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매우 값비싼 은혜입니다.

옷이라는 주제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등장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하자 그 옷을 벗기시고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왜 가죽옷입니까. 가죽에는 한 생명이 숨어있습니다. 가죽이 되려면 한 생명이 죽어야합니다. 생명이 버젓이 살아있으면서 가죽만 바치는 동물은 없습니다. 가죽옷이 주는 메시지는 ‘한 생명의 희생으로 죄를 덮지 않으면 내 앞에 설수 없다’는 계시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들을 흰옷을 입은 백성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보혈의 피로 옷을 씻었습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창세기 3장의 계시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계시가 일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하나님 앞에 설수 있습니다. 어떤 선행이나 의로움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워질 뿐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들은 아담과 하와가 입은 무화과나무 옷입니다. 하나님이 덧입혀 주는 가죽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옷입니다. 의(義)라는 단어가 놀랍습니다. 한자를 보면 양(羊)이 나아(我)를 덮고 있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성경을 아는 사람이 만든 것 같습니다. 진정한 의는 나위에 어린양이 덮여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대제사장 예수님

 

진정한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회복되는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부터 10절까지 세 개의 명칭으로 장차 오실 메시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그리고 여호수아 앞에 앉은 여호수아의 동료들아, 잘 들으라. 너희는 앞으로 생길 일의 표가 될 사람들이다. 보라. 내가 ‘순’이라 부르는 내 종을 보내겠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한다. ‘내가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돌 하나에 일곱 개의 눈이 있다. 내가 그 돌 위에 이 땅의 죄를 하루 만에 없애겠다는 글을 새겨 놓겠다. 그날에는 너희가 너희 이웃을 서로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부를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한다”(8~10절).   첫째는 순, 두 번째는 종, 세 번째는 돌이라고 했습니다. 이 표현은 십자가의 사건을 본 이후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양의 피로 하루 만에 온 세상의 죄를 씻어버리는 대속제일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예언입니다. 마지막 날 천국의 안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더러운 옷을 벗겨주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일러스트 윤종은  janehome@naver.com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