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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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노인팅 둘째날 저녁예배 게리파렛 경배와찬양

둘째날 저녁예배_경배와 찬양

게리파렛 목사

 

방금 하스데반 선교사님의 인도로 드려진 예배는 주님을 향한 사역의 전형입니다. 제가 한국말을 배울 때 흥미로웠던 게 있는데 먹는 것을 즐기는 한국사람의 성향에서 나온 말인 것 같습니다. 그건 먹는다는 표현을 여러 곳에서 응용해 쓰는 사실이었습니다. ‘잊어 먹다’ ‘나이 먹다’ 등이 그 예입니다. 한편 예배를 ‘보러 간다’는 말이 또한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어떻게 예배를 볼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여러분들이 드린 찬양예배는 정말 보이는 수준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드리는 찬양을 보면서 비전이 넓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예배원리-계시와 반응

 

오늘 저는 여러분과 예배의 가장 중요한 원리를 나누고 싶습니다.그건 모든 예배의 경험은 계시와 이에 대한 반응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에게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나로부터가 아닙니다. 하나님 스스로 계시하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스스로 임재를 계시할 때 신실하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성령님을 초청하십시오. 그리고 반응을 하십시오. 주님, 말씀 하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구속하셨군요.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듣겠습니다. 가라고 하면 가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예배는 항상 계시와 반응을 포함합니다. 성경에도 이런 원리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십계명이 기록된 출애굽기 20장을 상기해 보십시오. 어떻게 시작하는지 기억하십니까.‘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십계명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심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너를 애굽에서 이끌어내고 노예에서 탈출하게 한 이가 바로 하나님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이것이 계시입니다. 이렇게 계시를 보여주신 하나님께서는 다음 구절을 통해 반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지키는 반응을 명령하시기 전에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를 계시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반응을 요구하시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계시를 드러내어 주십니다.신명기 6장 4~5절을 함께 봅시다.“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여기서 계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라는 유일신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반응은 무엇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6절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입니다. 만약 여호와께서 유일한 한 분이시라면 그 한 분에게 우리의 사랑이 다 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일 것입니다.신약 요한일서를 살펴봅시다. 4장 10절입니다.“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얼마나 놀라운 계시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아들을 희생제물로 주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계시인데 정말 놀라운 계시입니다.11절입니다.“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이 말씀은 10절에 대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사랑의 계시는 특정한 반응을 불러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사랑이시라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반응입니다.로마서 12장 1절을 봅시다.“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긍휼을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그 반응으로 우리가 희생제물이 될 것을 원하시고 계시는 겁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모든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반응입니다. 어제 커다란 산 비유를 했습니다. 각 사람이 보는 것은 커다란 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예배란 무엇입니까. 신실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신실한 반응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반응을 원하시고 계십니까.성경은 예배를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샤카, 헬라어로 프로스크네오는 엎드리다, 엎드려 경배하다의 뜻입니다. 이 때 엎드린다는 것은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한다는 뜻입니다. 신약과 구약의 예배 때 가장 기본적으로 쓰이던 표현입니다.히브리어 아바드와 헬라어 라트레우오는 섬기다는 뜻입니다. 이 ‘섬기다’는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살아있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린다는 뜻입니다.  노예가 주인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복종의 행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노예는 절하고 난 뒤 일어나서 섬깁니다.또 다른 측면에서 예배를 정의한다면 예배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계시에 대한 반응입니다.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완전하심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것을 다 바쳐 순종하는 것이며 배우면 배울수록, 주님 앞에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욱 경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에 대한 계시와 반응

 

이사야 6장 1~8절은 게시와 반응을 잘 표현해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가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에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유명한 구절입니다. 여기에는 게시된 부분이 여럿 있습니다. 매번 계시가 임할 때마다 하는 이사야의 반응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6장은 첫 계시로 하나님의 중심 인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형용할 길 없이 거룩해서 거룩하다는 표현을 세 번이나 썼습니다.이에 대한 반응으로 이사야는 놀라운 것을 보게 됩니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것을 봅니다.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걸 봅니다. 본 것은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귀로 들리기까지 했습니다. 귀에 들린 음성은 엄청나게 컸습니다. 터와 기둥이 흔들릴 정도로 큰 소리였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몸으로 느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에 연기가 자욱하고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압도된 경험입니다.오늘 찬양을 드릴 때 압도당하는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다가오시는 경험입니다. 그 경험을 수십 배로 높여 보십시오.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놀라운 경험 뒤에 이사야가 한 반응은 무엇입니까.‘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죄에 대한 고백입니다. 소망 없이 절망까지 나아가는,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됩니다.하나님이 보여주신 계시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맞습니다.

