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부흥집회

<2015 송구영신 40일 새벽기도회> 시편 5편

시편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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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의 많은 기도 가운데 쓰여 졌습니다. 그 기도는 많은 사람들이 고난 중에 배웠고 반복하면서 우리가 고난 속에 어떻게 기도해야할지, 하나님 앞에 나가야될지를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아니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게 됩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악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 악함을 깨트리시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심으로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그것이 시편을 통해 얻는 귀한 교훈입니다.

다윗은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귀하게 쓰임 받은 하나님의 지도자이지만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사울 왕의 질투 때문에 죽을 뻔한 위기를 여러 번 겪었고 적어도 10년 이상 광야를 도망 다니면서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많은 고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시편의 여러 장면들, 많은 장면들이 그가 도망 다니면서 지어진 시입니다. 동굴 속에서, 수풀 속에서 사울의 위협을 피하고 그는 그것을 기도로 남겼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고난당하는 자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가 나이가 들었을 때, 아들 압살롬의 배반으로 인해 고난을 당했습니다. 전반부 젊을 때의 고난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시키기 위한 고난이었다면 후반부의 그의 고난은 죄와 허물로 인해 하나님이 그를 더욱 거룩하게 하시고, 죄의 쓴 열매를 거두게 하심으로서 그를 더욱 거룩하게 연단시키는 차원의 고난이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다윗은 기도를 배웠습니다. 특별히 가장 우리의 삶 속에 고통스러운 고난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고난입니다. 환경의 어려움, 배고픔, 질병 등 많은 고난이 있겠지만 많은 고통을 주는 것은 사람으로 오는 고난입니다. 원수의 고난입니다.

시편 5편은 한가한 상황에서, 평안한 상황 속에 나온 기도가 아닙니다. 1-2절만 보면 얼마나 아름답고 예쁜 고백처럼 보입니까. 편안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차를 마시고 따뜻한 햇살을 맞이하며 고요한 시간 가운데 하는 Q.T.(Quite Time)의 장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맥락을 보면 다윗은 원수의 고난 앞에 처해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여~”로 시작합니다. 원문에서는 “귀를 기울여 주소서. 귀를 기울여 주소서” 하며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간절한 호소로 시작합니다. 시편 5편은 탄원시라 불립니다.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것입니다. 원수의 고통 앞에 자신의 사정을 아뢰고, 하나님께서 원수를 해결해주시길 ‘원수의 고난을 통과해야할지, 제발 저 원수를 하나님 해결해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탄원의 호소의 시입니다.

탄원시를 통해 배울 점은 ‘하나님 앞에 어떠한 태도로 탄원해야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1-2절에 다윗이 탄원하는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소서. 내 탄식 소리를 들어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첫 단어가 ‘귀를 기울여주소서’입니다. 얼마나 간절한 호소입니까. ‘나의 심정을 헤어려주소서’라고 이야기합니다. ‘심정’이란 단어는 마음을 짓누르는 무게와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입을 열면 터져 나오는 탄식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마치 한나가 그의 자녀가 없음으로 인해 고통 받고 힘들어할 때, 그의 입술을 열어 고백하는 것이 엘리 제사장이 볼 때 마치 술 취한 것과 같은 탄식. 입을 열어 나오는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고통의 절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한 고통은 부르짖게 되어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합니다. 때로 우리의 기도는 조용한 기도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조용함 가운데 대화 중에 하는 기도일 수 있지만 부르짖는 소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부르짖어 기도하는 성도를 보면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귀가 막히셨는가.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를까’하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의 전통이 “주여~”로 하는데, 외국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르짖음이 고난과 시련 속에서 모일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한국 성도들의 영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신학교 다닐 때 존경하는 교수님 중 하나는 기도를 참 많이 하시고, 기도를 강조하는 분이셨습니다. 저희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당신들은 앉기만 하면 듣는 것이 신학적 지식일텐데…. 그래서 더 흘려보내는 것이 많을 것이다. 더 많이 기도해야한다. 기도가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전하셨습니다. 신학교 채플 시간이 끝날 때, “아버지~”하며 시끄러워서 기도를 못할 정도로, 그 분의 기도 소리 때문에 정신이 깰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신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분의 기도 소리였습니다. 많은 지식은 다 흘려버려도 부르짖는 소리는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 삶에 부르짖음의 기도가 있었던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는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어쩌면 매우 아프지만, 하나님 앞에 부르짖음으로 나아가게 하니 고난은 축복일 것입니다. 고난 속에 부르짖는 성도들은 이 기도가 나의 고백이고, 나의 노래요, 나의 기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다윗은 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이라고 부를까요? 그것은 귀중한 태도입니다. 내 기도를 응답받기 이전에 “하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순종하고 섬겨야 될, 그 분이 명령하신다면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도 따라야 될 왕 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난이 평생에 있을 지라도 그 명령에 순종해야 되겠다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아침에 부르짖고 바라리이다’ 아침에 라는 단어가 2번 반복됩니다. 다윗이 일정한 시간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할 일이 없어 한가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떼어서 그 시간에 기도를 반복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는 것은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어떻게 응답되는지 주목하고 그 기도를 믿고 응답되기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그 이후의 기대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귀를 기울여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들으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귀를 막고 기도를 안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원래 항상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것을 믿고 알기 때문에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작은 신음에도 귀 기울여주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소원을 들으시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그 이후에 나오는 내용들은 하나님 앞에 어떠한 태도로 탄원해야하는가, 원수가 주는 고통 앞에서 원수의 존재 앞에서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 탄원해야하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첫째로 다윗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고통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먼저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탄원의 이유가 편해지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탄원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4-6절에서는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준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왜 우리가 탄원의 기도를 드려야합니까. 고통 이전에 하나님이 죄를 기뻐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탄원의 가장 중요한 이유와 목적이 되어야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 앞에서 제일 먼저 기억한 것이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고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탄원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탄원의 기도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 분의 이름을 존귀히 여겨드리는 한 가지 목적, 가장 중요한 기도가 될 때 그 기도는 응답될 줄로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라.’ 탄원의 이유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다윗은 결심을 합니다. 7절에 나오는 결심입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 하리이다’

