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동양과 서양
이어령, ‘동양과 서양’
십자가, 거대한 모순 극복한 글로벌 리더십
저는 무릎 꿇고 기도할 자세가 돼 있으나 아직 길 잃은 양처럼 헤매고 있습니다. 일전에 하용조 목사님을 만나 나에게도 길이 열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의 연구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물러가고 토요일 밤이 깊었을 때였습니다. 외로운 순간, 나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으로 외로운 고독의 시간, 하나님께 인도받지 못한 이 사람이 솔직한 마음으로 최초의 시를 썼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이명박 시장이나 이경숙 총장의 이야기를 들었을 테지만, 이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이 강의들이 여러분의 가슴에 와 닿은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의 삶이 없습니다. 눈물겨운 삶도 없고, 이경숙 총장이 숙대를 일으킨 것 같은 드라마틱한 것도 없습니다. 생동하는 라이프(life, 삶)가 없습니다. 시인 엘리어트는 “이 세상의 얼마나 많은 라이프가 생존을 위해 사라져갔나. 얼마나 많은 생존이 지혜를 사라지게 했나. 얼마나 많은 지식이 지혜를 사라지게 했나. 얼마나 많은 정보가 지식을 헛되게 했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그에 의하며 정보가 가장 낮은 수준이며 지식 지혜 리빙 라이프 순입니다. 여러분이 하던 일을 놓고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정보가 아니라 라이프를 찾아 온 것인데 불행하게도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최하위 정보 밖에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문화적 파워가 21C 인류문명을 결정
글로벌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세계의 지도자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글로벌한 시대가 될수록 지역갈등은 심해지고 있습니다. 유럽중심의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충돌. 그 사이에 유교권 문화가 있습니다. 유교문화는 이슬람문화와 합쳐져 기독교권인 유럽을 향해 충돌하고 있습니다. 21세기의 세계지도. 지금까지는 정치, 경제가 중심이었지만 앞으로는 문화적인 파워가 인류문명을 결정할 것이란 게 21세기의 세계지도입니다. 냉전이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예언입니다.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안다면 글로벌 시대에 생존할 수 있고 리더로서의 힘을 공급받게 될 것입니다. 제가 얘기하는 것은 성서적인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이야기이므로 이를 깊이 스스로 파고들어갈 책임이 여러분께 있습니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해 본 사람이 있겠지만 사실 동남쪽으로 가면 절대로 동남아시아를 만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양 중심의 사고 때문입니다. 나를,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아주 똑똑한 우리나라 지식인들조차 우리나라를 곧잘 극동아시아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극동을 우리식으로 보면 하와이 쯤 될 것입니다.
문화권 사이에서 겪는 갈등
그게 무슨 대수냐 할 지 모르지만 우리는 문화권 사이에서 무의식적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기억 속의 나와 현실의 실제적인 나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우리는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 인줄 알지만,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아마 실제로는 일억 개쯤은 될 것입니다. 가수 패티 킴은 오색무지개라고 노래를 부르고 우리는 무지개 색이 일곱 가지인 것을 못 외운다고 얻어맞기도 했습니다.
쇼나라는 아프리카 원주민은 두 가지 색만 있다고 무지개를 해석합니다. 언제부터 무지개 색이 일곱 가지가 됐는지 아십니까. 뉴턴이 분광기를 통해 무지개를 처음 본 날, 그의 눈엔 일곱 가지 색이 인식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통용되어 온 일곱 숫자입니다.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라는 것입니다. 추측컨대 과학자 뉴턴은 기독교 신자여서 일곱이라는 숫자와 익숙했을 것입니다. 그의 눈엔 모든 게 일곱으로 보였겠죠. 기독교 중심의 서양 문화에서 비롯된 현상입니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7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한말까지도 월화수목금토일 개념이 없었습니다. 당시 조상들에게 주 5일 근무는 얼토당토않은 개념입니다. 그저 비오면 쉬고, 해 뜨면 일하는 식의 생활이었습니다.
