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5일 일
사역

온누리 미디어 커뮤니케이터 아카데미 3주 - 교회신문편집의 실제

 

함정훈 전 국민일보 편집국장

 

지금은 제목 시대... 상상력 동원해 가슴에 호소해야편집은 기술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관점으로 봐야

 

IT 다매체 시대에 종이가 설 자리가 없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현장에서도 그런 느낌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종이는 황혼기에 들었어도 편집은 새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템이라도 편집 없이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제목시대

 

편집은 함축입니다. 특히 제목이 중요합니다. 좋은 제목은 글자 수가 홀수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기사를 읽고 기사 내용에 있는 어휘들만을 뽑아 조합하면 좋은 제목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숲이 아니라 나무를 보는 취재기자들이 선택한 어휘들은 문장 속에서는 정확할지 모르지만, 제목으로는 효과적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제목은 글보다 말에 가까울 때 독자들에게 더 다가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SNS시대, 제목시대입니다. 단문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입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우리의 존재가 드러났듯이 기사는 편집자가 제목을 달았을 때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가 제목을 붙이는 것이 편집입니다. 앞서 편집을 함축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실제로 제목은 짧을수록 좋습니다. 좋은 제목을 뽑기 위해서는 말도 안 될 것 같은 어휘들이나 표현을 평소에 메모하는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상상력을 발휘하다보면 때론 유치하고 장난스러운 표현들까지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것들도 값진 보석의 원석이 됩니다. 피드백을 통해 다듬고 수정해 나가면 허를 찌르는 역발상의 제목, 심금을 울리는 메시지가 담긴 제목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21세기북스에서 ‘You Excellents!: 칭찬의 힘’이라는 제목을 책을 냈으나 불과 2만부를 파는데 그쳤습니다. 이 책을 제목만 바꿔 다시 내어 놓았는데 무려 100만부 이상이 팔려 베스트셀러에 선정되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입니다.

이처럼 제목은 전광석화처럼 독자의 뇌리에 박혀야합니다. 편집기자는 편집과 제목으로 이야기합니다. 할 말이 있으면 되도록 11자 이내로 말해야 합니다. 편집은 하나님이 하던 일을 우리가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좋은 직업입니다.

 

가슴으로 말하는 편집자가 되어야

 

편집자가 버려야할 습관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여백 공포증입니다. 여백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비어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백에도 무게가 있습니다. 여백도 훌륭한 디자인의 요소입니다. 여백은 면이 될 수도, 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백을 금기시 했던 세로짜기 신문편집의 잔재가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입니다. 여백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더 어려운 문제는 여백에 대한 거부감을 버린 후 그 여백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특히 타블로이드 판형에서는 각 신문의 성격에 맞는 적절한 여백의 값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사진 불감증입니다. 좋은 사진 한 장이 얼마나 지면을 빛낼 수 있는지, 기사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늘 깨어 있어야합니다. 감동과 메시지가 없는 사진들은 과감한 트리밍을 통해서라도 편집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능동적으로 활용해야합니다. 편집기자가 감동적 사진을 보고도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인간의 감각 중 뇌에 가장 큰 쇼크를 주는 것이 시각입니다. 사진 한 장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디자인 강박증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서체 남발과 그래픽 남발의 다양성은 약이 아니라 독입니다.

요즘은 스토리텔링시대입니다. 스토리텔링은 가장 효과적인 교감 방법으로써 복잡하고 골치 아픈 내용을 쉽고, 재미있고, 몰입하게 바꾸어 줍니다. 그렇다고 모든 분석적인 사고를 스토리텔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스토리텔링은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해줍니다. 편집기자는 스토리텔러, 포토텔러, 에디텔러가 되어야 합니다. 에디텔링은 1차원적인 메시지 전달 편집에서 벗어나 접속, 공감, 각인 과정을 거치며 에너지를 증폭시킵니다. 단순한 확대 개념의 증폭이 아닙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에 전달되는 증폭입니다. 

일반적 편집메시지가 ‘화살’이라면 에디텔링은 ‘파장’입니다. 넓고도 깊은 진동입니다. 레이아웃이나 사진 트리밍, 그래픽, 일러스트, 삽화 등도 동일합니다. 속보와 특종이 사라진 신문제작 환경에서 에디텔링은 신문이 존재해야할 마지막 이유입니다. 에디텔링의 힘은 지성을 통한 전달이 아니라 감성을 통한 각인에서 나옵니다.

 

온누리신문의 주인은 성도

 

교회신문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온누리신문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요. 온누리신문은 편집자의 눈과 귀로 전해야 합니다. 편집자의 눈과 귀는 공허하고 혼돈된 상황에서 질서를 잡고 의미와 이름을 부여합니다. 이 때 편집자는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온누리’는 ‘전 세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온누리는 모든 누리, 온전한 누리라는 뜻입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본래 모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해서 보시기 좋았다는 그 누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온누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 빛이 좋았습니다(창 1:1~4).”여러분은 편집자의 원조가 누군지 아십니까. 편집자의 원조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혼돈 속에 온누리를 불러서 정돈하였습니다. 온누리는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는 교회입니다. 온누리신문은 교회공동체에서 소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현재의 온누리신문은 촘촘한 바느질처럼 잘 정돈되어 있는, 체온으로 말하면 18도씨입니다. 영성을 담은 신문에 체온과 피가 없습니다. 신문을 선정적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문에는 사람과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박제된 실험실의 개구리가 아니라 펄펄 뛰는 개구리가 한 페이지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36.5도의 훈훈한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Acts29 비전’은 사도행전은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쓰여야 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온누리신문은 온누리 성도들이 모두 함께 만들어야 합니다. 소통과 참여를 통해 다 같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온누리신문에 우리의 느낌이 있고, 피가 흐르는 ‘36.5도의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교회는 양떼들을 위해서 지어졌습니다. 온누리신문도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문에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입을 주신 것은 말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참여하면 됩니다. 제일 쉬운 방법은 시, 수필, 간증입니다. 온누리교회 안에 시인과 작가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찾으십시오. 관례를 깨지 않고는 새로움이 없습니다. 하늘 아래 하나님께서 주신 것 외에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새로운 것이 없으면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다른 방향도 어려우면 거꾸로 가봐야 합니다. 이렇게 시도할 때 새로운 길이 보입니다.

온누리가 온 세상을 품에 안겠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땅 끝까지 전도하라고 하시는데 교회 바로 옆에 있는 신동아 아파트는 어떻습니까? 그들의 종교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들의 이웃과 동네부터 돌아보아야 합니다.

편집은 기술이 아니라 성령입니다. 편집은 오래한다고, 밤을 샌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이심전심으로 만드는 신문이 온누리신문입니다. 온누리신문이 온누리교회의 기관지가 아니라 온누리에 빛을 발하는 신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문의 주인공은 여러분입니다.  / 정리 황치연 기자 hcy@onnuri.org

작성자  온누리