예배를 결심합니다. 우리의 고통 속에서, 원수가 주는 시련 속에서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올바른 자세는 첫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이고 두 번째는 예배자의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나는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나는 예배를 지키겠다’는 것은 예배자의 마음을 품겠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가서 예배의 태도를 지키겠다는 의미입니다. 대개 우리가 고통 속에서 원수 앞에서 탄원할 때는 예배자의 마음을 잃게됩니다. 공의를 행하고, 정의를 행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들 중에 빠지기 쉬운 오류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자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정의를 부르짖을 때 스스로 심판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자라는 것은 우리가 경외해야 될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내 생각이 아무리 옳아보여도 ‘아! 나는 하나님을 예배해야하는구나’를 깨달으며 우리의 연약함을 보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예배는 은혜스럽게 지키면서, 회의할 때는 예배자가 아닌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배드릴 때는 주님이 살아계시지만 회의할 때는 예배자가 아닌, 주님이 사라지는 회의가 됩니다. ‘예배는 예배고, 회의시간에는 회의다.’ 하며 예배 후 회의할 때는 서로 원수가 되서 싸웁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갈등할까요? 서로 원수가 될까요? 예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풍성한 사랑,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변함없는 은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 우리를 용서하심으로 우리를 받아주심으로 하는 은혜, 헤세드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쫓겨날 신세고, 버림받을 신세고, 용납되지 못할 상황들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다 품어주셔서 그 분의 풍성한 사랑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남 때문에, 우리의 의로움 때문에 우리 자신의 똑똑함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예배의 의미입니다. 예배할 수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헤세드의 사랑과 은총 없이는 예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배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스스로 의인이 됩니다. ‘나는 예배하리이다. 성전을 향해 예배하리이다.’ 원수가 주는 어떤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이 결심을 잊지 않기 원합니다. 원수가 주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예배자로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배자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최고의 영적 전쟁은 예배자의 자세를 지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 탄원할 때 이런 마음을 지킵시다. 8절 말씀,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원수들로 말미암아 자신을 돌아봅시다.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해주시고, 주의 길이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내가 주의 길을 곧바로 바라보고 걸어가게 하소서.’

우리는 원수를 탄원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원수의 공격 앞에 나를 변호하고, 나를 의롭게 여기고, 나를 정당화하기 쉽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은 다 멸망 받아야 될 사람이고, 나는 의롭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편 5편에서는 ‘죄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의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나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의 길로 걷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중요한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 거룩하심입니다. 둘째, 경외함으로 예배자의 자리를 지키는 결심, 세 번째는 ‘주의 의로운 길로 나를 인도 하소서’하며 의로우심 앞에 나를 돌아보고 그 길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입니다.

네 번째는 탄원입니다. 10절,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이 시의 가장 핵심 부분이다. 시편 5편을 읽으면 핵심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원수가 괴롭게하고 핍박할 때 우리는 10절만 기도합니다. ‘저들을 완전히 쫓아내소서.’ 하지만 우리의 탄원이 응답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1절부터 기도해야합니다. 탄원이 네 번째 순서에 나옵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기도하는 법을 손가락으로 배웠습니다. 엄지손가락을 잡으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높여드리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높여드리는 찬양입니다(Adoration) 두 번째는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도 감사한다는 의미입이다. 그 다음은 간구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정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사정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자신의 기도제목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탄원이 나옵니다. ‘하나님 그들을 쫓아내소서.’ 단 한구절만 나오는 것은 그들이 주를 배역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합당하지 않는 그들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하나님 저들을 무너뜨리되 자기 꾀에 넘어지게 하소서.’

악인이 멸망할 때는 자기 꾀에 넘어가게 되어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도 보면 바로가 자기의 꾀로 인해 모세를 선택함으로서 아이러니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이 탄원의 올바른 자세, 그들이 주를 배역하기 때문에 ‘하나님 그들을 쫓아내소서.’

이것이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탄원입니다. 복수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나오는 예언의 영과 같은 것입니다.

다섯째, 11-12절로 마무리 짓습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와 같은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마지막에 그는 기쁨과 즐거움을 기대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모든 사람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주님의 보호하심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1절에서 그는 절박한 호소로 시작합니다. ‘귀를 기울여 주소서, 나의 심정을 헤아려주소서,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호소와 절규로 시작했던 기도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안위하심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끝이 납니다. 진정한 탄원의 기도가, 드려질 때는 불안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가 주시는 평안함과 기쁨과 즐거움으로 끝납니다. 한나가 고통 속에 절규로 기도했지만 그녀의 기도가 끝났을 때는 그는 평안함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기쁨과 즐거움, 그것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모든 영혼은 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원수가 목전에 있을지라도 문제가 끝나지 않았을지라도, 나는 하나님 안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나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올바르지 않은 탄원은 복수심이 불타오르고, 미움이 불타오르고, 상처가 강해집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순서대로 이 질서를 기도로 올려드린다면, 내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예배자의 마음을 지키고 예배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한다면, 원수들을 쫓아내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평강이 임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형편을 다 아는 분이십니다. 올바른 태도로 탄원함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 이재훈 목사

작성자  조은실 기자 ces@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