문화적 색안경을 끼고 본 진리의 허구
서양에서는 보라색 계열의 인디고블루(Indigoblue, 남색)와 파란색을 구분하지 않는 문화가 있습니다. 인디언에서 유래한 인디고블루와 같이 동양에서도 파란색과 초록색을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호등은 세계 공통적으로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초록색을 파란색과 구분하지 않고 “얘야, 파란색으로 바뀌면 횡단보도 건너라”고 말합니다. 서양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린(Green, 녹색)이라고 해야 알아듣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믿고 있는 진리의 실체입니다. 문화적 현실에서 비롯된 차이입니다. 이 세계는 문화라는 필터의 색안경을 끼고 서로 싸우는 형편입니다. 남색과 파란색이 어떻게 같냐, 파란색과 초록색이 어떻게 같냐고 서로 싸우지만 한 가지 진리에 대한 해석의 차이일 뿐입니다.
학교 가는 것을 싫어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동양인인 이 아이가 해를 그리라는 선생님의 말에 따라 빨간 색으로 태양을 그렸더니 서양인인 선생님이 태양은 노란색이라며 구박을 줬기 때문이었습니다. 청청백일이라는 말처럼 중국의 해는 하얀색입니다. 이처럼 문화란 현실 해석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해석이 기독교적으로 유리한지, 도리어 마이너스인지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화적인 문제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사소한 이야기로 여길지 모르지만 태양을 붉게 표현하는 문화와 노랗게 표현하는 문화는 서로 배척할 여지가 있습니다. 속도측정, 구구단 등 문명을 같지만 문화는 다릅니다.
영국의 마크 바로라는 화가에게는 길에서 만난 니퍼라는 강아지가 있었습니다. 마크가 죽은 뒤에도 옛 습관대로 축음기 나팔 앞에 앉아 귀를 기울이는 니퍼의 모습을 마크의 동생이 그려 유명한 축음기의 상징이 됐고, 이 축음기는 세계 도처에 니퍼의 모습이 그려진 채 수출됐습니다. 하지만 이 축음기가 못 들어간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슬람권입니다. 마호메트가 도망 다니다 개가 짖는 바람에 잡혀 이슬람권에서는 개가 악마의 상징이 돼 있기 때문입니다. 알 수 없이 코브라의 그림 상표로 수출됐습니다. 이태리에도 못 들어갔습니다. 개처럼 노래한다는 속담 때문입니다.
이게 문화입니다. 이슬람에서는 아직도 남자가 열쇠를 휴대하며 텔레비전을 관리하는 문화가 퍼져 있습니다. 007영화의 상영시간은 채 30분 남짓합니다. 모두가 다 문화 차이 때문입니다.
이런 문화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여자가 베일을 쓰고 다니는 것을 보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오히려 그네들은 베일을 안 쓰고 다니는 사람들을 망측해합니다. 이런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한 쪽 문화의 보편성을 강요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문화의 종교적 중요성
한국의 초기 기독교는 제사문제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일본의 경우 기독교 인구는 1%대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에서는 원래부터 원수 갚는 것이 제도화돼 있었습니다. 1702년 에도 성안에서 일어난 칼부림 사건과 아코 지방의 사무라이들이 주군을 위해 복수한 실제 사건을 작품화한 ‘주신구라’란 작품이 일본의 국민문학입니다. 우리의 춘향전 격입니다. 복수 후 자신의 배를 가른 47명의 사무라이 외에도 이 ‘주신구라’에는 모두 80명이 넘는 사람들의 죽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의 죽음도 나오지 않는 우리의 춘향전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처럼 원수 갚는 것이 진실이요, 인간의 도리로 평가되는 일본사회에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가 쉽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문화는 이처럼 종교적 측면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정된 문화인식의 틀로 성경 해석
저도 고등학교 때는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여러 요소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이름과 지명들이 먼 나라 얘기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은 한국말을 알아들으실까, 사도들은 쥐가 나오는 더러운 다락방에서 어떻게 기도를 드렸을까. 모두 한국문화의 인식의 틀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데 따른 현상입니다. 또 성경에는 사람은 떡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저는 그 떡이 당시 사람들의 빵(Bread), 우리로 치면 밥을 우리말로 고치는 과정에서 나온 단어인지도 모르고 떡 대신 밥 먹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형이하학적인 것을 넘어 형이상학적인 것을 사모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무지했습니다.
