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지도력 갱신을 위한 관상목회
21세기 아침이 밝기 전 20년 동안 전세계에 교회 성장이라는 큰 물결을 타고 세계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성장에 따른 만만치 않은 역기능을 경험하고 21세기에 들어서며 교회 성장 대신 교회 건강이라는 단어를 화두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건강한 목회를 할 것인가? 건강한 지도자가 되고 건강한 지체가 될 것인가’ 하는 물음이 우리 안에 일어났습니다.그러나 저는 아직도 여전히 교회 성장은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열망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성장을 위한 성장이 아니라 영혼을 구하고 전도하는 선교의 측면에서 보면 교회 성장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회 성장을 지나치게 비판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에게 ‘물속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물에서 건져내야 할 사람의 숫자를 제한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죽어가는 영혼의 안타까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 영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가질 것입니다.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전도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으며 건강한 목회를 할 것인가입니다. 이 문제를 지난 5년간 생각하는 중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지펴준 불꽃이 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나타나는 외적 부흥이라기보다 내면의 부흥입니다. 오늘 저는 밖으로 일어나는 파도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혼, 실존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야 하는 파도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이것은 오랜 기독교 역사에서 관상이란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유 있는 바라봄 ‘관상’
관상이라는 단어는 기독교 안에서 오동안 사용한 단어입니다. 관상은 영어로 칸텀플랫이션(contemplaition)입니다. 웹스터 사전에는 관상이란 ‘집중적으로 무엇, 어떤 대상을 바라본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바라본다’고 정의합니다. 여유 있는 바라봄이 관상입니다. 볼 ‘관’, 생각할 ‘상’, 깊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깊이 바라보는 기도, 목회, 바라봄의 리더십이 우리 시대에 새롭게 조명 되어야 합니다.현대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성공한 조직체의 리더십에서 네 특성을 볼 수 있습니다. 지배의 리더십, 경쟁의 리더십, 효율성의 리더십, 집착의 리더십입니다. 그러나 이런 리더십 유형이 현대에 만만치않은 부작용과 상처, 역기능을 일으키고 있고 최근 리더십 세계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관상의 리더십은 현대적 리더십이 가진 역기능이나 어두운 그림자를 극복할 수 있는 보완점을 가지고 있습니다.지배의 리더십의 반대의 개념은 섬김의 리더십입니다. 사람들을 잘 통제하는 것만이 좋은 리더십이 아닙니다. 사람을 잘 섬겨야합니다. 섬김의 리더십은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보여주신 예수님 자신의 리더십입니다. 내 생각에 맞춰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필요에 맞춰 섬기는 리더십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고 그 섬김의 절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던지셨습니다. 지배의 리더십은 섬김이 보완하지 않으면 위험한 리더십이 될 수 있습니다.경쟁의 리더십의 반대는 자유의 리더십입니다. 현대 시장은 혹독한 경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좀 더 나은 조직체를 벤치마킹하며 배우려 하고 이것은 교회 공동체에서도 일반적 현상이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경쟁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관상의 리더십은 경쟁의 리더십이 아니라 자유의 리더십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고유한 은사에 따라 내 은사를 펼칠 수 있는 나만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경쟁의 리더십은 자유의 리더십이 보완될 때 비로서 건강한 리더십이 될 수 있습니다.셋째 효율성의 리더십입니다. 짧은 시간에 최대한 효과를 창출해내는 효율성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그러나 효율성만을 인간의 판단기준으로 놓을 때 효율성을 잘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 정신적 육체적 기능을 잘 발휘하지 못하는 장애우는 고유한 생존과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문제가 생깁니다. 장애인에게도 예수님의 형상이 존재합니다. 그가 나타낼 수 있는 기능은 효율성과 상관없이 여전히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효율성의 리더십이 보완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긍휼의 리더십입니다. 오히려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끌어안고 가는, 긍휼히 여기는 목회가 오늘 이 시대에 동시에 강조되지 않으면 우리 교회는 건강함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마지막으로 집착의 리더십이 있습니다. 어떤 목표를 실현하려 할 때 그 목표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치고 목표를 실현하는 사람을 보기 어렵습니다. 열정, 집착, 집중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사물에 너무 집착해 우리가 봐야 할 큰 그림을 잃으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착의 반대 리더십이 관조의 리더십입니다. 이것은 거리를 두는 리더십입니다. 목회에 너무 빠져 있으면 방향이 보이지 않습니다. 거리가 필요합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법궤와 백성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여행을 하기 때문에 법궤가 백성 가까이에 있으면 보지 못합니다. 멀리 떨어져있어야 앞서 가는 법궤를 볼 수 있습니다. 가까이 있으면 때때로 보이지 않습니다. 창조와 긴장, 여유, 성찰의 거리가 필요합니다. 섬김, 자유함, 긍휼, 관조가 있는 이 관상적 리더십을 목회자, 평신도 지도자가 소화할 수 있으면 한국 교회가 더 건강해질 것이고 내면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은 더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이 될 것입니다.