 

계시…그리고 죄에 대한 고백

 

우리는 지금 이 예배를 끝낼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가 놀라운 예배였다고 말하면서 끝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반응이 신실하심에 대한 가장 적절한 반응이라고 말하면서 모든 순서를 끝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라면 매우 슬픈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도 놀라운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하나님은 긍휼하시고 은혜가 많으시며 거룩하다는 계시에 대해 망하게 되었다는 고백의 반응에 열쇄가 있습니다.이사야는 죄인이었기에 절망의 상태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스스로 죄인된 자를 위하여 개입하시기 시작합니다. 단 위의 숯을 가지고 입술을 만지게 합니다. 활활 타오르는 숯을 가지고 입술에 대면서 천사는 그 개입 행위의 의미를 알려줍니다.‘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숯이 죄를 씻었다는 말입니다.

 

겸손히 순종하는 반응의 가치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두 가지 측면으로 보여주십니다.행위와 설명으로 보여주시는데 이 둘은 동시에 진행합니다. 이사야는 긍휼로 다가오시는 행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하십시오. 성경은 정확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구원 행위에 대한 반응은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좋은 반응입니까. 예. 완벽한 반응입니다.여러분도 당연히 이렇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긍휼하심에 대해 우리가 항상 이렇게 반응하는 것만은 아닙니다.사단은 자만심을 비롯한 온갖 것으로 이 반응을 방해합니다. 베드로가 발을 씻기시려는 예수님을 향해 던지는 말의 이면에는 자만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가끔 전도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할 때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데 왜 그들은 믿지 않을까라고 조바심을 낼 때가 있습니다. 이것도 자만심 때문입니다.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자만심입니다.

예배는 무언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터치를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계시할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사명을 계시할 것입니다. 할 일이 있다는 거죠.하나님은 말씀 하십니다.“누가 나를 위해 갈꼬. 누가 말씀을 들고 갈꼬.”여러분들이 이렇게 반응하시길 바랍니다.“하나님, 나를 보내 주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예배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모든 예배가 이런 고백을 하면서 끝나길 바랍니다.그런데 항상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 일까요.로마서 12장 1절을 다시 상기시키는 대목입니다. 우리고 이사야와 같은 고백을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깨진 시대에 할 일이 있다고 전해 주는 이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며 할 일이 있다고 선포해 주는 이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하나님의 긍휼에 압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처럼 우리 죄 때문에 눌리지 않고 압도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거룩하심에 압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이사야는 자신의 죄악에 압도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그림들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계시가 불명확하면 반응도 불명확하게 나타납니다.

 

다양한 하나님의 모습 계시

 

교회 안에서 사랑에 대한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반면 하나님의 다른 성품에 대해서 노래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죄의 용서 등에만 집중적으로 노래를 하다 보니 구속 사건에 대해서는 감동하지도 않는 분위기가 흐르는 곳도 있습니다. 거룩하심에 대해서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번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노래가 있냐고 하니깐 없다는 대답을 찬양 사역자에게 들은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이 질투하시는 하나님,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계시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기도 어렵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드려야 하는 예배의 모습에서 빗나가게 됩니다. 우리네 교회는 성경의 모든 부분을 가르치기보다 기호에 맞는 일부분만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지는 않습니까.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자의 그릇된 예배에 대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성경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도 성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성경은 현재 우리가 보는 성경의 일부분만 떼어서 만든 것입니다. 그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을 다 담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제대로 예배드리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계시로 밝히시고 오늘 한 가지 응답을 요구하십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 중에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입니다. 사두개인은 성경에서 뭔가를 뺐던 사람들입니다. 기적도 안 믿고 영과 천사를 부정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은 성경에 뭔가를 더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명확한 계시에서 멀어졌던 것입니다.

한국교회, 열심과 지식의 균형 기대

전 한국과 30년간 인연을 맺어왔습니다. 그러면서 한국 교회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가장 부러운 것은 열심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국 사람들의 노력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다른 것이 또한 필요하다고 말합니다.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는 열심과 지식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열심은 지식에 의해 인도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은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 받아야 합니다.이런 이유로 우리의 예배도 그 가운데 말씀이 많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크게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외워야 합니다. 여러분을 말씀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계시와 반응의 최종판, 예수 그리스도

 

성경만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1장은 아들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이 모든 날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였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2절)예수님은 완벽한 계시이면서 또한 완벽한 반응을 보여주셨습니다. 인성을 가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을 알면 계시와 반응을 동시에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보여주신 계시와 반응은 ‘사랑’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시려고 하는 계시와 요구하시는 반응은 결국 ‘사랑’입니다.마지막으로 말씀 한 구절을 선포합시다.“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장 10절)/정리=차명권 기자salt@onnuri.or.kr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