우리 문화에 의해 성경의 내용 중 일부가 변형된 예입니다. 이와 관련해 한국에서 기독교가 토착화해야 하는지, 원형 그대로 지켜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이 갈등만 풀 수 있다면, 성경의 이야기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안방의 종교임을 나타낼 수만 있다면 제 자신도 무척 기쁠 것입니다.
한국어 성경, 하나님께 더 가까이
지명관이라는 학자에 따르면 한국의 성경 번역이 세계 어떤 언어로 된 것보다 잘 됐다고 합니다. 한국말로 된 성경을 읽으면 복음의 의미가 더 자세히 전달되어 온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창세기 1장 1절을 봅시다.
이 땅이 'formless'하다는 구절입니다. 우리성경은 혼돈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혼’이든 ‘돈’이든 형태가 없기는 마찬가집니다. 두 단어를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의미 전달을 극대화합니다. ‘empty’는 ‘공허’로, ‘darkness'는 ’암흑‘으로 번역한 것도 같은 방식입니다.
이처럼 한국어 성경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더 쉽게 만듭니다.
‘먹는다’, 진리와 혼연일체 되는 길
‘먹는다’는 말을 우리나라만큼 다양한 표현에 쓰는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얻어 먹었다’ ‘나이 먹었다.’ 심지어는 경기에서 한 골을 잃어도 ‘한 골 먹었다’고 표현합니다. 시간은 인간이든, 사물이든 모든 걸 먹어치우는 데, 우리사람들은 오히려 시간을 ‘먹는다’고 씁니다. 사람을 평할 때도 싱겁다는 등 먹는 것과 관련된 용어를 사용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얼마만큼 우리 민족이 ‘먹다’에 관심이 많은지 측량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저는 대학 시절 이런 사실에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자세히 연구를 해보니 정반대의 인식에 도달했습니다.
주님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한 일이 뭐입니까. 만찬입니다. 만찬석에서 주님은 ‘빵은 내 살이요, 포도주는 내 피’라고 까지 말씀하시며 먹으라고 합니다. 먹으면 주님과 우리의 거리는 제로가 됩니다. 음식은 몸 안에 들어옴으로써 비로소 몸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살과 피를 먹어 자신과 한 덩어리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도, 세상도 혼연일체가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먹는 것에 힘을 쏟는 것은 이런 면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도 언어로, 냄새로, 청각으로가 아니라 어금니로 씹어 진리와 하나 되는 것을 지향합니다.
성경에서 양치기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다닙니다. 이 마음은 양치는 사람만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탕자의 비유도 자식을 잃어본 사람만이 탕자의 소중함을 십분 납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이는 다양한 문화적 해석코드를 통해 깨달음의 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성경은 육법전서가 아닙니다. 육법전서만 떼면 합격하는 식이 아닙니다. 성령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을 이야기하지만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제하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이웃은 무한한 이웃이지 특정한 이웃이 아닙니다. 사과는 벗겨 놓고 먹으면 어떤 게 빨간 사과인지, 어떤 게 노란 사과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모두 다 같은 사과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동양이다, 서양이다라는 것 때문에 이웃사랑에 벽을 쌓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거대한 모순을 극복한 예수님의 리더십
온누리교회에 오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딴 교회가면 사탄아 물러가라고 할 법도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방인도, 죄 지은 자도 올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리더십입니다. 세계를 제패하는 길입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모순을 극복하고 이를 결합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으로써 자유와 평등을 모두 끌고 갈 수 있는 지도자가 참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한 손을 펴 사랑을, 다른 한 손을 쥐어 정의를 보여주셨습니다. 모순을 극복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면 고뇌 속에 돌아가신 그 분의 고통, 가슴을 치는 아픔과 함께 환희, 재생이라는 거대한 두 모순이 십자가의 크로스(접점)에서 생명으로 태어남을 깨닫습니다.
글로벌 시대의 관용, 융합의 리더십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정리=차명권 salt@onnuri.or.kr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