관상과 지도자
유진 피터슨은 ‘관상적 목사(The Contemplative)’라는 책에서 “목사가 바쁜 것은 경건의 표지가 아닌 경박함의 표지이며, 그것은 헌신의 징후가 아닌 배신, 망신의 징후”라고 말합니다. 내가 바쁘다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박해진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가장 본질적 소명을 배신하는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빠지는 이유는 우리가 중요한 존재로 비추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쁘다는 생각 밑에는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내가 중요한 존재가 된다는 착각이 있습니다. 내가 소중한 존재일 수 있는 이유는 내가 하는 일이나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형상을 닮은 존재로 지어주신 나,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신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 하나 만으로 나는 충분히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존재입니다.우리가 바빠지는 또 다른 이유는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유진 피터슨은 말합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해야 할 일을 먼저 해놓기 때문에 아무리 바빠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넉넉한 사랑이 여전히 존재합니다.우리가 바쁘지 않다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첫째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시간에 주 앞에 엎드려 내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인생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과 나 사이의 관계를 날마다 점검할 수 있는 기도는 굉장히 중요합니다.둘째,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데 시간을 쓸 수 있습니다.셋째, 진실로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를 청취하고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지나치게 바쁜 인생을 살다보니 남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여유를 잃었습니다. 누가 우리 주변에서 이야기 하면 흘려 듣고 우리의 중심을 실어주지 못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샬롬을 추구하는 관상목회의 길
샬롬은 쉽게 평화로 번역되지만 이 단어가 가진 깊은 뜻을 다 드러내지 못합니다. 우리 주변 모든 관계가 하나님이 기대하는 그 모습대로 질서정연하게 제 자리를 찾고 하나님의 충만한 생령과 기쁨을 경험하는 상태가 샬롬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인간 복지의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입니다.이 샬롬을 추구하는 단계를 세 단계로 나눠 생각하려 합니다.첫 단계는 하나님과 내가 평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Peace with God)입니다.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충분히 많이 강조되었던 내용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평화해야 한다는 것은 그 대전제가 자연인 그대로인 나는 하나님과 평화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보내주셨고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평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 속에서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샬롬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첫 전제입니다.그러나 여기서 끝나면 안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둘째 단계는 하나님의 평화(Peace of God)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하나님의 놀라운 평화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준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 앞에 모든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과 생각을 깊이 붙들고 지배하길 간구해야 합니다.
관상기도의 적용
관상 기도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도입니다. 가톨릭 안에서도, 종교개혁 후 개신교에서도 오랫동안 이 관상기도를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긴 역사상에서 기도에 목말라있던 사람이 특히 추구하고 체험한 기도가 관상기도입니다.12세기에 귀고(Guygo)라는 사람이 관상기도를 알기 쉽게 네 단계로 나눠 사람들에게 훈련시켰습니다. 첫 단계가 넥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둘째는 매디타시오(Meditatio) 읽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셋째 오라시오(Oratio)는 묵상한 말씀을 안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세 단계는 큐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넷째는 컨탬플라시오(Contemplaio)라고 해서 이것이 관상입니다. 침묵을 통해 깊이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관상으로 들어갈 때 읽었던 말씀 중 내 마음에 부딪치는 단어 하나를 잡습니다. 그 단어를 흔히 사랑의 단어, 기도의 단어라 불렀습니다. 이 단어를 묵상하며 하나님을 떠올리고 하나님 임재로 들어갑니다. 관상 기도를 통해 추구하는 마지막 목표는 하나님과 일치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 깊이 들어가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 요한복음 15장에의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세번째 단계는 이웃과의 평화(Peace with others)입니다. 로마서 12장 18절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웃과 평화하며 이웃에 복음을 전하고 이웃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고 우리 공동체, 사회 속에 하나님의 샬롬을 구현할 수 있습니까?그 훈련으로 심리학자 조하리의 창이라는 것을 소개하겠습니다. 심리학자 조하리는 우리 내면을 네 자아로 나눕니다. 표면적 자아는 겉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나를 보고 다른 사람도 나를 볼 수 있는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저는 가장 쉬운, 겉으로 명백히 드러난 부분부터 하나님 앞에 노출시키고 다루는 작업이 없을 때 우리 내면은 결코 진정한 치유를 경험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둘째, 숨겨진 자아는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이 내가 숨기고 있는 내 자아입니다. 비밀이 많은 사람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자유하면 성도와의 교제 가운데 내 과거를 모두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은총과 치유를 경험할 때 건강한 자아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셋째, 맹목적 자아는 타인은 보는데 자신은 못 보는 자아입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이웃이 보고 고치라고 충고할 때 우리는 변명하지 말고 이웃의 충고와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자세 없이 우리 자아는 건강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넷째, 무의식적 자아는 깊고 깊은 곳에 숨겨두어 나도 모르고 이웃도 모릅니다. 그러나 깊은 기도, 침묵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성령님께서 그런 부분을 보여주십니다. 성령의 지적하심에 민감해져 어느날 홀연히 깨닫고 성령 안에서 다루어질 때 우리 내면은 얼마나 충실해지고 부유해지겠습니까?이런 관상적 내면, 하나님의 샬롬이 붙드는 평안이 지배하는 내면이 될 때 비로소 우리에게 관상적 행동(Contemplative Life and Action)이 가능해집니다.관상적 행동은 우선 숨 쉴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숨 쉬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삽니다. 관상기도하는 분은 오랫동안 숨기도를 합니다. 숨은 성령을 가장 민감히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흙으로 지으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내가 숨 쉴 존재가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숨 쉴 수 있는 여유만 가지고 바라봐도 인생이 여유롭습니다. 숨 쉬고 기도하고 결정하십시오.열 받고 이웃에 상처를 주는 상황이 되면 숨 한번 쉬십시오. 그리고 대화하면 우리 삶이 달라집니다.그리고 한 템포 늦춰 살 수 있는 여유를 가지십시오. 게을러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목표 지향적 인생을 살기 때문에 목표 이외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유를 가지고 살면 참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그런 마음으로 여러분이 춤출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꾸어야 할 평화의 꿈
마지막 이웃에 대한 관조의 여유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우리가 이웃을 바라보는 두 가지 태도를 특히 강조합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만 붙들고 산다면 우리 사역은 굉장히 달라질 것입니다. 교회도 달라질 것입니다.사람을 볼 때 겉 사람과 속 사람으로 보십시오. 겉 사람을 볼때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십시오. 외모로 보지 말고 ‘저 안에 주님이 임재하고 역사하시는 나와 다른 성전이야’라는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면 시각이 달라질 것입니다.속사람을 볼 때 깊은 속 사람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형상에는 거룩함, 자비, 긍휼히 여김, 참됨, 진지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 하나님의 형상은 깨어졌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가 하나님 형상을 깨뜨리고 상처를 냈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바라볼 때마다 그 속에 있는 깨어진 형상을 봐야 합니다. 지치고 고단하고 아프고 외로운 이웃의 모습을 보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1800년 중반에 스위스 사업가 한 사람이 거부가 되려는 꿈을 안고 스위스에서 불란서로 갔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을 만나 스위스와 프랑스의 경제 협력을 이끌어 내려는 야심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전쟁터로 떠났습니다. 그는 전쟁터로 찾아갔지만 전쟁 막바지라 나폴레옹은 다른 곳으로 떠나고 그곳에는 부상병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는 부상당한 사람의 신음소리, 통곡 소리를 듣고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마을 사람과 더불어 간호하고 돌봤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 마음에 새로운 꿈, 새로운 비전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갈 길이다. 전쟁 당하고 부상당한 모든 사람이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치료받고 섬김 받을 수 있는, 그리고 전쟁을 줄일 수 있는 평화를 추구하는 단체를 만들자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그 운동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헨리 뒤낭의 이야기, 적십자 운동 시작의 이야기입니다.그러나 부상병의 신음이 들려오는 전쟁터보다 더 심한 전쟁터가 바로 오늘날 현대인의 마음입니다. 우리 시대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어하고 절망과 괴로움 속에 있습니까? 이 치열한 인생의 전장터에서 부상병이 되어 쓰러져 도움을 청하는 이웃에게 한국 교회와 한국교회 지체된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다가갈 수 있습니까? 이 시대 우리가 꾸어야 할 평화의 꿈, 샬롬의 비전을 찾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정리 : 전성희shee@onnuri.or.kr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